Marriage business RAW novel - Chapter 23
CHAPTER 23. 종장
빅토르 2세는 다음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서거했다. 오델리 왕녀가 제왕학을 배운 지 일 년이 조금 안 된 시기였다.
오델리는 부랴부랴 왕위에 올랐고, 명실상부한 세브랑의 여왕이 되었다.
오델리를 탐탁지 않아 하던 귀족들은 그녀가 우왕좌왕하며 나라를 어찌 꾸려 가야 할지 모를 것이라 입을 모았다. 연회나 시종일관 열면서 나라의 국고를 비울 거라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녀가 왕이 되기가 무섭게 한 일은 바로 아라곤에게 칼날을 들이민 것이었다. 그녀는 자코브와의 밀약을 들이밀며 아라곤에게 배상의 책임을 물었다.
아라곤과의 조율에 사신으로 나선 것은 바로 자카리였다. 자카리가 사신으로 아라곤을 방문하니, 아라곤은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심정으로 참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최후의 발악으로, 그들은 성인인 비앙카와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주장했다. 하지만 세브랑 측에서는 자코브가 아르노 성을 침략한 일을 묵인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증거로 들이밀었다.
아라곤은 결국 오델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종전 협상을 마무리 지었고, 세브랑에는 평화와 부흥이 찾아왔다.
그전까지 귀족들은 오델리가 왕이 된 것이 그저 자코브의 죽음 덕에 얻은 어부지리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녀를 지나치게 총애했던 왕이, 아들들의 죽음에 노망이 난 것이라고.
하지만 아라곤까지 무릎을 꿇으니 더 이상 나태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오델리는 단호했으며, 냉정했고, 이성적인 위정자였다.
더불어 그녀의 뒤에는 아르노 공작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경한 그녀의 정치에 반발할 용기가 없었던 귀족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명에 따르게 되었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다.
오델리가 왕위에 집권한 지도 어언 십오 년.
그녀가 왕위에 오르기 전 해에 태어난 아르노가의 외동딸, 알렉산드라 드 아르노도 열여섯이 되었다.
열여섯은 충분히 결혼 적령기였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영웅 아르노 공작이며, 어머니는 성인 비앙카가 아니던가. 단지 그 조건만 놓더라도 알렉산드라와 결혼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아르노가에 구애의 서신이 물밀듯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알렉산드라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품에 꽃다발을 끌어안은 채 아르노 영지의 들판을 재빠르게 달려가던 알렉은 마을에 들어오고 나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막 교회에서 기지개를 켜며 나오던 대주교 토마스와 부딪힐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를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깜짝 놀란 토마스가 소리 질렀다.
“아이고, 신도님!”
“죄송해요, 대주교님! 빨리 어머니한테 가 봐야 해서요. 급해요!”
알렉은 슬쩍 뒤돌아보며 외치고는, 다시 쌩하니 달려갔다. 길쭉한 팔다리로 흰 사슴처럼 성큼성큼 뛰어가는 모습에선 생기가 흘러넘쳤고, 짧게 자른 은빛 머리카락은 태양을 받아 흩뿌려진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다. 소년 같은 중성적인 매력은 보는 이들을 사로잡았다.
토마스는 그런 알렉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교황에 의해 대주교로서 아르노 영지에 보내진 지도 어언 십육 년. 알렉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봐 왔던 만큼, 그녀의 천방지축인 모습 또한 귀엽기 그지없었다.
토마스는 그저 막 주교가 되었던 신출내기 수도사였던 자신이 어쩌다 아르노 영지까지 오게 되었는지 떠올렸다.
아르노에 부임한 대주교의 자리를 놓고 추기경들이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할 때, 대뜸 교황이 추천한 것은 바로 토마스였다.
누구의 파벌도 아니고, 신분도 주교일 뿐이다. 그런 그를 서품마저 대주교로 올려서 아르노 영지로 보내려 하니, 주변 이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토마스 또한 부담스럽다며 자리를 사양했다. 하지만 교황은 거듭 요청했다.
“자네가 지금껏 파벌에 들어서지 않은 것은 자네의 그 균형 감각 덕분 아니던가. 아르노 영지에 필요한 건 그런 이이네. 아무의 편도 아닌 자.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 자. 오로지 신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자.”
교황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토마스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추기경들이 그를 자신의 파벌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토마스는 꿋꿋이 버텼다. 십여 년이 넘고 나서야 추기경들로부터 연락이 좀 뜸해졌지만, 최근에는 다른 종류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바로, 토마스가 추기경이 되어 교황이 되려는 욕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 * *
지금까지는 성인인 비앙카가 주변에 두문불출했고, 신의 뜻이라 알려진 알렉산드라 드 아르노는 그저 어린 여자아이였다.
만약 알렉이 사내아이였다면 대단한 위인이 될 거라 모두가 입을 모았을 테지만, 알렉은 여자아이였다. 신께서 계시까지 내려가며 알렉을 태어나게 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들은 알렉의 존재를 그리 중하게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토마스가 아르노가의 대주교로 머문다 하여 교단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알렉이 자라날수록, 그들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기 전에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 것이 거짓말처럼, 알렉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게 컸다.
어찌나 건강하게 자랐는지, 주먹질이면 주먹질, 검술이면 검술, 승마면 승마. 알렉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르노 영지에 사는 열댓 살 먹은 남자 아이들 중에서 그녀를 이길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무예에 관심을 갖더니 열셋에 기사 작위를 받고, 열여섯에 아버지의 뒤를 따라 전쟁에 참전했다.
아라곤과는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그것도 벌써 십여 년이 지났다. 아라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세브랑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고, 세브랑의 국경은 또다시 불안해졌다.
주변에서는 알렉이 여자고, 아직 어리다는 것을 이유로 참전을 반대했다. 하지만 알렉의 의지가 강경했고, 자카리 또한 단호했다. 알렉은 검의 길을 가기로 맹세했으며, 그런 그녀를 따뜻하게 보호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주장했다.
그리고 알렉은 아버지의 기대에 보답했다. 그녀는 열여섯의 나이와 여자라는 반대가 우습게도, 첫 참전한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이름을 알렸다.
그제야 교단의 사람들은 알렉산드라 자체가 신의 뜻이며, 신이 바라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혹여나 토마스가 그녀를 등에 업고 교황청에 발을 디딜까 두려워한 그들은, 계속해서 토마스를 압박하고 경계했다.
그만큼 알렉의 무용은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그런 알렉의 모습을 대단히 여기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알렉의 유모, 이본느 남작 부인이 그러했다.
이본느는 비앙카의 옆에서 뜨개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요즘 공작님보다도 더 알렉 아가씨의 무용담이 소문 자자한 거 아세요? 이러다가 혼사가 다 막히겠어요. 이게 전부 얌전히 태교해야 할 시기에 마님이 전쟁을 치르며 별꼴을 다 보셨기 때문이에요.”
“강인한 태교 덕분에 강인하게 자란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비앙카는 수를 놓던 손수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푸줏간의 요셉을 주먹으로 때려눕혔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어요?”
“아니. 처음인데. 별로 새롭지는 않구나.”
어깨를 으쓱이며 흘려 넘기는 비앙카가 답답했던 이본느는 가슴을 내려쳤다.
그녀에게 알렉은 친딸 이상이었다. 어찌나 열과 성을 다하는지, 이본느의 친아들인 개스톤에게 이본느가 알렉에게 쏟는 관심의 반의반이라도 쏟았으면 좋겠느냐 묻는다면 개스톤이 진저리를 치며 물러설 정도였다.
“재봉실의 한나에게 계속해서 치근대는 걸 보곤 그대로 엉덩이를 뻥 차 버렸다곤 해요. 요셉은 그대로 날아갔고요. 그 위에 올라타서…. 어휴. 하여튼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정의롭고…. 하지만 아가씨도 이제 결혼하셔야 할 나이잖아요. 데릴사위도 들여야 하는데, 언제까지 저렇게 천방지축으로 구시려는지….”
예전이었다면 데릴사위를 들여 가문을 이었겠지만, 오델리 왕녀의 왕위 즉위 이후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여자가 가문을 잇는 일이 점점 늘어났고, 아르노 공작가에서도 알렉을 차기 공작으로 삼았다.
딱히 반발은 없었다. 알렉이 보여 준 전공과 신의 뜻이라는 배경. 아르노 공작 위를 노리고 시끄럽게 굴 만한 방계의 혈족도 없었다.
알렉과 결혼한다면 공작의 남편이 될 뿐이었지만, 그 또한 높은 자리였다. 게다가 알렉은 은회색 머리카락과 서늘한 연록빛 눈동자의 미인이었다.
그렇게 좋은 조건 덕인지, 드센 성격으로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알렉은 제법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최근 들어 알렉의 뒤를 유난히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를 떠올린 비앙카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좋다는 애가 없진 않더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예요. 상대가 바로 시릴 왕세손이잖아요! 왕가와 혼인하려면 어느 정도 예의범절을 익혀야….”
“유모!”
그때 알렉이 소리 높여 외치며 비앙카의 방에 뛰어 들어왔다.
귀가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잘라낸 은빛 머리카락에는 나뭇잎이 묻어 있었다.
차림새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편한 바지에 종아리까지 오는 부츠. 셔츠 위에는 튜닉. 전쟁이 없는 동안 한껏 방만함을 즐기고 있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은백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그녀는 제 아비를 똑 닮아 있었다. 다른 것은 표정 정도일까. 무뚝뚝하니 미간만 찌푸리는 자카리와 달리, 알렉의 표정은 훨씬 다채로웠다.
그들에게 총총총 다가온 알렉은 입술을 삐죽이며 이본느에게 눈을 흘겼다.
“또 헛소리하고 있지!”
“뭘요. 알베르 왕자 전하의 아드님께서 아씨만 보면 좋아 죽는다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본느는 천연덕스레 시침을 뚝 떼고 답했다. 이본느가 말하는 것이 시릴임을 눈치챈 알렉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현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알베르 왕자는 유약하고 왕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약혼한 카스티아의 공주와 열여덟에 결혼했고, 그가 스물넷이 되었을 때 시릴이 태어났다.
알베르는 자카리가 시릴의 대부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자카리 또한 그 제안을 승낙했고, 대부가 되기 위한 간단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 라호즈로 향했다.
그때 알렉이 함께 동행했고, 그것이 바로 알렉과 시릴의 첫 만남이었다.
시릴과는 첫 만남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유모의 아들인 개스톤 이후로 처음 보는 아기의 모습이 신기했던 알렉이 시릴을 내려다보는 찰나, 시릴이 알렉의 머리칼을 움켜쥔 것이었다.
어찌나 세게 잡은 채 놔주질 않았는지, 결국 알렉은 당시 허리까지 오던 머리카락을 싹둑 자를 수밖에 없었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안 그래도 걔한테 뜯긴 머리털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알렉은 투덜거렸다. 이본느 또한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였다. 갑자기 수도에 간 아가씨가 머리를 사내아이처럼 싹둑 자르고 왔으니, 놀라지 않는 쪽이 이상했다.
하지만 이본느가 누구던가. 허투루 알렉을 키운 것이 아니었다. 알렉이 그걸 빌미로 일부러 머리를 기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던 이본느는 피식 웃으며 모르는 척 알렉을 놀렸다.
“뭘요. 이미 알베르 왕자님은 반쯤 아가씨를 시릴 왕세손의 신붓감으로 여기고 있는 걸요. 아가씨가 빨리 결혼하시지 않으면, 그사이에 시릴 왕세손이 훌쩍 자라 아가씨에게 청혼할걸요?”
그렇게 요란스레 첫 만남을 치른 이후, 알렉은 시릴만 보면 그렇게 좋아했다. 급기야 나중에는 엄마 아빠 소리보다도 알렉을 먼저 발음해서 주변 사람들을 기겁하게 하기까지 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시릴은 알렉이라면 좋아 죽었다. 알렉이 라호즈에 입성하기만 하면, 하루 종일 졸졸졸 알렉의 뒤를 따라붙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현재 진행형이었다. 시릴이 귀찮기 그지없었던 알렉은 질색을 하며 몸서리쳤다.
“유모! 걔랑 나랑 열세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걘 이제 세 살이야, 세 살!”
“마님과 백작님도 열세 살 차이 나는 결혼을 했잖아요. 나이는 그다지 상관없답니다.”
이본느는 흥얼거리듯 대답했다. 왕가의 결혼은 안 그래도 빠른 법이다. 칠 년 후. 시릴 왕세손이 열 살만 되어도 왕가에서는 결혼을 서두를 것이다.
상대는 차기 공작. 괜히 다른 가문과 결혼시켜 세를 불리느니, 왕가에 편입시키는 쪽이 낫다 여길 것이다.
시릴 왕세손은 세브랑과 카스티야의 적법한 핏줄이 흐른다. 잘만 하면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권까지 빼앗아 올 수 있는 혈통인 만큼, 세브랑에서는 기필코 시릴을 지키려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를 지켜줄 수 있는 강한 이는, 바로 알렉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속셈이 곁들어진 이야기들이었다. 지금의 알렉이 신경 쓸 필요 없는. 비앙카는 길어지려는 이야기를 끊으며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알렉, 갑자기 웬일이니? 지금은 뱅상과 재무 수업을 하고 있어야 하지 않니.”
“짜잔~!!”
그때, 알렉이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잘 보니 얼기설기 만든 화관이었다.
“꽃이 예쁘게 피었기에, 화관을 만들었어요! 엄마 머리색에 잘 어울릴 거예요.”
알렉이 건넨 샛노란 화관은 그리 솜씨가 좋지 못해 조악했다. 하지만 비앙카는 진심으로 감탄을 흘리며 화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머, 예뻐라.”
“마님, 거기선 수업에 빠진 걸 혼내셔야지요.”
“뭐, 수업은 빠질 수도 있지.”
비앙카가 태연스레 대꾸하자, 알렉의 입가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알렉은 다시 비앙카에게 화관을 받아, 비앙카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고동색 머리카락에 노란 꽃이 무척 예뻤다.
이본느 또한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흡족스럽게 바라본 비앙카는, 거울을 물리며 덧붙였다.
“애가 하고 싶다는 대로 둬. 알렉이 아주 노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결혼도 마찬가지지. 우리 집안이 굳이 왕가를 고집할 이유도 없잖아. 알렉이 싫으면 다른 혼처를 찾아보면 되는 일인 걸. 왕녀님처럼 결혼을 안 하는 선택지도 있고.”
“하지만 마님….”
“나도 하고 싶은 일만 해 왔잖니. 얘도 그래도 돼.”
비앙카는 강경할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일만 해 왔다는 표현에서는 경험이 진득이 묻어났다.
자신을 믿어주는 엄마의 말에 알렉의 날카로운 눈꼬리가 강아지처럼 휘어지며 활짝 웃었다. 비앙카보다 훌쩍 큰 알렉은 의자에 앉아 있는 비앙카를 와락 끌어안았다.
“엄마가 우리 엄마여서 너무 좋아. 다행이야. 난 행운아야.”
비앙카는 피식 웃으며 알렉의 등을 토닥였다.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적군에게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라고는 하지만, 비앙카가 보기엔 아직도 철없는 딸일 뿐이었다.
비앙카는 알렉의 짧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엄마는 사랑에 많이 실패했어.”
“알아요. 몇 번이고 들었잖아요.”
알렉은 비앙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유일하게 비앙카를 닮은 연록빛 눈동자가 곧게 그녀를 응시했다.
“다행히도 그 끝에 네 아빠와 진심을 나눌 수 있었지. 하지만 엄마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경우였단다.”
비앙카의 말에 알렉은 눈을 깜빡였다. 사랑에 대해 가닥을 잡기엔, 그녀의 세상은 아르노 영지와 검, 전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렉이 아무것도 모르리라는 걸 비앙카도 충분히 이해했다. 열여섯의 그녀라 해서 무얼 알았겠는가?
외로웠던 비앙카는 잘못된 선택을 했고, 다행히도 그것이 꿈속의 일이었기에 되잡을 수 있었다. 사랑은 달콤하지만, 사랑이라 착각하고 몸을 내던지는 것은 불로 뛰어드는 부나방이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알렉은 그녀처럼 거짓 애정에 흔들릴 아이도 아니거니와,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로서의 노파심에, 괜스레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은 덫과 같아. 언제나 너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지. 그 덫을 피해, 어떤 길을 갈 것인가는 네가 신중히 선택하는 것이고…. 하지만 알렉산드라 드 아르노.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엄마와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렴.”
비앙카의 손끝이 알렉의 뺨을 어루만졌다. 막 자라나는 딸의 싱그러운 뺨은, 그녀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 찬란한 인생에 그녀가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에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날을 떠올리기만 하면 비앙카의 입술이 빙긋이 올라갔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하고 있었소?”
그때, 자카리가 찾아왔다. 그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비앙카와 알렉을 보며 궁금함이 그득한 얼굴로 물었다.
비앙카는 나직이 웃으며 그들이 나눈 대화를 간략히 축약했다.
“화관, 수업, 그리고 결혼 문제요.”
단지 세 마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정황을 파악하기는 충분했다. 자카리의 시선이 비앙카의 머리 위에 있는 노란 화관에 닿았다. 화관을 쓴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드는지, 그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씰룩였다.
화관은 비앙카와 잘 어울렸고, 수업은 어련히 비앙카가 한마디 했을 테고, 결혼 문제는….
“결혼이야 알렉이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어차피 알렉은 우리 가문의 후계자요. 급할 것 없소.”
어투만 다르다 뿐이지, 비앙카와 똑같은 대답이었다. 부창부수라더니. 몸이 달아 있는 건 이본느뿐이었다. 이본느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비앙카에게 화관도 전했겠다, 볼일이 끝난 알렉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물러서며 밝게 말했다.
“그러면 전 나가 볼게요.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그래. 이따 보자, 알렉.”
“네. 사랑해요, 아빠. 사랑해요, 엄마.”
알렉은 비앙카와 자카리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성큼 방 밖으로 뛰듯 빠져나갔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려는 듯, 서두르는 걸음걸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알렉이 자리를 뜨기가 무섭게 이본느가 가볍게 인사를 올리고는 알렉의 뒤를 따라나섰다. 미간에 주름이 잔뜩 진 것을 보아하니, 알렉이 빠진 수업에 대해 닦달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이본느가 저렇게 알렉을 신경 써 준 덕에, 비앙카가 그나마 여유로운 자세를 유지하며 알렉의 교육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항상 이본느의 도움만 받고 있는 만큼, 비앙카는 고마움이 가득한 눈으로 이본느의 등을 지켜보았다.
그런 비앙카의 모습을 곡해한 자카리가 비앙카의 눈치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알렉의 결혼이 걱정이오?”
“설마요. 저보다 똘똘한 아이인걸요. 훨씬 솔직하고.”
비앙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놓친 한마디를 덧붙였다.
“고집도 세지.”
“그건 그래요.”
비앙카의 수긍에 자카리가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고집 센 두 사람의 자식은, 두 사람 고집을 한데 섞은 것 이상으로 고집이 셌다.
자카리가 비앙카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잡았다. 세월이 흐르며 더욱 거칠고 주름진 손이, 여전히 하얗고 고운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친밀한 손짓 사이에서 느껴지는 집요함에 비앙카는 작게 웃었다.
“…걱정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걱정만 해 봤자니까요. 알렉이 무슨 선택을 하든 우리만큼은 계속해서 믿고 지지해주기로 결정했잖아요.”
알렉이 처음 전장에 나갔을 때, 비앙카는 의연히 그녀를 마중했다. 자카리의 뒤를 따라 말을 모는 딸의 등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성문 앞에서 꿋꿋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홀로 남은 성안에서 조용히 눈물지었다.
신이 내려 준 아이이니만큼, 이 아이가 미래에 대단한 사람이 된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딸을 전장에 보내는데 어찌 걱정되지 않겠는가?
비앙카는 알렉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려는지, 그녀가 무슨 업적을 쌓을지에 대해선 그다지 바라는 것이 없었다. 단지 알렉 덕에 이 행복을 얻게 되었으니, 이 아이가 행복하게만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비앙카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의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가는 어깨를 도닥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알렉에게는 우리가 있고…. 그대에게는 내가 있잖소. 너무 우려하지 마시오.”
“든든하네요.”
비앙카가 눈을 휘어 웃었다. 자카리의 말대로, 비앙카가 알렉의 일에 의연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카리 덕이었다.
자카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했고, 희생적이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들이, 그녀의 믿음을 단단히 지지해주었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자카리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수도 없이 의심했을 때도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진창으로 떨어져 내렸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난, 그 모든 일들을 웃으면서 회상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지금이 행복하기에. 지금에 충실하기에.
결혼을 그저 장사라 생각한다면, 비앙카의 결혼은 실패한 장사였다.
장사란 본디 대가를 주고받는 법. 비앙카는 제 인생에서 제일 소중했던 자존심과 목숨을 동시에 저울 위에 얹었다. 그러니 어찌 성공한 장사라 할 수 있겠는가?
비앙카는 내리쬐는 햇볕의 따사로움을 맞으며, 곁에 머무는 자카리의 체온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신의 실패한 결혼 장사를 추억하며.
그리고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기약하며.
* * *
알렉산드라 드 아르노는 부친인 자카리 드 아르노의 영웅적인 강인한 면모를 그대로 물려받아 뛰어난 무장이 되었다.
신에게 선택받은 그녀는 혼란한 대륙 정세 속에서 무용을 떨쳤다. 그리고 끝내 대륙을 처음으로 정복한 이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당시 세브랑의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왕자였던 시릴 드 세브랑이 열세 살 연상이었던 그녀에게 반하여 뒤를 졸졸 쫓아다닌 끝에 결혼에 성공한 것은 또 유명한 일화이다.
세브랑 왕가에서도 처음에는 알렉산드라를 왕비로 맞이하여 세브랑 왕가의 위명을 드높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브랑 왕가에서 짐작하지 못한 것은 바로 시릴 왕자가 지독한 사랑꾼이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서른넷, 결혼한 지 5년. 시릴 왕자가 스물한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알렉산드라에게 자신의 왕위를 이양했다.
세브랑 왕실을 비롯하여 대륙이 발칵 뒤집어졌다. 세간에서는 일찍이 시릴 왕자가 알렉산드라에게 청혼할 당시, 혼수로써 왕위를 약속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야사일 뿐, 확실히 문서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결국 알렉산드라가 아르노 공작임과 동시에 세브랑의 왕으로서 대륙을 통일하여 세브랑 왕가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으니, 세브랑 왕가의 의도가 반은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만큼 알렉산드라 드 아르노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위인이지만, 정작 예술품으로 많이 남아 있는 것은 그녀의 어머니인 성인, 비앙카 드 아르노였다.
비앙카는 당대에까지 이름을 알린 유명한 조각가, 니콜라를 후원하여 재능을 개화시켰다. 니콜라는 성인인 비앙카와 영웅 자카리의 모습을 조각으로 많이 남겼다. 특히 비앙카를.
니콜라가 조각한 성모상의 얼굴이 전부 비앙카의 조각과 유사한 것을 비롯해 그의 대표작 ‘황금장미’, 그리고 ‘계시’ 등이 전부 비앙카와 관련 있는 것을 보아하니, 니콜라가 단지 후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거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니콜라에게 있어 비앙카가 얼마나 찬미의 대상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비앙카의 조각에 온 힘을 다했다.
니콜라의 유려하고도 화려하며 웅장한 조각에서 영감을 얻은 다른 예술가들 또한 비앙카를 예술로 남겼다. 유화, 벽화, 소설, 시, 희곡, 오페라, 가곡….
그렇게 비앙카는 다른 사람들의 입에 널리널리 오르내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예술가들을 비롯하여 호사가들이 특히 거론하기 좋아하는 소재는 바로 비앙카의 결혼에 관한 것이었다.
비앙카와 그 남편 자카리는 열세 살 차이가 나며, 비앙카가 일곱 살이던 당시 결혼이 진행된 것을 보아하니 당시 유행하던 풍습인 ‘결혼 장사’로 인한 결혼일 거라 추측되었다.
실제로 비앙카 본인이, 딸인 알렉산드라에게 남긴 편지에서 자신의 결혼을 ‘실패한 결혼 장사’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 뜻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학자들이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웠지만, 전해지는 일화를 비롯해 일생에 걸친 두 사람 행보를 보자면 비앙카와 자카리의 결혼 생활이 순탄했으며 서로에게 헌신했다는 것만큼은 이의가 없었다.
비앙카 드 블랑쉐포르. 자카리 드 아르노의 아내였고, 영주인 그가 출전한 사이 아르노 영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으며, 명예를 알고 기품을 지닌 여자.
성인으로 선택받았으며, 신의 뜻을 지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 뒤로도 영지민들과 주변인들을 위해 후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여자.
그것이 바로, 비앙카라는 여자의 삶이었다.
– 完
결혼 장사 외전
비앙카와 자카리의 외동딸, 알렉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어떨 땐 무척 다루기 쉬운 아이처럼 보였 다가도, 어떨 땐 무척 까다로운 아이였다.
잘 운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태어났을 때를 제외하곤 일절 울지 않아, 우는 모습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문제는 힘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었다. 알렉은 정말 잘 돌아다녔다. 이제 막 태어난 지 일 년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만 눈을 떼면 방의 끝에서 끝까지 기어가는 것은 일쑤요, 가끔은 침대 밖으로 탈주하기까지 했다.
종종 이어지는 알렉의 탈주에 니콜라에게 부탁해서 요람의 높이를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별 효과는 없었다. 제 키보다도 더 큰 가림막을 도대체 어떻게 넘은 건지. 사람이 보고 있을 땐 방긋방긋 웃고 있기만 하니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본느는 엉금엉금 기어 방을 탈주하려는 알렉을 뒤에서 냉큼 잡아 들었다.
“오늘은 또 어떻게 나오신 거예요, 아가씨!”
알렉이 방을 나서기 전에 발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본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난번에는 미처 알렉의 탈주를 발견하지 못해 아 르노 성을 탈탈 뒤지기도 했다. 영주인 자카리는 물 론이거니와, 집사 뱅상, 세 부장, 성의 마구간지기며 초장이까지 모두 알렉을 찾는 일에 동원되었다. 그렇게 반나절 동안 꼬박 성을 뒤진 뒤에야 주방의 참나무통 안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던 알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알렉은 더욱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이본느와 비앙카가 곁에서 감시를 늦추지 않고 지켜보았지만, 가끔 자리를 비울 때면 이렇게 일이 터지곤 했다.
이본느는 알렉을 제대로 안아 들었다. 알렉은 붙잡힌 것이 억울한지 이본느의 품 안에서 한껏 버둥거렸다. 힘이 얼마나 센지, 이본느의 팔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알렉을 바닥으로 놓칠 뻔했다. 평범한 아이들과 다른 알렉을 달래며 이본느는 쩔쩔맸다.
“이본느, 또 알렉이 요람 밖으로 나왔니?”
때마침 비앙카가 들어오자, 이본느의 얼굴에 화색이 폈다. 이 상황을 구원해 줄 유일한 타개책이었다.
“아이고, 마님. 아기씨 좀 어떻게 달래주세요. 그래도 아기씨께서는 마님을 보면 좋아하지 않습니까.”
“잠깐만.”
비앙카는 곤혹스러운 낯으로 이본느와 알렉에게로 다가갔다. 한참 버티며 몸을 뒤로 젖히던 알렉이 엄마를 알아보고는 활짝 웃었다. 알렉은 비앙카를 향해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허우적댔다. 엄마에게 가기 위한 발버둥에, 비앙카는 한숨과 함께 이본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련.”
“안 돼요, 마님. 아기씨가 엄청 무거워요.”
“괜찮아.”
비앙카와 이본느가 실랑이하는 사이, 위에서부터 달랑, 알렉의 목덜미를 잡고 번쩍 드는 이가 있었다. 자카리였다.
“비앙카, 이본느의 말대로요. 알렉은 무척 무겁소. 당신에겐 무리지.”
“아직 한살이고, 그렇게 무겁진 않아요….”
비앙카는 말끝을 흐렸다. 아직 한 살이라는 말로 넘기기엔, 알렉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알렉은 마치 세 살은 된 아이 같았으니까. 그 래도 그렇지, 제 자식을 제대로 안지도 못하게 하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이본느와 자카리, 둘 다 그녀를 너무나 과보호했다. 비앙카는 입술을 작게 삐죽였다.
자카리는 능숙하게 알렉을 안아 올렸다. 아빠의 품에 안기자 알렉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자카리의 손끝이 알렉의 코 주변을 맴돌자, 알렉의 눈동자가 손가락 움직임을 조용히 따라 움직였다. 자카리는 그런 알렉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유모와 엄마를 곤란하게 한 모양이로구나, 알멕.”
알렉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방긋방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기 천사같이 천연 덕스러운지, 알렉이 치고 다닌 사고의 뒷수습을 하느 라 정신없던 이본느는 진이 빠진 미소를 지었다.
비앙카 또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 배로 난 제 자식 이지만, 저렇게 기운찬 인생을 살아 본 적 없는 만큼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사이에 지쳐 버린 비앙 카는 힘 빠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이본느가 있어서 살았어요. 얼마나 사고뭉치인지, 어지간한 이들은 다 혀를 내둘렀을 거예 요.”
“봐 봐요, 마님. 제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지요?”
“물론이지.”
이본느가 우쭐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비앙카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본느가 없었다면 비앙카는 알렉을 일주일은 커녕 하루도 제대로 돌보지 못 했을 터였다.
자카리의 등장으로 알렉이 다소 얌전해지자, 이본 느가 냉큼 자카리에게서 알렉을 넘겨받았다. 알렉을 바라보는 이본느의 얼굴이 양털처럼 몽실했다.
그사이에 하늘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지나갔는지, 창을 타고 햇빛이 방 안을 물들였다. 그러고 보니 자 카리가 찾아오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비앙카는 자카 리에게 물었다.
“지금 이 시각엔 웬일이에요? 한창 바쁠 시간이잖 아요.”
“그대가 보고 싶어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태연스레 건네는 말이 퍽 달 았다. 예전이었더라면 침묵을 고수한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을 텐데. 점점 능청스러워지는 남편의 태도에 비앙카는 혀를 내둘렀다.
“하여튼 아부하는 실력만 는다니까.”
“아부가 아니오.”
“알았어요, 알았어.”
자카리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진심을 설득시키려 했지만, 비앙카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았 다.
둘이 투닥투닥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이본느가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알렉을 안고 방을 빠져나갔다. 주인마님 부부가 금실이 안 좋은 것보다 좋은 쪽이 아랫사람으로서도 모시기 편하다. 주인마님 부부 둘만의 시간을 위해, 알렉에게 바깥 공기나 쐬어 줄 겸 그녀는 총총 자리를 비웠다.
“…하다니까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본느? … 이본느?”
비앙카가 뒤돌아보았을 땐 이본느는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아까 알렉을 데리고 자리를 비우더군. 이본느가 눈치가 빨라서 내가 참 편해.”
“이본느 눈치 덕을 보는 건 당신보다는 저일 걸요.”
비앙카 본인이 생각해도, 그녀는 모시기 편한 주 인은 아니었다. 까다롭고, 신경질도 잘 내고…. 최근 신경질 낼 일이 드문 것은 그녀의 성격이 온화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신경질을 내기 전에 이본느가 전부 일을 처리한 덕분이라는 것도 알았다.
“게다가 이본느가 루시도 데려와 준 덕에 얼마나 편한 지 몰라요. 제 언니를 닮아 눈치가 빠르고 착한 아이더라고요.”
비앙카는 루시를 떠올리며 살포시 웃었다. 루시는 이본느의 여동생이었다. 처음 만난 것은 이본느의 결혼식 날이었다. 그때는 소개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 던지라, 먼발치에서만 흘끔 보고 말았었다.
사실 비앙카는 루시보다도 그녀 곁에 앉아 있던, 턱수염이 무성한 사내가 더 신경 쓰였다. 처음 보는 낯선 사내의 얼굴은 취기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번들거리는 두 눈은 희번덕거리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무언가 일을 쳐도 단단히 칠 사내다.
그자가 루시의 남편이라는 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본느의 동생이 비앙카처럼 나이 차가 많이 나 는 결혼을 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본느가 비앙카를 더더욱 챙기고 신경 썼다는 것도. 하지만 그 남편이 저런 이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비앙카 본인의 남편인 자카리가 예외적인 존재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루시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옆, 옆집의 나이차 많이 나는 목수와 결혼했다고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맘 편히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입이 무거웠던 루시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지만 그 남편을 보면 뻔했다.
루시의 남편은 이본느의 결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지금껏 루시의 친정을 다소 얕보고 있었다. 쓸모 없는 여편네의 친정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 고, 그 언니란 작자는 성에서 일하며 이것저것 보내 오기는 하지만 재수 없고 되바라진 여자라 여겼다.
깐깐하고 트집 잡기만 하는 건방진 계집. 저런 여 자를 데려갈 사내가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러나 이본느의 결혼 상대는 남작위까지 받은 기사였다. 게 다가 가스파르와 이본느 둘 다 아르노 공작가의 총애를 받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이본느 부부에게서 얻어 낼 만한 것이 보이자, 그는 반색하며 반겼다. 그들에게 들러붙기 위해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고, 언젠가 한 번은 불쑥 성에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의 시도는 단 한 번으로 끝났다. 비앙카에 의해 단호히 저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본디 비앙카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지만, 루시의 남편 은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 너무 불쾌하여 똑똑히 기 억하고 있었다. 비앙카는 서릿발 같은 기세로, 성에 어중이떠중이를 들인 것이 누구냐 화를 냈다.
이본느의 매부라는 이야기에 꺼림칙해 하면서도 들여보내 준 문지기들은 크게 혼쭐이 났다. 비앙카에 게 혼이 나고, 그 뒤로 뱅상에게 혼이 나고, 마지막으 로는 자카리에게까지 혼이 났다. 까마득한 상관들에게 세 번이나 연달아 혼이 나니, 그 뒤로 절대 루시의 남편을 성에 들이지 않았다. 되레 분풀이하듯 그에게 욕설로 모욕을 주어 내쫓았다.
톡톡히 망신당한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 올랐다. 아르노 성에 얼씬도 못하게 된 그는 집으로 돌아와 루시를 두들겨 팼다.
견디다 못한 루시가 이본느를 만나기 위해 아르노 성으로 도망쳐 왔다. 사람 하나 들인 일로 문지기들은 비앙카와 뱅상, 자카리에게 까지 혼쭐이 났다. 만약 루시를 성에 들이게 된다면 또 혼이 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루시의 꼴은 정말로 처참했다. 결국 보다 못한 문지기들은 또 한 번 혼나는 것을 넘어 문지기 자리에서 잘릴 각오까지 하고 루시를 성안으로 들여 보냈다.
그리고 루시의 꼴을 본 이본느가 대경실색했다. 비앙카까지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루시는 이본느의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안도감으로 서럽게 오열했다.
비앙카는 문지기들을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문지 기들은 뜻밖의 칭찬을 받고 어리둥절해 했지만, 그들 이 제대로 판단했다는 걸 알고 으쓱해졌다. 비앙카는 그들에게 루시의 남편은 얼씬도 못 하게 하도록 단단히 일렀다. 루시를 그렇게 만든 것이 그라는 걸 깨달은 문지기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가슴을 두들겼다.
비앙카의 짐작대로, 오래지 않아 루시의 남편이 아르노 성에 찾아왔다. 자신이 쫓겨났던 것처럼 루시 또한 문지기들이 쫓아낼 거라 생각하고 그녀를 순순히 놓아준 것이었는데, 정작 루시는 성에 들어가다니!
그는 제 마누라를 내어놓으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런 루시의 남편에게 문지 기들이 험상궂게 다가가자, 두려웠던 그는 곧바로 줄 행랑쳤다.
비앙카는 성 위에서 그 꼴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 보았다. 약자에게만 강한,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그런 이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다니…. 비앙카가 훌쩍훌쩍 울고 있는 루시에게 물었다.
‘저자와는 이혼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애는 아직 없지?’
‘예? 예…. 하지만 이혼은 죄가 아닙니까. 신께서 용서 하시지 않으실 거예요.’
‘이혼이 죄라 하나, 교황의 허락을 받으면 뭐든 용서되는 법 아니겠느냐. 내 교황의 허락을 받아 주마.’
비앙카의 말에 루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루시에게 있어 교황은 신이나 다름없는, 저 먼 세계의 존재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뒤늦게 떠돌던 소문을 기억해 냈다. 바로 아르노 백작 부인이 신에게 선택 받은 성인이라는 소문이었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비앙카는 감히 루시가 마주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존재였다.
비앙카는 교황에게 연락해 주는 것 쯤이야 별로 힘든 일도 아니라는 듯, 멀끔한 낯으로 루시를 바라보았다. 전적으로 루시의 선택에 달렸다는 듯이.
루시는 잠시 갈등했다. 이본느를 닮은 그녀의 떡갈나무색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하지만 결국, 루시는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까지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루시가 답답했던 이본느는 동생을 채근했다.
‘하지만 루시, 저놈이 너에게 손을 올리는 걸 알게 된 이상 나는 저놈에게 널 다시 보낼 수 없어.’
‘그와 헤어진다 하더라도 똑같아. 다른 이에게 시집가게 될 거고, 그러면 그쪽에서는 두 번 결혼한 여자라며 더욱 날 괴롭힐 거야.’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비앙카가
대뜸 물었다.
‘결혼을 두 번 할 필요가 있느냐?’
‘하, 하지만…. 여자 혼자 사는 것은 힘겨운 걸요. 부모님 밑에서 머무는 데도 한계가 있고…. 부모님은 분명 제가 유난 떤다고 생각할 거예요. 다들 참고 사는데…. 지금 남편에게 다시 보낼지도 몰라요. 그러면 결국 똑같죠. 지, 지금 남편도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적어도 일은 하잖아요. 굶기는 일은 없으니까….’
더듬더듬 이어 나가는 말이 길어질수록 루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루시의 말은 사실이었고, 현실은 그랬다. 누구든 편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그런 인생은 루시,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나마 언니인 이본느가 그 불행의 굴레를 벗어났다는 것이 루시의 유일한 안도였다.
루시의 목소리는 귀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용했고, 계속해서 말을 더듬다 보니 말이 점점 길어졌다. 평소의 비앙카였다면 간단히, 명료하게 말하라며 손을 내저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한참 끝에 루시의 이야기가 끝났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비앙카는 심드렁히 물었다.
‘그러면 그냥 성에서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
‘네?’
‘이본느와 함께 내 시녀가 되는 것이야. 봉급에 대한 적당한 값을 남편에게 보내 주마.’
비앙카는 일부러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더 꺼내지 않았다. 루시가 이혼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남편에게 미처 정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맞고 살면서, 그 폭력에 익숙해졌기에 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것일 터였다. 자신이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그렇다면 그녀에게 기댈 곳을 만들어 주고, 그녀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서서히 인식할 수 있는 환경을 제 공하면 될 터였다.
비앙카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루시에게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 준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루시는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 하지만 남편은 되레 더 돈을 내놓으라며 성을 낼지도 몰라요.’
‘그건 걱정 말거라. 네 남편에게는 내 특별히 덩치 좋고 인상 나쁜 자를 골라 보내 줄 테니까.’
비앙카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루시도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밖에 없었다. 루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 였고, 그렇게 이본느와 함께 비앙카의 시녀가 되었 다.
비앙카의 짐작대로, 루시의 남편은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이에게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핍박하는 남편과 떨어지니 루시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돌아왔다.
이본느가 알렉을 돌보며 비는 시간 동안, 루시가 비앙카의 시중을 들었다. 비앙카의 심부름을 하는 와중 종종 성안의 다른 사람들과 수다를 떨기도 했다. 아르노 성의 생활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아마 지금도 이본느는 루시와 함께 알렉을 데리고 산책하고 있을 것이다. 자매의 정다운 모습을 떠올리며 슬쩍 웃은 비앙카는 이내 엉뚱한 곳으로 빠져버린 대화 주제를 다시 상기시켰다.
“그래서 정말, 제가 보고 싶어서 오신 거예요? 업무도 미뤄 놓고?”
“음…. 사실 이런 게 들어와서. 그대에게 조금이라 도 빨리 보여 주고 싶었소.”
자카리는 품에서 길고 좁은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자카리가 내민 상자 속에는 벨벳으로 쌓여 있는 다섯 알의 오팔이 들어 있었다.
각도에 따라 영롱한 빛으로 빛나는 다섯 알의 오팔은 크기가 손톱 크기로 일정했고, 둥글게 다듬어진 정이십면체였으며, 군데군데 흠을 파고 금을 채워 놓은 듯한 무늬가 있었다. 처음 보는 세공이다. 사용처 가 좀처럼 짐작 가지 않았던 비앙카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웬 보석이 이렇게. 금으로 장식도 되어 있네요. 무슨 용도인가요?”
“보석으로 만든 공깃돌이라던데. 그대에게 온 선 물이요.”
“어머나.”
사치에 익숙한 비앙카라 해도 이렇게 호화로운 선물은 처음이었다. 이만한 보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궤짝에 가득 찰 정도로 가진 것이 보석 아니던가. 하지만 보석으로 귀걸이나 목걸이가 아닌 공깃돌 이라니! 자카리가 득달같이 보여 주러 달려온 이유도 알만했다.
비앙카는 곧바로 카펫이 깔린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뜻밖의 거침없는 행동에 자카리가 깜짝 놀랐 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앙카는 상자에서 보석 공깃돌을 꺼내 카펫 위에 굴렸다. 도로록 소리와 함께 보석 알이 사방으로 퍼졌다.
왼손으로 오른팔의 치렁한 소매를 붙든 비앙카는 이내 조심스레 손으로 보석 알을 잡아냈다.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허공으로 솟아오른 보석 알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처음에 주저하던 손짓은 점점 능숙해졌다. 자카리도 그녀의 옆에 주저 앉았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공기 놀이하는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숨까지 들이 켜며 한참을 지켜보았다.
그런 자카리의 시선을 눈치챈 비앙카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어렸을 때의 추억에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비앙카는 변명하듯 덧붙였 다.
“엄청 오랜만이라…. 어렸을 땐 유모랑 공기놀이도 종종하곤 했었어요. 유모가 죽은 뒤에 혼자 가지고 놀아 봤는데, 유모랑 같이 놀 때만큼 재밌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손이 다 굳었죠.”
손이 굳었다는 말과 달리 그녀의 손가락은 날렵하게 보석 알의 사이사이를 움직였다.
활동적이라는 단어와는 인연이 없었던 만큼, 어렸을 적의 비앙카는 밖에서 하는 놀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비앙카를 위해 유모는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많이 알아 오곤 했다.
체스, 오델로, 카드놀이, 공기놀이…. 규칙이 복잡 하고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건 힘들었지만, 공기놀이같이 단순한 것은 유모도 같이 어울려 주곤 했다. 어렸던 비앙카는 그 시간이 제일 재밌었다.
쟌의 이야기가 나오자 자카리의 입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앙카가 쟌에게 지닌 추억이 모두 애틋하고 다정한 기억인 것에 반해, 자카리가 쟌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 다.
그렇다 하여 모처럼 비앙카가 즐거워하고 있는데 그녀의 추억을 어지럽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카리는 애써 쟌에 대해 좋은 기억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항상 그대를 염려했지.”
“유모가 당신에게 날을 세워 대했다면서요. 뱅상 한테 들었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쟌과 자카리 사이의 갈등을 이미 알고 있었던 비앙카는 그런 자카리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자카리는 당황하여 선뜻 답하지 못했다. 도대체 뱅상이 어디까지 주저리주저리 주책없이 말한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그는 최대한 무난한 대답을 하기 위해 쩔쩔맸다.
“그대가 미안할 일이 아니오. 그리고, 그녀 입장 또한 납득할 만하고. 그녀가 그대를 안아 키웠다면서. 이본느가 알렉을 그리 기르는 것처럼.”
“네. 알렉이 울지 않는 대신 활기찬 것과 달리, 저는 가만히 있지만 그만큼 자주 우는 아이였거든요. 유모가 매일 안아서 달래 줘야 했죠. 손에서 내려 놓으면 또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다른 일은 거의 못 했다고 해요.”
“애지중지했군.”
“맞아요.”
비앙카가 슬쩍 미소 지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어린 시절의 그녀는 참으로 까다로운 아이였다. 그녀의 심기를 읽고 성질을 맞춰 주는 것은 쟌이 유일했던 만큼, 비앙카는 주변에 거리를 둔 채 쟌에게만 매달렸다.
물론 그것은 비앙카를 고립시켰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린 비앙카의 세계는 짧은 두 팔을 벌려 담을 만큼 좁고 협소했기에, 유모만을 끌어안고 있을 수 있으면 상관 없었다.
“…쟌은 저에게 기대가 컸어요. 쟌은 어머니가 데려온 시녀였고, 어머니의 집안은 몇 명이나 되는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니까…. 저 또한 그리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버지가 제 결혼을 정했을 때, 정말 크게 반발했어요.”
비앙카는 조용히 읊조렸다. 좁았던 비앙카의 세계는 언제까지 그대로 머물지 않았다.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쟌의 이른 죽음 이후로 비앙카의 인생은 비탈길을 굴러가는 돌처럼 끝도 없이 추락했 다. 그만큼 힘겨웠지만, 고여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세계가 넓어졌다.
시야 또한 넓어졌다. 알렉을 낳고, 이본느의 순수한 호의를 곁에서 느끼다 보니 그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도 훤히 보였다. 쟌이 그녀를 왜그리 아꼈는지. 그러면서도 그녀와 평생을 함께할 자카리에 대해 왜 그리도 부정적이 었는지….
쟌은 비앙카가 후작가, 혹은 공작가와도 연을 맺을 수 있다 주장했다. 잘하면 왕가와도…. 만약 자코브가 그녀에게 추근대었을 당시, 쟌이 곁에 있었다면 그녀는 과연 무어라 했을까?
추억에 바삭, 금이 갔다. 헛된 가정이다. 더 깊게 생각했다가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대로 바스러져 내릴 것 같아, 비앙카는 파고드는 생각을 일부러 멈추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미 파헤쳐진 잔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얼굴에 쓸쓸함이 스쳤다.
“어쩌면 쟌은, 제가 아니라 저에게서 제 어머니를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라요….”
쟌이 보았던 것은 비앙카의 행복이 아닌, 비앙카 핏줄의 성공이었다. 그녀는 충성스러운 가신이었으나, 비앙카가 그녀에게 바란 건 가신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엄마처럼 믿고 따랐던 비앙카로 서는 배신감이 가슴을 찔렀다.
“백작 마님이었던 어머니는 그녀의 자랑이었으니까, 저 또한 그녀의 자랑이 되어 주길 바랐을 수도 있죠.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그녀에겐 제가 자존심 이었던 거 같아요.”
과거의 잔해는 뾰족한 가시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지금껏 애써 외면했던 현실을 눈앞에 하나씩 펼쳐 두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뿐더러, 구역질이 나기까지 했다.
점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는 그녀의 혼잣말을 끊고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한 순간의 행복만큼은 거짓이 아니잖소.”
“???네.”
“그러면 된 것이오. 나도 돌아가신 아버지께 원망스러운 것이 많았으나, 굳이 들춰 곱씹지는 않소. 고인의 행적을 원망해 봐야 고통받는 것은 나 자신일 뿐이니까.”
자카리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자카리에게 위그 가문을 물려주려 했다지만, 현실은 그를 고난으로 밀어 넣었을 뿐이었다. 후계자 문제에 관해 좀만 더 확실히 했더라면, 자카리가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덕에 블랑쉐 포르가의 눈에 띄었고, 비앙카를 만났다. 그 모든 것이 이어진 만큼, 과거의 일에 대해 원망하는 건 전부 부질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에 분위기가 한결 무거워 졌지만, 두 사람의 공기는 서서히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비앙카가 손을 뻗어 자카리의 뺨을 어루만졌다. 자카리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비앙카를 눈에 담았다. 비앙카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쟌이 당신을 엄청 모욕했을 텐데…. 당신이 절 블랑쉐 포르가로 돌려보내지 않아 다행이에요.”
“그녀가 그저 그대의 유모였던 것에 감사할 뿐이오. 아무리 우리의 결혼이 못마땅해도 무를 수 있는 당사자는 아니 었으니까.”
비앙카에겐 무뚝뚝한 얼굴로 건네는 위로가 농담처럼 들렸다. 그에 비앙카는 살포시 미소 지었지만, 실상 자카리로서는 진담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내가 공작이나 될 줄은 몰랐을 거요. 어떻소. 이만하면 유모의 마음에 드는 남편감이었을 것 같소?”
“과분하죠.”
“내 생각엔 아닐 것 같소.”
“왜요? 쟌은 제가 공작이랑 결혼하기를 매일 밤 빌었을 텐데요.”
비앙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자카리가 백작일 때만 하더라도 그녀의 결혼 상대로는 차고 넘쳤는데, 지금은 공작이 아니던가. 공작도 그냥 공작이 아니다. 나라의 실권자. 차기 왕의 대부…. 하지만 자카리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그때고. 지금의 당신은 성인이 되었잖소. 그럼 또 새로운 기준을 세울 게 분명하오. 공작으로는 턱도 없겠지.”
“끝도 없네요.”
“그렇지.”
둘은 마주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쟌이라면 능히 그럴 만했다. 쟌의 기준에 맞는 결혼 상대를 찾는 것은 대륙을 탈탈 털어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 봐야 다 끝난 이야기였다. 자카리의 말이 맞았다. 쟌의 행동에 대해 곱씹어 봤자 앞으로의 행복에 도움이 될 게 없었다. 그저 발목만을 잡을 뿐. 아름다웠던 추억만을 기억한 채 그녀를 떠나보내 주는 것이 옳았다.
대화가 길어지는 사이, 공깃돌은 멈춰 있었다. 공깃돌 하나는 비앙카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굴러가 있었다. 비앙카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려 하기가 무섭게, 팔이 긴 자카리가 어렵지 않게 공깃돌을 주워서 비앙카의 앞에 가져다 주었다.
비앙카는 다섯 개의 공깃돌을 손으로 잘그락 잡았다. 영롱하게 빛나는 오팔의 광채를 물끄러미 보던 그녀는 이내 공깃돌을 자카리의 앞에 슬쩍 밀어 놓으며 짓궂게 말했다.
“당신도 해 봐요.”
“???이렇게?”
비앙카가 시키면 뭐든 하는 사내이니만큼, 자카리는 할 줄도 모르면서 공깃돌을 건네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놀이와는 관계없는 인생을 살아왔던 그는 공기놀이라는 게 처음이었다. 아까 비앙카가 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따라 하는 그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엉거주춤했다.
비앙카의 가는 손가락과 다른 두툼한 손끝이 어설프게 공깃돌을 잡았다. 비앙카가 할 때는 날렵하게 잘도 했는데, 자카리는 아무리 해도 공깃돌을 던지는 시기와 아랫돌을 붙잡는 시기를 맞출 수가 없었다. 보석 알이 허공을 날며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평소의 자카리는 뭘 해도 능숙했는데…. 그답지 않은 엉망진창인 실력에 비앙카는 결국 참지 못하고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웃었는지 배가 당길 정도였다.
그렇게 우스운 모양새였나. 자카리는 머쓱히 미소 지었다. 그녀가 간만에 소리 내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비록, 그 웃음이 그를 놀리는 것일지라도.
비앙카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계속해서 치미는 폭소를 애써 억누른 그녀는 가늘게 눈을 휘어 웃으며 자카리가 이리저리로 흩어 보낸 공깃돌을 주웠다.
“무술을 잘한다 해서 이런 것까지 잘하는 건 아닌 가 봐요. 난 당신이 몸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하는 줄 알았어요.”
“내가 몸으로 하는 것 중 잘하는 게 또 뭐가 있었소‘?”
“그거야 당연히….”
비앙카는 거기까지만 말한 채 입을 딱 다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처음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환상적이었던 첫날밤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부 사이에 그 정도 음담패설쯤이야 별거 아닌듯, 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비앙카는 아직도 어색 했다. 귓가가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비앙카는 눈을 데굴 굴리며 말을 돌렸다.
“음…. 승마랑….”
“승마랑 또?”
그런 비앙카의 머릿속은 손바닥처럼 들여다보인 다는 듯, 짓궂게 웃으며 캐묻는 자카리의 목소리가 은근했다. 둘의 이마가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자카리의 속삭이며 묻는 소리가 비앙카의 귓가 바로 옆에 서 들려왔다.
“응, 비앙카. 또 뭐가 있소.”
“아이참, 다 알면서 왜 그렇게 캐물어요. 집요해요, 당신.”
자카리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오싹한 느낌이 그녀의 척추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얼굴이 빨개진 비앙카는 자카리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만 자카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 비앙카에게 들러붙었다. 그는 비앙카를 제 팔 안에 가둔 채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그는 크게 비앙카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언제나와 같은 장미 향은 그를 취하게 했다.
“으응…. 아직 해가 밝아요….”
“그 핑계로는 더 이상 날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잖소.”
“하지만 당신은 제가 핑계 대는 거, 좋아하잖아요.”
“그러니 또 할말이 없군.”
자카리는 비앙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쿡쿡 웃었다. 그의 숨결이 비앙카의 살결을 간지럽히자,
비앙카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잠깐….”
비앙카의 팔다리가 허우적거렸지만, 자카리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그녀를 품 안에 가둔 자카리의 손이 비앙카의 치맛자락을 들치며 슬금슬금 그녀의 허벅다리를 타고 기어들어 왔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뺨과 목덜미에 새가 모이를 쪼는 듯한 입맞춤을 몇 번이나 내리눌렀다. 곧 그의 입맞춤은 진득하고 농밀해졌다.
“응…. 정말 할거예요?”
“당연하지. 최근 들어 알렉 때문에 관계가 드물지 않았소. 이본느가 알렉을 데리고 나갔으니, 적어도 한동안은 방해하지 않겠지.”
자카리가 한숨 쉬듯 말했다. 알렉의 탈주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낮에야 이본느에게 맡겨 두면 된다지만 차마 밤마저 이본느에게 부탁할 수는 없는 노 릇이었다.
밤에는 알렉을 자카리와 비앙카의 침실로 데려왔다. 혹여 알렉이 요람에서 도망친다 해도, 기척이 예민한 자카리가 바로 잠에서 깨서 알렉을 잡아 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카리가 비앙카의 일에서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는 뻔뻔한 사내라고는 하나, 딸이 있는 곳에서 비앙카와 부부 관계를 할 수 있을 만큼 무신경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쪽에서는 비앙카보다 더 예민한 구석이 있기도 했다.
적어도 알렉이 말을 알아들을 만큼만이라도 크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무작위 탈주를 하지는 않을 테니 침실을 분리할 수 있겠지만, 그건 아직 요원한 일이 었다. 그러니 이렇게, 조그만 시간적 여유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자카리가 얼마나 굶주렸는지 아는 만큼 그를 쉽게 내칠 수 없었다. 그리고 비앙카도 자카리보다야 덜했다 뿐이지 그를 원하고 있던 터라, 내심 그의 적극적인 신호를 반겼다.
“어쩔수 없네요….”
비앙카는 자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꿈적도 안 할 것 같던 그의 단단한 목은 비앙카의 가는 손길에 고분고분히 움직였다. 곧 서로의 입술이 맞닿고, 숨결이 얽혔다.
오래지 않아 붉은 카펫 위에 두 사람의 옷이 흐트러졌다. 비앙카의 길고 풍성한 녹색 드레스 자락이 나풀나풀 펼쳐졌고, 자카리가 가져온 오팔로 된 공깃 돌은 그들의 발에 채어 이리저리 굴러간 지 오래였다.
카펫의 한구석에서 오팔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갈구하며 열락으로 빠져들었 다.
* * *
한낮의 정사는 비교적 짧게 끝났다. 자카리의 얼굴에서는 미처 지우지 못한 굶주림이 철철 풍겼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았기 때문도 있지만, 비앙카의 체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는 흐트러진 옷을 추스르며 입술을 비죽 내민 채 투덜거렸다.
“한번 더 해도 상관없다니까.”
“내가 상관 있소. 그러다가 그대가 앓아 눕기라도 하면 곤란하오.”
“그 정도로는 앓아 눕지 않아요.”
“고집 부려도 소용 없소.”
“먼저 꼬신 건 자기면서.”
“한 번 정도는 그다지 무리가지 않으니까.”
“한 번이나, 두 번이나. 당신도 아직 부족하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이제 지쳤지. 나는 그저 그대의 한계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고 있을 뿐이오. 그대보다도 더.”
자카리는 태연하게 말하며 비앙카의 옷 시중을 들었다. 옷을 벗기는 것만큼이나 능숙한 손길이었다. 본디라면 시녀의 일이었지만,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옷을 입히는 이 행위 자체를 제법 좋아했다.
비앙카도 투덜투덜하면서도 순순히 자카리가 입혀 주는 옷에 손을 꿰었다. 자카리의 투박한 손길이 그녀의 고동색 긴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정돈했다. 흰 살결에 나뭇가지 색과 같은 머리카락. 그녀에겐 정말로 녹색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자카리는 자신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맡긴 그녀를 보며 흡족함에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귀부인의 드레스는 능숙한 시녀가 항시 거들어 줘야 할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했다. 처음 자카리가 비앙카의 옷 시중을 들었을 때 천 조각을 소매에 끼워야 하는지 허리에 매야 하는지도 제대로 몰랐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장족의 발전이었다.
“솜씨가 많이 좋아지셨는 걸요.”
“아직 이본느에 비하면 멀었지.”
“상대가 이본느라면 이길 수가 없을 텐데요.”
“그대 말대로 나는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니까. 이것도 금방 익숙해질 거요.”
자카리가 천연덕스레 아까의 대화를 잇자, 비앙카는 까르르 웃었다.
“아까 공깃돌 던지는 걸 보니까 당신. 손재주는 별로 없는 거 같던데요. 옷을 입히는 건 몸으로 하는 거라기보단 손재주에 가깝잖아요. 계속 매듭을 묶어야 하니까.”
“꼭 그렇게 부푼 내 기대에 찬물을 끼얹어야겠소.”
“현실을 알려드리는 것뿐인 걸요. 그리고 당신은 이런게 서투른 모습이 더 매력적이에요.”
비앙카는 제 허리춤의 매듭을 매고 있는 자카리의 코끝을 가볍게 잡고 흔들었다. 전장에서의 자카리는 야생 늑대와도 같았지만, 비앙카의 손 아래에서는 얌전한 경비견일 뿐이었다. 자카리는 코가 잡힌 채 씩 웃으며 비앙카를 올려다 보았다.
“그럼 계속 매력적이기 위해선 계속 서툴러야 하오?”
“너무 서툴면 조금 질릴지도 몰라요.”
“어렵군.”
자카리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비앙카는 깔깔 웃으며 그의 어깨를 내려 쳤다. 비앙카로서는 제법 힘이 들어간 손짓이었지만, 자카리에게는 나비의 날갯짓이나 다름없었다.
그사이 비앙카의 옷매무새 정돈이 끝났다. 자카리는 드레스의 주름까지 탈탈 털어 펴 준 뒤에야 허리를 폈다. 그러고 보니 비앙카에게 전하려던 말이 하나 더 있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수도에 가 봐야 할 것 같소.”
“무슨 일로요? 지난번에 갔다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잖아요.”
“이번엔 그대도 함께요.”
“저도요?”
“당신도, 알렉도.”
“알렉 까지요?”
비앙카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비앙카도 수도에 갈 생각이 있기는 했다. 다만,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는 게 문제였다. 한 일이 년 뒤에나 가 볼 생각이었는데….
자카리 또한 비앙카의 당혹스러움을 이해했다. 그는 한숨과 함께 사정을 전했다.
“전하께서 그대와 알렉을 보고 싶다 연통을 넣으셨소.”
“그 연락은 저도 받았어요. 저에겐 그냥 여유 될 때 한번 와 보는 게 어떠 하느냐 정도였는데….”
“그대에겐 그리 말해 두고 이제 나를 쪼으시는 게지.”
자카리는 쓰게 웃었다. 오델리는 앞과 뒤가 다른 여자였다. 비앙카에게는 잔뜩 다정한 말투로 서신을 보내 놓고는, 물밑에서 자카리를 탈탈 터는 것이었다. 얼마나 평판관리를 잘해 두었는지, 비앙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꿈뻑꿈뻑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곤 한 번도 못 뵈지 않았소. 겨울이 오기 전에 한 번 다녀옵시다. 알렉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날씨가 추울 때 움직이는 건 좀 위험하니까. 그대도 그렇고.”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요.”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서의 번잡스러웠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만큼 수도행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오델리가 그리도 원하는데 못 간다 버틸 만큼 가기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알렉이 단 한 번도 아르노 영지를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알렉의 첫 여행인 만큼, 비앙카의 마음에 불안이 엄습했다.
“그런데 알렉이 괜찮을까요? 아직 한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인데…. 혹여 여행길에 병이라도 걸리게 되면.”
“음…. 그렇긴 한데 알렉은 괜찮을 것 같소.”
“음….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비앙카와 자카리는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의 하나뿐인 외동딸은 태어난 지 한살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그들의 걱정이 아무 쓸모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 * *
수도행이 결정 나고 준비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여장을 꾸리는 건 2년 만이었지만 이본느는 능숙하게 짐을 챙겼다.
알렉이 같이 가다 보니 손이 부족한 만큼 루시도 동행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수도에 가는 것이라 그런지, 루시의 얼굴은 기대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을 배웅하는 뱅상의 얼굴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한 해가 갈수록 부쩍 늙어 가는 모습에 비앙카는 그에게 넌지시 은퇴를 권했다. 하지만 뱅상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기씨와 마님 걱정에 은퇴를 하는 쪽이 더 불안하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비앙카는 그렇게 자신이 믿음직스럽지 못한지 지금까지의 제 행적을 뒤돌아보았다. 성의 재정 관리는 물론이거니와 물품 비축 및 하인 관리 등등.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의 태반을 여전히 뱅상이 처리하고 있었다. 뱅상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도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렇다 해서 계속 뱅상을 부려 먹을 수만은 없는 노릇인 만큼, 비앙카는 뱅상에게 빨리 후계자를 키우라 닦달했다. 뱅상도 후계자의 필요는 느끼고 있는지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영지의 일 전반을 도맡아야 하는 뱅상의 후계자감이 갑자기 하늘에서 똑 떨어질 리도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뱅상의 일감에 후계자를 찾는 일까지 얹어졌을 뿐이었다.
‘수도에 갔다 오는 동안 뱅상이 후계자를 찾으면 좋을 텐데.’
물론 비앙카 그녀가 영지의 일을 맡으면 쉽게 해결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람은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요 몇 년 사이 톡톡히 느꼈다. 영지 관리에 대해 알고 있다 해서 잘할 자신이 있다는 건 아니었다. 비앙카는 확실히, 매일매일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일은 정말 쥐약이었다.
그사이 마차는 도개교를 넘어 점점 아르노 영지에서 멀어졌다. 마차는 금방 푸른 들판을 지나 우거진 숲으로 진입했다.
알렉은 마차를 타고 가면서도 방긋방긋 잘도 웃었다. 보채는 일 하나 없는 모습이 기특하고 사랑스러웠지만, 그렇다 해서 알렉이 얌전히 있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알렉의 탈주는 요람에서 마차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비앙카나 이본느가 조금이라도 시선을 떼면, 알렉은 귀신같이 마차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잠시 마차를 멈춘 사이, 알렉은 기어코 마차를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렇게 알렉이 행방불명 되는 가슴 철렁한 사건이 여행 중 몇 번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모두 함께 무사히 수도에 입성할 수 있었다.
2년 만에 오는 수도는 겉으로 보기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사소하게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도로가 훨씬 깔끔했고,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빅토르 2세는 죽을 날을 앞두었던 만큼, 라호즈의 정비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부식되고 노화된 시설들이 알게 모르게 많았다. 오델리는 새로 즉위하기가 무섭게 그 모든 것을 싹 뜯어 고쳤다. 귀족들은 쓸데없는 세금 낭비요, 백성들의 배를 불려 줘 봐야 건방져질 뿐이라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막상 수도 정비가 끝난 뒤 라호즈에는 사람이 더 많이 몰렸고, 그만큼 세금도 많이 걷혔다.
사람들의 얼굴에 가득한 행복과 만족. 마차 밖을 둘러보던 이본느의 얼굴에도 생기가 올라왔다.
“확실히 이전보다 더 활기가 넘치네요.”
“전하께서 그만큼 라호즈에 신경을 많이 쓰시나 보구나.”
비앙카는 작게 미소 지었다. 오델리가 잘 할 거라 고는 생각했지만 실제 결과물을 마주하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비앙카와 이본느, 루시까지. 마차 안에 있는 이들이 수도의 전경을 둘러보며 감탄하고 있는 사이, 마차 밖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아르노가의 긴 행렬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이게 웬 행렬입니까? 이 정도로 긴 행렬은 정말 오래간만에 봅니다.”
“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답디까?”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잠깐, 저건 아르노가의 문장인데. 아르노 공작이 방문한 모양입니다.”
아르노가라는 이야기가 수군거림을 타고 빠르게 퍼졌다. 경외의 눈빛을 띤 사람들이 그들의 행렬 주변에 모였다. 2층에서 목을 빼놓고 그들을 보는 이들도 있었다.
“아르노가?”
“저기 선두에 계신 분이 아르노 공작님이신가 봐요.”
흑마에 탄 채 위풍당당하게 행렬을 이끄는 자카리의 모습은 확연히 사람의 시선을 잡아챘다. 자카리의 명성은 아라곤과의 마지막 전투 이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드높아졌다. 명실상부한 세브랑의 영웅이 된 그의 영웅 서사시가 쓰일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저 선두 뒤에 있는 마차는….”
자카리의 뒤로, 검은색 태피스트리에 아르노가의 문장이 장식된 고풍스러운 마차가 뒤따르고 있었다. 마차를 이끄는 백마들은 마차와 맞춘 검은 마구를 걸치고 있었다.
천장까지 전부 덮은 마차에 타는 이들은 귀부인들 뿐이다. 하물며 저렇게 화려한 마차라면 더더욱. 그리고 아르노가에서 저런 마차를 탈 만한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설마….”
다들 비앙카가 탄 마차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성인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심장이 벅차 올랐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열렬한 환호에 아르노가의 사람들도 들뜨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환대에 일일이 응답하던 소뵈르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대승하고 입성할 때도 이만한 환호를 받지는 못했는데요. 하다못해 공작위를 받으시러 오셨을 때도요.”
“그때는 없는 분이 계시니까.”
로베르가 툭 내뱉었다. 그의 시선이 그들 뒤에 있는 마차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로베르의 뜻을 바로 눈치챈 소뵈르는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마님 덕분인가.”
“성인임이 밝혀지신 후 처음으로 수도에 발걸음 하시는 것이니, 모두 궁금할 만하지.”
로베르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애써 덤덤한 척 하지만, 그 또한 사람들의 환대로 인해 상기된 감정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귀가 멀끔한 새하얀 낯과 비교되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에서 하늘하늘 꽃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아직 어린 여자아이들이 2층에서 그들을 향해 꽃을 뿌리고 있었다. 그들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성인님, 수도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이었다면 행렬의 선두에 있는 자카리를 향해 환호했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지나쳐 마차로 향해 있었다. 비앙카를 간절히 찾는 시선이었다. 소 뵈르는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를 맞으며, 자카리에게 킬킬 농을 걸었다.
“이제 공작님 보다도 마님이 더 인기가 많은데요?”
자카리의 표정이 뚱했다. 사람들이 저보다도 성인인 비앙카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했다. 애초에 사람들의 관심에는 흥미도 없었다.
자카리의 속이 뒤틀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질투! 이미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비앙카다. 아내가 인기 있는 것이 사내의 자랑이라지만, 적어도 그것은 자카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되레 사람들이 비앙카를 성인으로 추앙할 때마다 마치 그녀를 빼앗긴 것만 같은 졸렬한 생각이 치솟았다.
모두가 비앙카가 마차의 창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비앙카의 얼굴이 조금이라도 보일까 폴짝폴짝 뛰는 이들도 있었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절대 마차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자카리는 비앙카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그저 한 순간이요, 그저 미소 한 점일지라도.
속 좁은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과거 비앙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안달복달 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 열려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카리는 그녀의 손짓 하나 눈짓 한 번에 목을 맸다.
사람들의 열렬한 기세는 마차 안에도 전해졌다.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은 휜히 읽었지만, 자카리의 속 마음은 전혀 짐작지 못한 이본느가 활짝 웃으며 비앙카의 등을 떠밀었다.
“얼굴이라도 내비쳐 주세요, 마님. 다들 마님을 기대하고 있나 봐요.”
“되었다, 되었어. 봐 봤자 실망하기만 하지.”
비앙카는 손을 내저었다. 생각보다 심드렁한 반응에 루시가 화들짝 놀랐다.
“왜 실망을 해요? 다들 마님을 봬서 기뻐할 거예요!”
“저 이들은 성인인 나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냐. 솔직히 나도 내가 성인답지 않아 뵌다는 건 안다. 얼굴도 사납고, 옷차림도 사치스럽고.”
“하지만….”
“기대는 기대로 둘 때가 좋은 법이야.”
비앙카는 단호했다.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도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다. 비앙카가 한번 마음먹으면 쉽사리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본느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한 동생의 어깨를 다독였다.
결국 비앙카는 라호즈의 본성에 입성하기까지 마차 밖으로 조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혹여나 비앙카가 모습을 드러내면 어찌하나 전전긍긍하던 남편 자카리의 마음을 더할 나위 없이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 * *
지난번 라호즈에 왔을 때도 대접에 부족함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 융성함의 수준이 달랐다. 귀족으로서 타인이 떠받들어 주는 것에 익숙한 비앙카가 깜짝 놀랄 정도로, 마치 왕족이라도 된 것 같은 대접이 었다.
특히나 그들에게 배정된 방에 비앙카는 놀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안내 받은 곳은 바로 오델리가 왕녀이던 당시 쓰던 방이었다. 오델리가 신경 쓴 듯 소소한 변화가 있었다. 방안 한구석에 놓인 아이의 요람이며, 녹색 커튼과 캐노피며…. 본디라면 오델리의 취향대로 푸른색으로 도배되어 있던 방이 비앙카에게 맞춰져 있었다.
“어떻게 이 방을…. 너무 과분한 것이 아닌가요?”
“이제 그대도 공작 부인 아니오. 계급으로 따지면 왕녀와 별반 차이가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대는 전하의 친우가 아니오. 전하께서 일부러 이 방을 쓰라 명하셨소. 기쁘게 받는 쪽이 전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오.”
자카리가 비앙카를 설득했다. 하지만 부담스러움은 여전한 듯, 비앙카는 불안스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을 채운 장식이며 가구가 값을 매길 수도 없을 만큼 귀한 물건들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비앙카 또한 아르노 성에서 이 정도는 누려 왔다. 다만 이 방이 주는 의미가 부담스러웠을 뿐이었다.
오델리를 사랑했던 빅토르 2세가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신경 썼던 방은 창밖의 전경이며 실내 장식이며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화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오델리의 추억이 담긴 공간이었다. 한때 방에만 틀어박혔을 정도로 방이라는 공간에 두는 가치가 높은 만큼, 비앙카는 이 방이 주는 의미를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방을 내어 주다니. 비앙카는 머뭇거리며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있던 찰나, 왕의 시녀가 방을 찾아왔다.
“아르노 공작 부인.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오델리의 호출이었다. 안 그래도 성에 왔으니 오델리에게 인사를 전하려 했는데, 부름이 생각보다 더 빨랐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비앙카의 뒤로 자카리가 따라붙었다.
“나도 전하께 인사를 올려야 하니 함께 가도록 하지.”
“전하께서는 공작 부인과 아기씨만을 조용히 뵙고 싶다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공작께서 함께 가시면 좀….”
시녀가 곤혹스레 눈치를 보았다. 자카리가 함께 가서 안 될 건 없지만, 아무래도 왕과 공작의 사이니 만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정치적인 이야기가 저절로 끼어들게 되는 것이었다. 그건 오델리가 바라는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였다.
사실 공작이나 되는 이의 인사도 받지 않은 채 그의 일행과 따로 약속을 잡는 것은 경우가 없는 일이었다. 오델리가 자카리를 무시하기 위함은 아니었고, 단지 그만큼 비앙카를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카리가 그에 꼬투리를 잡으면 어쩔 수 없는 만큼, 시녀는 자카리의 눈치를 보았다.
비앙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 하시네요. 이본느와 루시와 함께 다녀올게요.”
“하지만.”
“걱정 마요. 왕성에 온 것이 처음도 아닌걸요. 게다가 당신은 따로 할 일이 있잖아요. 오늘 성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이 많다 했으면서. 다행히 전하께서 당신 인사를 안 받으실 요량인 듯하니, 우리 서로 일을 처리하고 저녁에 일찍 만나도록 해요.”
비앙카의 설득에도 자카리는 못내 불안한 표정이었다. 비앙카는 어지간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껏 막연히 생각한 것이지만, 자카리는 조금 의처증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녀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 같았다.
기실, 조금이 아니라 무척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자카리가 비앙카의 앞에서는 대놓고 티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 전전긍긍하여 정도가 덜해 보였다. 불행인 지 다행인지, 자카리 본인 또한 자신의 상황이 그리 심한 지 눈치채지 못했다.
자카리 주변 사람들은 자카리의 그런 성향에 대해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일부러 그런 이야기에 대해선 말을 흐렸다. 괜스레 본인에게 자각시켜 봐야 그다지 좋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밝은 목소리로 그를 설득했다.
“그리고 당신이 함께 있으면 너무 눈에 띈다고요. 아르노 공작 부인이 여깄소, 하고 외치는 꼴이라니까요. 소란 없이 조용히 갔다 올게요.”
자카리의 입매가 못마땅히 일그러졌다. 하지만 비앙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결국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호위를 붙이기로 타협 본 뒤에서야 그녀를 순순히 보내 주었다.
비앙카의 뒤로 알렉을 안은 이본느와 루시, 그리고 가스파르가 줄줄이 따라붙었다. 비앙카의 앞에서 시녀가 길 안내를 했다.
“이쪽으로.”
비스듬히 보이는 시녀의 낯이 익숙했다. 사람을 잘 기억해 내지 못하는 비앙카는 눈썹 사이에 주름을 잡은 채 시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비앙카는 오래지 않아 그녀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바로 볼네 자작가의 영애였던 셀린느였다.
비앙카가 바로 알아볼 정도인데, 비앙카보다도 눈썰미가 좋고 사람을 잘 기억하는 이본느가 셀린느를 못 알아볼리 없었다. 셀린느가 그들을 맞이하러 오기가 무섭게 그녀를 알아본 이본느는 바로 눈매에 힘을 줬다.
예전에야 평민이었던 만큼 비앙카의 누가 될까 봐서라도 눈총이 어디로 튀는지 조심했다지만, 지금은 남작 부인이 아니던가. 자작 영애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분이니 만큼 이본느는 마음껏 경계를 표출했다.
비앙카와 좋은 일로 엮였던 사이가 아닌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혹여나 그녀가 비앙카에게 해코지를 할까 긴장을 놓지 않았다.
이본느가 그러거나 말거나, 비앙카는 심드렁하게 셀린느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로군.”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공작부인.”
셀린느는 잠시 멈춰 서서 비스듬히 비앙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까. 예전의 독기 어린 눈동자는 고요히 흔들림이 없었다. 평정심 어린 낯은 낯설기까지 했다. 왕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다운, 적을 만들지 않는 무던한 태도였다.
비앙카를 데리러 온 것이 그녀인 걸 보니, 지난 2 년간의 세월 동안 오델리의 신뢰를 얻은 모양이었다. 비앙카는 다소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대가 아직 전하 곁에 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네.”
“제가 공작 부인께는 부족한 점을 많이 보여드렸죠.”
셀린느의 미소에는 자조의 기색이 묻어났다. 그녀와 있었던 일들이 딱히 좋은 기억들은 아니었다지만, 그렇다 하여 숙원이 깊게 내린 것도 아니었다. 비앙카에게 있어서는 이미 과거에 청산된 관계였던 만큼 과거의 일을 들먹이며 그녀를 비꼴 생각이 아니었다. 비앙카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 었다.
“딱히 그랬다기 보단 볼네 자작가엔 자네 혼자뿐이지 않나. 최근 여식들이 가문을 물려받는 일이 잦다보니, 자네 또한 볼네 자작가를 물려받기 위해 떠났을 거로 생각했네.”
“???부인께서는 전하와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셀린느의 담담한 낯이 크게 일렁였다. 오델리를 언급한 순간 셀린느의 얼굴에 스친 미소의 온기는 무척이나 따스했다. 셀린느는 발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도 볼네 자작가로 가서 가문을 잇는 것이 어떠하느냐 제안해 주셨습니다만 거절했습니다. 저는 제 그릇을 알아요. 전하 곁에 있으니 더더욱 알겠더군요.”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린 셀린느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경멸 어린 미소였다.
선대 왕이 볼네 자작을 수도에 출입 금지했지만, 오델리가 왕이 되며 금지령은 무효가 되었다. 볼네 자작은 바로 셀린느를 통해 왕가에 끈을 대기 위해 부리나케 수도로 올라왔다.
‘선왕께서 아들을 잃어 노망이 드셨지, 차기 왕으로 다른 이도 아니고 계집을…. 그래도 우리 가문엔 잘된 일이다. 옆에서 조금만 꼬드기면 쉽게 넘어올 것이야. 알았지, 셀린느? 왕녀의 곁에서 이 아비가 얼마나 충실한 신하인지 전하거라. 너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이 아비가 고위 귀족이 되면, 너 또한 시녀 일은 그만두고 더 좋은 집안과 결혼할 수 있지 않겠느냐.’
오델리가 왕위에 오른 뒤임에도 그녀를 왕녀라 칭하는 볼네 자작의 말에서는 그가 얼마나 오델리를 우습게 보는지가 뚝뚝 묻어났다. 그저 오델리가 여자이기에. 단지 그뿐인 이유로.
예전의 셀린느였다면 아버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오들오들 떨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델리의 곁에서 그녀가 왕이 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지켜보았고, 그녀의 곁에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오델리의 모든 노력을, 자신의 꿈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한 채 그녀를 가문의 말로써 쥐고 흔들려는 볼네 자작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 세브랑의 왕이십니다. 전하라 부르십시오, 아버지.’
‘수도에서 왕족의 시중을 드니 네년이 뭐라도 된 것 같으냐? 목을 어디서 뻣뻣이 치켜들고 아버지를 깔아 봐? 건방진 년.’
볼네 자작은 바로 손바닥을 뒤집듯 태도를 바꾸어 성을 내었다. 그는 길길이 날뛰더니, 이내 분을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근위병이 그 꼴을 보고 볼네 자작의 앞을 막아섰다. 셀린느는 왕의 시녀. 비록 작위 상으로는 자작인 아버지보다 낮았지만, 왕성에서의 영향력만큼은 위였다.
셀린느는 아버지 볼네 자작을 냉정하게 내쳤다. 그리고 오델리에게 부탁하여, 풀린 수도 금지령을 다시 한 번 내렸다. 그것은 셀린느와 볼네 자작가 사이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했다.
오델리는 괜찮겠느냐 물었지만, 셀린느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연의 끈을 끊어 내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볼네 자작가와의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면, 결코 오델리에게 좋지않을 거라는 게 뻔히 보였다.
볼네 자작가에는 몰락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대에 뒤처지면서도 그 사실을 짐작도 못 한 채 큰 소리만 치고 있는 구시대의 폐물이었다.
셀린느는 볼네 자작가의 하나뿐인 자식이었지만, 볼네 자작의 사고방식을 볼 때 여자인 그녀가 가문을 이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게다가 셀린느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볼네 자작가에 대한 애정도 바닥을 쳤다. 굳이 힘든 길임이 뻔히 보임에도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아갈 애정도, 무엇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볼네 자작가와 오델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셀린느가 선택할 것은 정해져 있었다.
“저는 계속해서 전하를 모실 겁니다. 볼네 자작가는…. 뭐, 아버님이 마음에 드는 사촌이라도 입양해서 이으라 하지요.”
“그 결정도 나쁘지 않지.”
비앙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이 안될 일에 힘 뺄 필요 없다는 건 비앙카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이니 노력하면 하는 만큼 보답이 있을 거라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비앙카 또한 가족과의 대화로 인해 관계를 회복한 경우였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이에게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게 얼마나 사람을 기 빠지게 하는 것인지 또한 알았다. 그리고 가족의 일은 당사자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셀린느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 선택이 옳을 것이라 비앙카 또한 생각했다.
비앙카의 호의적인 답에 셀린느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비앙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지만, 그에 대한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다.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내리 앉았다. 저벅, 저벅. 돌바닥을 걸어가는 발소리가 회랑에 울렸다. 이전에 비앙카가 오델리를 만나러 가며 있었던 순간의 기억이 현재에 겹쳐졌다.
“???신께서.”
그때, 묵묵히 걷고 있던 셀린느가 다시 한 번 말문을 열었다. 셀린느가 그다지 그녀와 대화하고 싶어 하진 않을 거라 생각한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신께서 부인을 선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면 부인의 선택 덕에 제 미래가 바뀐 것이니, 어쩌면 신께서 제 운명이 바뀌길 바라셨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어처구니없는 비약이었지만 셀린느는 진지했다. 다른 이들이 들었더라면 단지 우연일 분인 일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냐며 비웃을 수도 있었지만, 그곳에 있는 누구 하나 웃지 않았다. 다들 마 음속 한구석에 셀린느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앙카와 만남으로써 인생에 내리쬔 행복은 어쩌면 신이 내려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이본느도, 루시도, 하물며 가스파르도. 오로지 당사자인 비앙카만이 당황했다.
선뜻 말을 잇지 못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셀린느는 피식 웃었다. 이제 좀 비앙카라는 이에 대해서 알 것 같았다. 공격받으면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날카롭게 받아치지만, 칭찬을 받으면 어찌할 바 몰라 하며 무척 어색해했다. 아마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셀린느 그녀 또한 비앙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를 폄훼하고 깎아내리기 바쁘지 않았던가. 살갑지 못한 태도와 무뚝뚝한 언동. 그것이 마치 비앙카와 자신 사이의 격차처럼 느껴졌다. 비앙카가 자신들을 우 습게 보고 어울리고 싶지 않아 한다 지레짐작한 셀린느는 되레 더 날카롭게 그녀를 깔아뭉개려 애를 썼다….
생각해 보면 비앙카는 딱히 무언가 적대감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저 셀린느 그녀의 마음속의 열등감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참으로 오래 걸렸다.
“광오한 자기 합리화라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확실한 건, 부인 덕에 제 인생이 달라졌어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죠. 그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셀린느는 비앙카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시녀가 된 직후 비앙카와 마주했을 때, 남아 있던 부질없는 자존심으로 인해 미처 전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였다.
고개를 든 셀린느와 비앙카의 눈이 한순간 마주쳤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품고 있던 마음의 앙금이 완벽히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 * *
비앙카가 안내된 곳은 처음 와 보는 낯선 곳이었다. 지난번 빅토르 2세를 알현한 곳은 대외적인 일을 처리하는 대접견실이었고, 이번에 비앙카가 들어선 곳은 왕의 개인적인 관계의 이들을 초대하는 개인 접견실이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고 비앙카는 나긋나긋한 발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의자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며 비앙카를 기다리고 있던 오델리는 비앙카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를 반겼다.
“전하.”
“오, 아르노 공작 부인.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소.”
“아닙니다. 지금껏 찾아 뵙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오델리는 바로 성큼 비앙카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손을 부여잡은 채 오랜만에 마주한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오델리는 세월이 빗겨 나간 듯 여전히 아름다웠다. 곱게 땋아 올린 반짝반짝한 금발 머리칼 위에 왕관은 마치 제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잘 어울렸으며, 둥근 어깨 위에 놓인 왕가의 문양이 수놓아진 망토
또한 그러했다. 이전에 없던 왕으로서의 위압감이 그녀 특유의 기품과 어우러지니, 장인이 심혈을 들여 만들어 낸 예술품과도 같은 장엄한 아름다움에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델리는 비앙카의 손을 잡아 끌며 자리로 안내했다. 말을 건네는 오델리의 목소리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흥분이 남아 있었다.
“그대를 만난다는 생각에 내 이것저것 준비해 보았는데, 마음에는 들던가.”
“너무 과분하여….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무얼. 우리 사이인데.”
과도한 환대에 비앙카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다. 오델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가볍게 말했다.
서로 안부 인사를 하는 두 사람 뒤에서 루시는 멍하니 오델리를 바라보았다. 오델리와 구면인 비앙카와 다른 사람도 그녀의 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는 데, 오델리를 처음 보는 루시는 더했다.
그녀는 시선을 흘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기적을 보는 것만 같은 눈으로 오델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델리는 그런 루시의 시선을 금방 눈치챘다.
“웬일로 새로 시녀를 들였군. 그대는 사람을 쉽게 곁에 두지 않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알렉은 이본느 혼자 다루기가 까다로운 아이라서요.”
“오, 이 아이가 차기 아르노 공작인가?”
자신의 무례를 깨달은 루시가 허겁지겁 고개를 숙이는 사이, 오델리의 시선이 이본느가 안고 있던 알렉에게로 향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음에도 방긋방긋 웃고 있는 것이, 언제나의 알렉의 모습이었다.
이본느는 오델리가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알렉을 안은 채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알렉은 연녹빛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려 오델리에게 시선을 맞추더니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이복 여동생들과 조카 알베르의 탄생을 지켜봐 온 만큼, 오델리가 갓난아이를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토록 잘 웃는 아이는 처음이다. 알렉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살펴보던 오델리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대를 꼭 빼닮았군.”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다들 공작님을 닮았다 하는데.”
“아니야. 그대를 닮은 눈동자가 아주 총명하고 상냥해 보이는걸.”
오델리는 제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알렉의 엄마인 비앙카가 봐도, 눈동자 색을 제외하고 알렉과 그녀가 닮은 구석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못마땅하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심 아이가 자기를 닮아 예민하고 연약한 아이면 어쩌나 걱정했기 때문에, 보통 이상으로 기세 좋은 모습에 내심 안도하기도 했다.
하여튼, 닮지 않은 건 닮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상냥하다니. 애초에 비앙카와 닮을 이유가 없는 요소지 않던가. 그렇다 하여 오델리의 말에 일일이 꼬투리 잡아 반박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비앙카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오델리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알렉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방긋방긋 웃는 알렉과 얼마나 눈을 마주했을까, 오델리의 눈썹이 슬며시 치켜 올라가며 눈이 가늘어졌다. 알렉의 크기를 가늠해 보듯 한참을 바라보 던 오델리가 이내 의아함을 지우지 못한 채 물었다.
“그런데 이제 한 살이라 하지 않았는가?”
“알렉의 성장이 좀 남다르긴 합니다, 전하.”
진심으로 되묻는 말에 비앙카는 웃음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어딜 봐도 한 살 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크기기는 했다. 오델리가 혀를 내두르더니, 이내 이본 느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내어 보게.”
“보는 것 이상으로 무겁습니다, 전하.”
“나는 생각보다 힘이 좋은 편이니 걱정 말게. 신의 뜻이나 다름없는 아이를 떨어트릴 일은 없네.”
“하지만.”
“내 친우의 아이를 한번 안아 보고 싶어서 하는 말이야.”
이본느는 비앙카의 눈치를 보며 주춤했다. 비앙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이본느는 오델리의 팔에 조심스레 알렉을 안겨 주었다. 가는 팔에 실린 무게는 생각보다도 묵직했다. 오델리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래서야 비앙카 그대가 안아 키우는 건 말도 안되겠군.”
“저는 별로 안아 보지도 못한답니다. 여기 있는 유모와 공작님이 하도 소란을 피우니 말이지요.”
“음. 그 이야기를 들으니 한결 안심이 되는군.”
오델리는 알렉의 엉덩이를 가볍게 도닥였다. 알렉은 오델리의 품에서도 방긋방긋 잘만 웃었다.
“이리 배포가 큰 걸 보아하니, 나중에 큰 인물이 되려나 보군. 키우기 까다롭겠어.”
“탄생부터 짊어진 굴레가 많으니, 저는 되레 억압 하지 않고 키우려고요. 어떻게든 올바른 길로 나아갈 아이일 테니까요.”
“그것도 나쁘진 않지.”
오래지 않아 알렉이 오델리의 품에서 크게 몸을 뻗댔다. 익숙하지 않은 상대의 품이 불편한 모양이었 다. 이본느가 황급히 다가가 오델리에게서 알렉을 받았다. 이본느가 알렉을 다독이는 사이, 오델리와 비앙카는 허심탄회하게 지난 근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얼마나 대화를 나누었을까.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방이 불그스름한 노을로 물들었다.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때였다. 오델리는 대화의 즐거움에 빠져 잠시 깜빡 잊고 있던 일을 기억해 냈다.
“아, 그러고 보니 내 그대가 라호즈에 온 것을 환영할 겸, 신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기릴겸 하여 무도회를 준비해 두었네.”
“무도회요?”
“그래. 지난번에 수도에 왔을 때는 서둘러 영지로 돌아가느라 무도회를 즐기지 못하지 않았던가. 내 왕 위에 오르고 처음으로 주최하는 연회는 그대를 위한 것으로 생각해 두었네.”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도 기억해 주는 것은 고마웠으나, 비앙카는 무도회나 연회와 같이 사람의 시선이 많은 곳에 나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비앙카는 에둘러 간곡한 거절의 기색을 표했다.
“너무 과분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 신경 써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과분이라니. 아르노 공작 부인. 그대는 이제 과분과는 거리가 먼 이가 아니던가. 그대를 위해 하는 일에 이 세상 그 누구라도 과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못 할 것일세.”
세브랑의 정점으로 최고위 신분인 오델리가 정색을 하며 비앙카의 말에 반론했다. 비앙카는 예의상의 만류로 은근슬쩍 무도회에 관한 안건을 흘려 넘길 생각이었지만, 오델리가 이리 나오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연회는 일주일 뒤이니, 그 전까지 여독을 푸시 게.”
오델리는 싱긋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기대는, 비앙카가 당연히 무도회를 좋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음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비앙카는 억울했다. 그녀는 그저 드레스와 보석 등의 사치를 좋아할 뿐인데…. 어찌하여 그런 취향이 연회를 즐긴다는 것과 동일 선상에서 받아들여지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마 오델리에게 자신은 무도회 따위는 거북스럽기만 할 뿐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오델리와 덜 친했다면 모를까, 오델리에게 호감을 지닌 만큼 그녀의 호의 어린 기대를 배반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결국 비앙카는 오델리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 무척 기대가 되네요.”
비앙카가 소란스러움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본느와 가스파르는 뒤에서 안쓰러운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인이 미처 피력하지 못한 뜻에 대해 그들이 주인 몰래 전해 줄 수 있는 상대가 있고, 전해 줄 수 없는 상대가 있었다. 오델리는 세브랑의 왕. 단언컨대 후자였다.
* * *
오델리와의 환담이 예상했던 것보다 길어졌다. 비앙카는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뛰지만 않았다 뿐이지 서두르는 기색이 성급했다. 비앙카의 보폭에 맞춰 뒤따르던 이본느가 농을 걸었다.
“공작님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시겠는데요.”
“기다리기만 하면 다행이지. 어디쯤 오나 확인하겠다며 찾아오시진 않을까 걱정이네.”
그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걸어갔다. 긴 회랑에 드리운 노을빛을 보고 있자 하니, 아까 전 오델리를 찾아갈 때와 전혀 다른 공간 같았다.
그때, 회랑의 반대쪽에서 한 귀족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기실, 한 번 본 적이 있다 해도 비앙카로서는 기억 못 할 터였다.
비앙카와 그다지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뵈는 얼굴은 성의 위압감에 눌려 긴장한 티가 났다. 옷차림 새는 제법 신경 쓴 태가 났으나 아직 어색한 것이, 돈 좀 있는 지방 귀족 자제 같아 보였다.
비앙카의 관심은 거기서 끝이 났다. 애초에 낯선 사내에 대한 인지 정도였을 뿐이었다. 비앙카는 흘끗 건넸던 시선마저 갈무리한 채, 그의 곁을 스쳐 지나 갔다.
비앙카가 관심 없는 것과 달리, 젊은 귀족 사내는 비앙카를 발견함과 동시에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 했다. 비앙카의 움직임을 따라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멍하니 바라보는 눈빛은 몽롱하기까지 했다.
사내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이본느와 가스파르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일이 꼬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본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발, 저 사내가 괜한 소동 없이 그들을 그대로 스쳐 지나가 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인생이란 무릇 그리 쉽게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우뚝 멈춰선 채 멀어져 가는 비앙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내가 돌연 그들을 향해 힘차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음걸이가 당당한지, 필사의 각오라도 한 것 같은 의지가 느껴졌 다.
그의 눈에는 이본느가 안고 있는 은발의 어린아이도, 덩치 큰 가스파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희부옇게 변한 세상 속에서 오로지 비앙카만이 선명하게 빛이 났다. 만용, 아니면 용기.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부인.”
그의 부름에 비앙카는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비앙카는 떨떠름한 낯을 감추지 않은 채 느릿하게 그를 돌아봤다. 비앙카와 눈이 마주친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갑작스레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부인을 처음 본 순간, 꽃향기에 홀린 벌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저에게 부인의 성함을 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부인을 저의 레이디로 모시고 싶습니다.”
비앙카가 스쳐 지나가며 추측한 대로, 그는 성인식이 되어 처음으로 수도에 상경한 촌뜨기였다. 조셉 에바노프. 에바노프 남작가의 장남으로, 막 스물이 된 그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영지의 세금에 관한 서신 을 오델리에게 전하기 위해 라호즈에 왔다.
막중한 임무를 띠고 오긴 했지만, 난생처음 수도에 발을 내디딘 조셉의 가슴은 장밋빛 로맨스로 꽉 차 있었다. 수도에는 궁정 연애라는 것이 유행한다는 말을 듣고, 영지에서 말을 타고 출발했을 때부터 귀부인과의 연애를 꿈꾸었다.
하지만 촌뜨기인 그를 상대하려는 귀부인은 없었다. 조셉은 조금 기가 죽었지만,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차피 그녀들은 그가 그리던 ‘레이디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회랑에서 마주친 낯선 여인.
그녀는 자신의 이상에 딱 들어맞는 레이디였다. 손끝 에서부터 느껴지는 기품. 오밀조밀한 얼굴. 짙은 고 동색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하얀 피부가 그의 시선을 잡아챘다.
마치 그가 찬미해 마지않는 기사 문학 중 하나인 ‘아르노 공작의 무훈’에 나오는 성인, 비앙카처럼….
물론 그도 성인인 비앙카를 레이디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아르노 공작의 무훈을 보면, 아르노 공작이 그 부인에게 얼마나 목을 매고 주변의 사내들을 질투 하는지가 절절히 나와 있었다. 비앙카에게 추근대었던 자코브 왕자의 결말은 조셉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닮은 여인을 레이디로 삼는 것 정도는 문제 없겠지.’
조셉은 상기된 얼굴로 비앙카의 답을 기다렸다.
그는 눈앞의 여인이 비앙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앙카는 아르노 영지에서 두문 불출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수도에 온 것은 무척 뜻밖의 일이었다. 게다가 수도에 입성한 것도 오늘이다 보니 소문에 귀가 어두운 조셉이 그녀의 방문을 알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비앙카는 이 치를 어찌 떼어 내야 할지 골머리를 앓는 신음을 흘렸다. 그럴 때 나서는 것이 바로 시녀인 이본느의 의무였다. 이본느는 루시에게 알렉을 맡 기고 비앙카 대신 앞으로 나섰다. 턱을 빳빳하게 치켜든 그는 고압적으로 조셉을 질책했다.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괜히 일을 소란스레 만들지 마시지요.”
“첫눈에 반한 이 열기를 어찌 쉽게 억누를 수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불붙은 짚더미나 다름없습니다. 부디, 성함만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상황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과장된 성격인 건지. 막무가내가 따로 없는 조셉의 행동에 비앙카는 곤혹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조셉의 끈질김을 보니 순순히 말로써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일을 자카리가 알게 되면 큰일이었다. 안 그래도 비앙카의 주변을 맴도는 사내들에 대해 날카로운 편인데….
조금 강하게 윽박질러서라도 그를 포기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가스파르가 앞에 나선 순간, 익숙하지만 결코 이 자리에서 듣기를 바라지 않았던 목소리가 그들의 뒤에서 들려왔다.
“부인.”
비앙카가 너무 늦다 보니 괜한 노파심에 그녀를 마중 온 자카리가 그 꼴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비앙카와 이본느, 가스파르, 그리고 루시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망했다.’
오로지 상황을 모르는 조셉만이 멀뚱멀뚱 멀끔한 낯으로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비앙카는 애써 웃으며 이야기를 돌리려 했다.
“여보, 어쩌다 여기까지….”
“그대가 좀처럼 오지 않아 찾아왔소. 그런데…. 저 치는 누구요?”
하지만 자카리가 그런 얕은 꾀에 넘어갈 리 없었다. 비앙카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단숨에 답한 자카리의 눈이 매섭게 조셉에게로 향했다.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으나, 순간 피부가 따끔할 정도의 살기가 주변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사람도 그 살기를 느꼈을 진대, 당사자인 조셉은 어땠을 것인가. 그는 마치 늑대 앞의 토끼, 혹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어 꿈쩍도 못했다.
사색이 되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조셉을 본 비앙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순순히 사실을 말해 봐야 괜히 일만 복잡해진다. 그것은 조셉에게도 좋지 않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비앙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내와 엮이게 되었을 때 자카리 는 굉장히 집요해지곤 하는데, 그건 비앙카를 무척 피곤하게 만들곤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녀가 편해질 겸 겸사겸사 조셉도 구해 줄 겸, 비앙카는 성인으로서의 자비를 한껏 끌어 올린 채 태연히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그냥 지나가다 만난 사람이에요. 수도가 처음이라 그런지 길을 잃은 모양이더 라고요.”
“길을 잃었다면 왕궁의 시종을 불러 붙여 주면 될 것을.”
자카리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조셉을 훑었다. 어딜 봐도 자카리 그보다 나은 것이 없는 사내였으나, 조셉은 자카리의 제일 큰 약점을 후벼 팠다. 바로 나이. 비앙카의 동년배로 보이는 모습에, 그저 길을 물었을 뿐이라는 비앙카의 변명을 들었음에도 저절로 그를 경계하게 되었다.
조셉 또한 작은 키는 아니었는데 자카리는 그를 내려다볼 정도로 컸다. 그의 냉정한 시선에 조셉은 절로 주눅이 들었다.
아무리 조셉이 눈치가 없다 하나, 이런 상황에 그의 아내에게 궁정 연애를 제의하고 있었다 순순히 털어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짓말에 능한 것도 아니라, 이런 상황에 어찌 장단을 맞춰야 하는지 알 지 못했던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하 지 못했다.
그때, 루시가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재빠르게 나섰다.
“제가 모셔다 드리고 올게요.”
“루시, 너도 왕성에 온 건 오늘이 처음이지 않니. 길을 헤매기라도 하면….”
“걱정 마세요. 전 길눈이 밝으니까요. 금방 모셔다 드리고 돌아 올게요.”
비앙카의 우려에 루시는 빙긋 웃음으로 답했다- 루시와 비앙카, 이본느, 가스파르 사이에 은밀히 시선이 오갔다. 무언의 합의를 한 그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하나 둘 장단을 맞추었다.
“맞아요. 루시는 길을 잘 찾아요. 게다가 여기서 숙소까진 그리 복잡하지도 않으니까, 금방 잘 찾아올 거예요.”
“공작님. 이러다가 식사 시간이 늦겠습니다. 마님께서 아까부터 많이 시장해 하셨는데….”
“마, 맞아요.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부쩍 배가고파 와서….”
비앙카는 어설프게 배를 감싸 쥐었다. 배고프다는 손짓을 처음해 보는 사람 같은 어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에 홀딱 속아 넘어갔다. 결혼 생활이 근 십이 년. 그동안 비앙카가 허기져 하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임신했을 당시에도 별로 입맛이 없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녀가 얼마나 배고프면 시장하다는 이야기를 직접 꺼낼까 싶었던 그는 당황하여 부랴부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서둘러 갑시다, 부인.”
그러는 와중에도 비앙카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조셉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자카리와 비앙카가 폭풍처럼 떠나간 회랑 에 루시와 젊은 귀족, 단둘만이 남았다.
루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 사내의 옆이 라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지금 그녀가 넘긴 고비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루시가 아르노가의 식솔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진중한 자카리가 비앙카의 일에 한해서는 누구보다도 성급하고 불같은 사내라는 것만큼은 똑
똑히 알고 있었다. 루시는 조셉을 향해 눈을 흘기며 날카롭게 말했다.
“이렇게 무마되어서 다행인 줄 아세요.”
“방금 그분은…. 서, 설마 아르노 고, 공작이십니까?”
조셉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물었다. 반짝이는 은발과 건장한 체격,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 입은 옷차림, 전하를 대면한다는 대화 내용 등을 미루어 볼 때, 방금 나타난 사내의 정체는 지나가던 어 린아이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거기에 가스파르가 넌지시 건넨 ‘공작님’이라는 호칭은 쐐기를 박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시는 이제야 알았냐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조셉의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퍼렇게 변했다. 마치 물에 빠져 죽은 시체 같았다.
“그렇다면 아까의 귀부인께서는…. 그….”
“예. 우리 마님께서 바로 성인이시랍니다. 방금도 전하께서 부러 만남을 청해서 뵙고 오는 길이었지요.”
루시는 우쭐해 하며 대답했다. 시종은 그 주인의 명예가 높으면 높을수록 대접받으며, 실제로 높은 가문에서는 곁에 두는 시녀를 귀족 중에서 뽑기도 했다. 그래서 귀족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루시나 이본느 둘 다 시녀가 되기엔 예외적인 경우였다. 특히, 언니 이본느 덕분에 운이 좋게 귀족의 시녀가 된 루시는 아직도 이런 것이 어색 했다.
그래도 싫은 기분은 아니다. 루시는 목에 힘을 주며 에헴, 거드름을 피웠다.
조셉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머리를 몇 번이나 흔들었다. 자카리의 일대기를 여러 번 탐독했을 정도로 그는 자카리의 추종자였다. 자카리를 직접 마주했다는 영광에 감격하는 반면, 자카리의 앞에서 비앙카에게 추근거렸다는 사실은 그를 좌절시켰다. 자카리가 비앙카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탄식을 흘렸다.
“제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군요….”
“이제 아셨으니 다음부터는 주의하세요. 요즘이 어느 때인데 궁정 연애 같은 것에 목을 맵니까?”
단호한 루시의 질책에 조셉의 눈썹과 어깨가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내리쳐졌다.
눈앞의 젊은 귀족 사내가 나쁜 의도를 갖고 비앙카에게 접근한 게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러니 비앙카도 적당히 덮어 주어 상황을 넘긴 것일 테지. 루시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험난한 연애 사정에 대한 덕담을 덧붙였다.
“경께는 다른 좋은 상대가 생길 거예요.”
조셉의 선량한 둥근 눈이 물끄러미 루시를 바라보았다. 지레 찔렸던 루시는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뭐라도 된다는 듯 말하기는 했지만, 루시 그녀의 일생은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을 뿐더러 결혼 생활마저도 엉망진창이었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루시는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정말로 길을 잃으신 건 아니니 제가 모셔다 드리진 않을 게요. 그럼 경, 안녕히 가세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 목소리가 냉정했다. 총총 떠나가는 루시의 발걸음이 급했다.
“잠깐!”
그때, 뒤에서 조셉이 루시를 불렀다. 아무리 시녀가 귀족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 해도, 시녀 쪽에서 귀족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의 말을 모르는 척할 수 없었던 루시는 짜증스레 뒤를 돌아보았 다.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 아직도 마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그가 입을 열기도 전부터 골머리가 아파져 왔다.
그사이에 거리가 꽤 멀어졌다. 조셉은 루시에게 뛰듯 다가왔다. 갑자기 거리가 혹 하니 가까워졌다.
그의 둥근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이내 그의 이가 악다물렸다. 눈빛에 서린 각오에 루시 또한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조셉은 결연히 운을 뗐다.
“저…. 레이디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네‘?”
“당신의 이름 말입니다, 레이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루시는 눈을 깜빡였다. 비앙카와 이본느가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으니 당연히 제 이름을 알고 있을 텐데, 왜 자꾸 물어보는 걸까?
그녀는 한 박자 늦게 조셉의 질문을 이해했다. 궁중 연애의 기본은 설령 상대의 이름을 알고 있더라도 모르는 척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긴장으로 벌게진 귓가와 식은땀 어린 그의 낯이 뒤늦게 루시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계속해서 살피던 것이 바로 루시, 그녀의 반응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심각하게 걱정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었다. 이내 루시는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그러니까, 이 귀족 도련님이 지금 그녀에게 수작을 거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이런 제의가 올 거라고 전혀 생각도 못 했던 만큼, 이 상황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루시가 왜 웃는지 알지 못했던 조셉은 전전긍긍 루시의 눈치를 보았다. 루시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조셉에게 일렀다.
“저는 마님의 시녀이긴 하지만 평민이고, 유부녀 예요. 경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죠.”
* * *
그때의 조셉의 황망한 표정이란! 루시는 가끔 그 때를 떠올리곤 저 홀로 쿡쿡 웃었다.
하지만 마냥 웃고 넘길 수만은 없게 되었다. 조셉이 생각보다 집요하고 끈질겼기 때문이었다. 루시와 헤어진 이후 포기하지 않고 정보를 물어물어 찾았던 조셉은 결국 아르노 공작가의 숙소를 알아냈다. 그는 아르노 공작가의 숙소 근처를 오랫동안 빙글빙글 배회하며 루시와 마주치 기만을 기 다렸다.
낯선 사내의 접근에 아르노가의 세 부장은 잔뜩 예민해졌다. 안그래도 가스파르는 조셉의 얼굴을 기 억하고 있었다. 혹시 아직도 비앙카를 쫓아다니는 걸까. 그렇다면 가만히 놔둘 순 없었다.
자카리가 비앙카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되면 그에 대한 짜증과 분노는 모두 그들에게로 향했다. 그 일만은 절대 사양이었던 그들은 얼굴을 무시무시하게 일그러트리고 가슴 근육을 부풀린 채 조셉을 둘러 쌌다.
하지만 이내 조셉이 따라다니는 것이 비앙카가 아닌 루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카리의 세 부장은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파안대소했다.
곧 조셉의 이야기는 비앙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자기 일로 주변 사람들을 시끄럽게 만든 것 같았던 루시는 면목 없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비앙카는 설 핏 미소 띤 얼굴로 느릿하게 말했다.
“나쁜 상대는 아니지. 젊고, 귀족이고….”
“하지만 마님, 전 유부녀잖아요.”
당황한 루시가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비앙카는 되레 의아하다는 듯 루시를 바라보았다.
“딱히 이유가 없어 이혼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않니. 만약 네 남편이 널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겼더라면 나 또한 이런 제안은 하지 않아. 부부간의 신의는 지켜야 하니까. 하지만 그는 네게 손을 올리는 사내였고, 그런 사내에게 순종하기 위해 네 행복을 포기 할 이유는 없지.”
“무엇보다도 네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니. 결혼하라는 게 아니야. 그 또한 네가 유부녀여도 상관 없다 하니, 가볍게 만나만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지. 물론 네가 그가 싫다면 제의하지 않을 테지만….”
“???싫진 않아요. 다만….”
“그럼 됐지.”
비앙카는 손을 내저었다. 과거에 불륜으로 인해 쓴맛을 톡톡히 본 입장에서 이런 조언을 주는 것이 우습긴 했다. 하지만 비앙카의 과거는 비앙카 그녀의 잘못과 이기심 때문이었던 것과 달리, 루시의 어그러 진 결혼 생활은 전적으로 루시 남편의 잘못이었으니 경우가 달랐다.
루시는 아직 남편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에 불안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비앙카가 보기엔 이혼만 안 했다 뿐이지 완벽히 결별된 관계였다.
루시의 결혼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루시가 마음을 단호히 먹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남편이 루시와 이혼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이혼하게 되면 공작령에서 입을 다물라 내어 준 돈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었 다. 만약 계속해서 돈만 받을 수 있다면 루시와 이혼을 하든 말든 상관없으리라. 실제로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한참을 골몰히 생각하던 루시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역시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죠?”
“아무래도.”
비앙카의 단호한 답에 루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포기와 허탈함, 그리고 어딘지 모를 자유로움이 뒤섞여 있었다. 루시는 비앙카와 눈을 마주치며 또박또박 말했다.
“영지로 돌아가면 이혼 절차를 밟아 주세요, 마님.”
“그래. 하지만 그 청년을 믿고서 그런 거라면….”
비앙카가 노파심으로 덧붙였다. 지금이야 고깃덩이를 쫓아다니는 개처럼 맹목적으로 군다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겠는가? 조셉에 대해 따로 알아보긴 했지만 실제 겪어 본 적이 없는 만큼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루시는 쓰게 웃었다. 비앙카가 어른스럽다 해도 그렇지,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였다. 루시보다도 어린 그녀에게 의지하다 못해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게 만들다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 없지는 않아요. 제가 이혼한다 해서 그분과 어찌 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아요. 그럴 만한 관계가 아직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앞으로 있을 일들에서 지금 제 남편은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이니까. 마님 말씀대로, 확실히 매듭지어 두는 게 낫죠.”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는 루시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고요히 한곳만을 응시했다. 비앙카와 이본느 둘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이 얼마나 루시의 이 각오를 바라 왔던가!
마음에 콕 박혀 있던 큰 가시 하나를 뽑아내게 된 비앙카는 안도했다. 이게 모두 수도에 온 덕분이다. 루시의 각오 하나만으로도 수도에 올 만한 가치가 있 었다.
기쁨에 상기된 이본느의 얼굴을 보며 비앙카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아마 비앙카, 그녀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무도회 날이 다가왔다. 비앙카 그녀의 수도행을 축하하는 연회이니만큼 관심이 그녀에게 쏠릴 테니 평소보다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새로 드레스를 맞추고, 드레스에 맞는 보석을 골랐다.
이본느와 루시도 비앙카의 옷차림새를 점검하고 만져 주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정신없는 그들을 위해, 비앙카는 자신의 옷을 맞추는 길에 그들의 옷도 맞춰 주었다.
비앙카의 통 큰 선물을 받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이본느는 감사해 하며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루시는 자신이 이렇게 귀한 것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하냐며 이본느를 흘끔흘끔 바라보았지만, 정작 이본느는 루시에게는 감색 천도 잘 받을 거라며 루시의 옷감을 살피고 있었다.
“둘 다 이번 무도회에 드레스를 맞춰 입고 함께 참 석하면 좋을 텐데….”
“그러게요. 하지만 한 사람은 아기씨를 봐야 하니 까요. 그래도 드레스를 무도회에만 입으라는 법은 없잖아요. 새 드레스라니, 꿈만 같아요.”
이본느가 황홀한 듯 말했다. 루시 또한 제대로 된 자신만의 드레스를 맞추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잔뜩 상기된 얼굴을 감추진 못했다. 루시는 조용히 옷감 끝을 만지작거렸다.
무도회에 가기 전날, 조셉이 루시를 찾아왔다. 연회에 함께 참석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애써 용기를 냈는지,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루시도 그의 제안을 받아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해요. 아기씨를 돌봐야 하는지라….”
“하, 하하!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성급하게 찾아 왔죠. 정말 괜찮습니다!”
조셉은 허둥지둥 달아나듯 자리를 떴다. 루시는 안쓰럽 게 그의 뒤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그 이야기를 들은 이본느는 호들갑을 떨며 루시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기씨는 내가 볼 생각이었는데. 난 지난번 수도에 왔을 때도 연회에 참석했지만, 넌 이번이 처음이잖니. 그러지 말고 네가 마님의 시녀로 연회에 참석해. 가는 길에 겸사겸사 조셉 경과 쿠랑트라도 추라고.”
“됐어. 언니야말로 형부와 함께 다녀와. 솔직히 마님과 아기씨를 모시는 일 대부분은 언니가 해 왔잖아. 그 때문에 형부랑도 잘 못 만나고. 이러다 형부가 나한테 원한이라도 품으면 안 되니까, 이번 기회에 점수 만회해야지.”
“그럴 사람 아닌 거 알잖아.”
루시의 농담에 이본느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혹여 라도 루시가 그들 부부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과한 이본느의 반응에 루시가 까르르르 웃었다.
“나야 말로 농담인 거 알지? 그런데 정말 괜찮아. 나는 그냥…. 걱정돼서 그래.”
“걱정?”
돌연 루시의 웃음이 멈추었다. 그녀의 낯이 진지 해졌다.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몇 번이고 할 말을 곱씹던 루시는 한참 만에야 조심스레 운을 뗐다.
“처음 오는 수도행에, 귀족 도련님의 파트너로 무도회까지 가게 되어버리면 꿈에 취할지도 모르잖아. 항상 발은 땅에 붙이고 살아야지.”
“루시….”
루시의 주장은 강경했다. 루시를 설득하려던 이본느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결국 무도회 당일, 루시는 고집을 꺾지 않은 채 알렉을 품에 안고 그들을 배웅했다.
그런 이본느와 루시 사이의 일을 비앙카가 모를 리 없었다. 무도회장으로 향하는 비앙카의 낯이 어두웠다. 비앙카를 에스코트하던 자카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무언가 걸리는 것이라도 있소?”
“아무래도 루시를 두고 온 게 걸려서요. 모처럼 드레스도 맞춰 줬으니 입고 싶을 텐데…. 에바노프 남작가의 자제에게 동행 신청도 받았고요. 하지만 루시가 이본느에게 양보하니…. 저로서는 누구 하나 편을 들어줄 수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둘 다 데려가자니, 알렉을 낯선 이에게 맡기게 되어 마음이 불편하고….”
자카리는 잠깐 입을 다물고 턱을 매만졌다. 그의 단단한 턱이 엄지손에 쓸려 주름이 잡혔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의아히 물었다.
“다음번에는 차례를 바꾸면 안 되는 것이오?”
“다음번이요?”
“여왕께서 그대가 수도에 머무는 동안 연회를 이번 한 번만 개최할 것 같지는 않아서 하는 말이오.”
“아….”
자카리의 말이 그럴듯했다. 그녀가 아는 오델리는 무도회와 연회를 즐겼다. 지금까지야 왕위를 계승하고 밀린 일들을 처 리하느라 자주 연회를 열지 못했다지만, 비앙카가 온 것을 계기로 신이 난 기색이니 연회가 두 번 세 번 벌어져도 놀랍지는 않을 터였다.
비앙카와 자카리가 연회장에 들어섰다. 악단의 연 주가 흘러나오는 연회장은 벌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르노가의 등장에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잔잔한 연주만이 깔린 연회장의 분위기는 마치 무도회가 아니라 연 주회 같았다.
사람들의 눈이 비앙카를 좇았다. 성인으로 공표되고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선 것이었다. 모두 선망이 가득 어린 눈으로 비앙카를 우러러보았다.
이전 토너먼트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관심에 비앙카는 숨이 막혔다. 애초에 자신이 관심 받는 일에 익숙치 않은 편이었다. 비앙카는 슬그머니 시선을 홀 렸다.
하지만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사람들이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절로 눈이 마주쳤다. 결국 그녀가 눈을 둘 만한 곳은 땅바닥, 천장, 아니면 자카리 밖에 없었다. 그중 비앙카가 선택한 것은 당연히 자카리였 다.
비앙카의 빤한 시선에 자카리의 귓가가 붉어졌다. 그는 머쓱함을 숨기려는 듯 부러 무뚝뚝이 말했다.
“뭘 그리 뚫어지게 보시오. 안 그래도 많이 보는 얼굴인데.”
“주변을 둘러봐도 당신만큼 볼만한 건 없더라고요. 그러는 당신이야 말로 저만 보고 있잖아요?”
“나는 당신 밖에 안보이니까.”
자카리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천연덕스럽다고 해야 할지, 천성이 남 눈치를 안 본다고 해야 할 지…. 그녀를 바라보는 멀뚱한 검은 눈동자에 담긴 진지함을 보면 후자에 가까우리라. 비앙카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높게 소리 내 웃었다.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검은 눈동자에서는 꿀이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다른 이들이 어찌 보는지와 상관없이, 아르노 공작 부부는 그들만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을 때, 왕가의 일원이 하나둘 연회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티에 왕자는 폰테인 공작령의 주인이기도 했기에 왕자비는 폰테인 공작 부인이되어 성에 머물렀다. 그 아들 알베르 또한 마찬가지 였다. 제1 왕위 계승권을 가진 그는 폰테인 공작 부인의 보호 아래 오델리에게 제왕학을 배우며 무럭무럭 성장했다.
이제 선왕비가 된 빅토르 2세의 셋째 부인 또한 두 딸을 데리고 참석했다. 왕족 중 남아 있는 이들은 알베르를 제외하곤 전부 여자분이었다.
극단적으로 치우친 성비, 게다가 다들 미혼이거나 과부로 짝이 없었다. 그에 신이 난 건 기회를 노리는 젊은 귀족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왕가의 여인들에게 선택 받기 위해 옷을 차려 입은 채 목을 빼고 기웃거렸다. 어쩐지, 유난히 화려하게 차려 입은 사내들이 많다 하였다. 사내들은 모여서 폰테인 공작 부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선왕비는 어떤 차림을 좋아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 비해 여자들은 이전과 달리 건실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지의 세를 불리는 법, 농작물을 좀 더 많이 추수하는 법, 세금, 상권의 유행 등. 지금껏 몰라서 그런 화제에 대해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분위기가 아니 었기에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특히 가문에 아들이 없는 집의 영애들이 더욱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 아버지가 저에게 영지의 재정 서류를 맡기셨어요.”
“어머나, 그러면 혹시…? 축하해요!”
“설레발일지도 모르지만…. 열심히 하려고요.”
비앙카의 또래로 보이는 영애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는 결혼 장사만을 목적으로 사교계에 나서며 교태로운 미소로 무장했었지만, 그 모든 걸 집어던진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순수하게 미소 짓는 지금이 훨씬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는 사이 세브랑의 왕, 오델리가 등장했다. 황금과 왕좌에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여인. 태양을 사람에 비견한다면 모두가 입을 모아 그녀를 읊을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하며 웅장한 그녀의 모습에 모두가 허리 숙여 경배했다.
오델리의 등장에 악단의 연주도 끊겼다. 무도회에 가득한 적막 속에서 오델리는 턱 끝을 치켜든 채 좌중을 훑어보았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오델리의 말을 기다렸다. 오델리의 청아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무도회에 참석해 주어 몹시 고맙소. 급하게 개최 하게 된 연회인데…. 모두 알다시피 오늘 무도회는 나의 친우, 아르노 공작 부인이 라호즈에 온 것을 환영하기 위함이오. 한동안 무도회는 자제하고 있었는 데, 그녀 덕분에 간만에 무도회를 열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군. 내 사사로운 욕심의 핑계가 되어 준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오.”
오델리의 농담 어린 말에 비앙카는 어색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살짝 무릎을 굽혀 정중한 답인사를 건네자, 사람들은 박수로 환호했다.
“나 좋자고 연 무도회기는 하지만 그대들도 즐겼으면 좋겠구료. 그러면 모두, 부디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라오.”
오델리의 축사가 끝나고, 악단이 연주를 재개했다. 불규칙한 박자가 경쾌한 쿠랑트! 오델리가 제일 먼저 파트너의 손을 잡고 연회장 가운데로 나왔다. 파트너는 그녀의 뒤에 있던 건장한 호위기사였다. 어찌나 덩치가 좋은지 가스파르에 필적해 보였다. 그는 잔뜩 긴장했는지, 안그래도 새까만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있었다.
오델리의 호위기사는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저자를 어디서 봤더라….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아아, 이번에 근위대에 임명된 헥토르 경이에요. 기억나세요? 지난번 수도에 오셨을 때, 토너먼트에 서 준우승하신 카스티야의 기사님 말이에요.”
“아, 맞아. 그랬었지.”
수도의 인사들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던 이본느가 재빠르게 비앙카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비앙카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본느의 귀에 속삭여 물었다.
“그런데 카스티야의 기사가 어째서?”
“전하를 모시고 싶어 세브랑에 귀화했다고 해요.”
“아아.”
비앙카는 단번에 납득했다. 그러고 보니 토너먼트 당시에도 오델리에게 장미를 줬던 기억이 났다. 무슨 의도였을까 의견이 분분했는데, 인제 와서 보니 연정이 확실한 듯싶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는 듯, 헥토르는 암초처럼 단단하고도 무뚝뚝한 표정으로 춤을 췄다. 마치 마창 시합이라도 하는 듯한 딱딱한 몸짓에서는 춤과 노래의 흥겨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대신, 기사로서의 절도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많은 것을 감추려 노력했지만, 두 눈 사이에 스며 있는 연정만큼은 완벽히 숨겨 내진 못했다.
그런 헥토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델리는 오래간만에 추는 춤이 흥겨운지 춤에 취해 있었다. 열과 성을 다해 가락에 몸을 맡긴 그녀의 날래고 경쾌한 움직임은 마치 바람결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의 님프 같아 보였다.
두 사람 사이의 일방적인 감정의 흐름이 비앙카의 눈에 선연히 떠올랐다. 오델리는 눈치가 빨랐다. 비앙카가 금방 눈치챘을 정도면, 오델리는 진즉 헥토르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오델리는 사랑과 경배 받는 것에 익숙한 여인이었다. 헥토르의 마음은 그녀에게 별다른 무게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가볍게 곁에 두었겠지. 비앙카가 아는 오델리라면, 곁에서 날 보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뛰어난 기사를 곁에 둘 수 있으니 제법 해 볼 만한 거래였다며 싱긋 웃어넘길 터였다.
헥토르 또한 오델리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표정을 단단히 다잡고 있는 것이겠지.
그런 헥토르의 모습에 비앙카 그녀가 익숙히 알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갑자기 헥토르가 안 쓰러워졌다. 물론, 그렇다 해서 비앙카가 그를 위해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때, 자카리가 비앙카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겁게 하시오.”
“별거 아니었어요.”
자카리는 별로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비앙카가 다른 사내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들어 봐야 썩 기뻐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비앙카는 요령 좋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곡이 한 바퀴 돌고, 왕과 그 파트너의 독무대가 끝이 났다. 귀족들이 손뼉을 쳤고, 이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느라 소란스러워졌다.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이제 나갑시다.”
무뚝뚝이 내뱉는 말에 스민 다정함에 비앙카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자카리의 손을 붙들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 이상 차이 나는 손 크기. 자카리의 손이 비앙카의 손을 마주 잡자, 비앙카의 손은 완전히 뒤덮인 채 가지런한 손끝을 제외하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세브랑의 쿠랑트는 모두 함께 춤을 추는 무곡이었다. 다른 귀족들도 커다란 연회실의 가운데로 삼삼오오 빠져나왔다. 그중엔 가스파르와 이본느도 있었다.
슬쩍 눈이 마주친 이본느의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는 것이, 지금껏 아닌 척해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파트너가 없는 이들은 상대를 찾아 헤맸다. 마음에 드는 이가 있으면 그 앞에서 춤을 추며 구애하기도 했다. 쿠랑트는 딱히 성별 구별 없이 출 수 있는 춤이기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이들도 있었다.
연주가 이어지고, 두 사람은 손을 꽉 마주 잡은 채 느긋한 전조에 맞춰 발을 옮겼다. 사람들의 소란스러 음. 한적한 아르노 영지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분위기인 만큼, 라호즈에서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 다. 서로의 팔뚝이 딱 붙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비앙카가 자카리에게 속삭였다.
“그때가 생각나네요. 토너먼트가 있었을 때…. 그때 당신이 저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해요.”
“어떤?”
“이제 여보라 부르라고요. 그런 관계가 될 거라 고….”
비앙카가 살짝 웃었다. 그때도 이렇게 소란스러웠 다. 그 와중 자카리의 속삭임만큼은 또렷이 비앙카의 귀에 남아 그녀를 종일 잡아 흔들었다.
“그 당시엔 정말 못 믿었던 거 아세요?”
“장난인 줄 알았소?”
“그때만 해도 당신이 장난치는 성격은 아니었잖아요.”
“지금은 아니라는 듯 말하는군.”
“지금은 아니죠, 당연히. 맨날 절 골리면서.”
비앙카가 살짝 자카리의 옆구리를 찔렀다. 손가락으로 찔렀을 분인데 자카리는 칼에 찔린 듯 과장되게 반응했다. 평소 자카리를 아는 이들이면 깜짝 놀랄 정도로 경망스러운 태도였다. 다행히 다들 춤을 추느라 들썩이고 있어 근엄한 전쟁 영웅이 아내를 골리기 위해서라면 잔망스러운 행동도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또, 또. 이렇게.”
“내가 무얼.”
“일부러 과장되게 호들갑 떨잖아요. 실제 칼에 찔려도 이것보단 덤덤히 굴 거면서.”
오히려 칼에 찔렸는지 안 찔렸는지 구분도 안갈 표정을 해서 내 속을 다 뒤집어 놓겠지.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진 비앙카의 입술이 못마땅히 비틀렸다. 자카리는 태연스레 비앙카의 말을 받아쳤다.
“칼에 찔리는 것보다 그대 손가락에 찔리는 게 더 아파.”
“이게 아팠어요? 이게? 정말?”
비앙카는 계속해서 자카리의 옆구리를 쿡쿡쿡 찔렀다. 비앙카는 나름 필사적이었지만, 자카리는 나직이 웃음 지을 분이었다. 오히려 비앙카의 손가락이 아파져 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근육으로 짜인 그 의 옆구리가 얼마나 단단한 지 잠시 잊고 있었다.
박자가 빨라졌다. 자카리의 손길에 이끌려, 비앙카 또한 경쾌한 발걸음으로 스텝을 밟아 나갔다. 몸이 빙글빙글 돌며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 갔다. 여기 저기서 흥겨운 환호 소리가 들렸다. 비앙카와 자카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둘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한창 빠른 스텝을 밟고 있을 당시엔 숨이 차서 말 을 할 수 없었던 비앙카는 다시 느릿한 곡조의 전조가 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확실히 당신,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네요. 딱히 춤 연습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대야 말로. 춤을 잘 추는 게 의외로군.”
“???못 출줄 알았어요?”
“그건 아닌데, 별로 즐길 것 같진 않아서 의외였소.”
“한곡 정도는 거뜬해요.”
자카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곡 정도는 거뜬하다는 말을 영 못 믿겠다는 시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 이, 그녀가 숨을 고르느라 허덕이는 것과 달리 자카리는 숨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가 보기엔 비앙 카가 당장에라도 픽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일 터 였다.
한숨과 함께 숨을 고른 비앙카는 잠시 곁길로 빠진 이야기의 원래 화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좀 더 정확히는, 계속해서 제가 몰리고 있는 지금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여튼 그때 전…. 그냥 제가 설레발 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면 제가 잘못 들었던가.”
“나도 떨렸소. 말을 주워 담을 수 있다면 주워 담고 싶었지.”
처음 듣는 자카리의 말에 비앙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때의 자카리가 어찌나 태연하고 자연스러웠는지! 비앙카 본인만이 이리저리 휘둘릴 뿐이라 생각 했다. 그에게 그런 그녀의 동요를 숨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목에 힘을 주고 눈을 치켜뜨며, 등에 스며 나오는 식은땀을 감추려 애썼다.
자카리는 쓰게 웃었다. 비앙카가 그의 속내를 전혀 몰라 준 것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때 좀 더 참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신의 뜻이 바로 알렉의 존재이며, 과거에서 조금만 발을 잘못 내디뎠다면 지금 이 행복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 질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자카리는 여전 히 그날의 일을 곱씹으며 후회했다.
“그때의 나는 무척 조급했소. 당신에게 끌리는 마음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이성,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끓어오르는 다른 사내들에 대한 경계가 뒤섞여 견딜 수가 없었거든. 결국 그대가 열여덟이 되기까지 손대지 않겠다는 다짐을 꺾을 수밖에 없었지. 아니, 그조차도 변명이지만….”
잔잔히 깔린 음악 사이로 자카리의 허심탄회한 고 백이 스며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집중해야지만 제대 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무척이나 나직하고 조용했다.
흘러가는 말이라기엔 그의 말이 너무나 진지하였 던지라, 비앙카는 잠시 물끄러미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때의 일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저 추억을 공유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지,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자카리가 스스로를 질책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자카리가 입이 닳도록 비앙카가 열여덟이 될 때까진 안을 수 없다 되뇌기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마음에 담아 두고 후회를 곱씹을 정도로 단단한 각오였을 줄이야. 그때는 스스로가 너무 안타깝고도 분해서 눈물만 펑펑 흘려 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런 각오가 꺾인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자카리가 심각한 낯으로 은빛 속눈썹을 내리깐 채 스스로의 행동을 참회하는 사이, 비앙카는 자카리의 신념이 꺾여서 다행이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비쳤다. 비앙카는 너무 기뻐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차분하고 조곤조곤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전, 그날 당신이 용기를 내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까…. 당신이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후회하는 건 저만으로도 충분해요. 일이 제대로 풀리기 까지 후회라면 진저리 칠 정도로 많이 해서, 당신마저도 후회하길 바라진 않아요.”
다시 노래가 빨라졌다. 비앙카는 마치 사슴이 뛰노는 듯한 발걸음으로 자카리에게서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졌다. 그를 스쳐 지나가며 눈을 휘어 웃는 비 앙카의 모습에 자카리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비앙카가 짓궂게 물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는 좀 어때요? 당신 여자다, 확신을 얻게 되니 안도 되던가요? 사실, 당신 표정이 항상 엇비슷해서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끔은 잘 모르겠거든요.”
“그날 이후로? 확신은 무슨. 더 불안해졌지. 내 눈엔 이렇게 어여쁜데, 남들 눈에는 안 예뻐 보일까 싶어서.”
비앙카에게 고정되어 있던 자카리의 시선이 흘끗 주변을 살폈다. 갑작스러운 자카리의 행동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주변 사내들의 시선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흘끔흘끔 비앙카를 바라보고 있던 사내들은 자카리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며 후닥닥 고개를 숙였다. 우스운 것은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 었다.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도 똑같소. 당장 당신을 안아 들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거든. 지금 얼마나 많은 주변 사내들이 그대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있소?”
비앙카가 뒤늦게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사내 들은 시선을 갈무리한 뒤였다. 비앙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자카리는 손을 뻗어 비앙카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엄지가 비앙카의 눈 꺼풀 밑부분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자카리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나직이 속삭였다.
“질투로 미칠 것 같아.”
한때는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생소해하며 입에 담기를 머뭇거렸던 사내가 이제는 들끓는 질투에 눈을 희번덕였다. 동공과 홍채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짙은 자카리의 검은 눈동자는 유난히도 깊어 보였다.
평소엔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지만, 아주 가끔 그의 눈동자에 틈이 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은 비앙카를 꽁꽁 휘감을 정도로 진득했다. 지금처럼.
비앙카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입이 바싹 마르며 다리가 떨렸다. 그의 이런 모습과 마주하면, 그녀의 몸은 언제나 경비가 흐트러진 채 무장 해제되곤 했다.
찰나의 순간, 음악도 사람들의 소음도 지워졌다. 둘만이 마주하고 있는 세계. 둘은 상대에게 사로잡힌 듯 한참을 우뚝 서서 서로를 응시했다. 춤을 주던 사 람들은 그 둘을 피해 빙글빙글 스쳐 지나갔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자카리였다. 자카리는 이내 감정을 잘 갈무리한 채, 눈을 휘어 웃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확실히 잘 참아 누를 수 있게 됐지. 제법 아무렇지도 않아 뵈지 않소?”
그러면서 씩 웃는 자카리의 모습이 제법 능청스러웠다. 아까의 긴장이 탁 하니 맥없이 흩어졌다.
비앙카는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꽃 봉오리가 틔워 오르는 듯 아름다워, 방금 한 말이 무색하게도 자카리는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다.
“그래도 역시, 이번에도 최대한 일찍 영지로 내려 가야겠어.”
“전하께서 못마땅해 하실 텐데요.”
“그래도 어쩔 수 없소. 따지고 보면, 이게 전부 전하께서 무도회 같은 것을 개최하셨기 때문이니까.”
자카리는 모든 핑계와 이유를 오델리에게 돌렸다. 여러모로 충성스러운 신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기필코 그리하겠다는 듯,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여러 번 중얼거렸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뺨을 토닥였다. 키 차이 때문에 손을 한참을 뻗어야 닿을 수 있는 얼굴이었지만, 자카리가 허리를 숙여 준 덕에 비앙카는 한층 수월하게 그의 얼굴을 매만질 수 있었다. 비앙카가 자카리 를 달래듯 말했다.
“영지로 내려가는 건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일단 우리…. 지금 슬쩍 빠져나갈까요? 얼굴도 비췄고, 춤도 췄으니까. 사실 조금 힘들거든요.”
“그런 제안은 거절할 수가 없군.”
자카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때마침 노래도 끝났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연회장의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빠져나가고, 비앙카와 자카리 또한 그에 몸을 의탁했다.
그들은 남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움직인다 하여 움직인 것이었지만, 애초에 무도회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과 관심이 그들 부부에게 쏠려 있었기에 그들의 목적은 성공하지 못했다.
서로 딱 달라붙은 채, 부부 사이의 밀어를 나누는 비앙카와 자카리의 모습은 무척 이질적이었다. 행복한 부부의 모습에 다들 멍하니 넋을 빼놓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귀족 가문들의 결합이 결혼 장사로 인한 것이니 만큼,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모두 결혼은 의무요, 사랑은 애인에게서 찾았다.
그런 세브랑의 귀족들에게 자카리와 비앙카의 달콤한 사이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때문인지, 한동안 라호즈에는 궁정 연애를 하며 애인을 두는 일이 줄어들었다. 대신 부부 사이가 부쩍 가까워지곤 하며, 부부간의 금실이 좋은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당사자인 비앙카와 자카리는 상대에게 몰두하느라 그런 세브랑 사교계의 변화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혹여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일뿐인지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무도회장을 빠져나온 비앙카와 자카리는 오붓이 정원을 거닐며 사랑을 속삭였다. 만개한 장미 향이 코끝을 찌르는, 달콤한 산책이었다.
〈결혼 장사.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