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00)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00화(100/150)
루시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문밖에는 릴리가 밝은 얼굴로 서 있었다.
“마님은 안에 계셔?”
“응, 들어와.”
릴리는 침실 내로 한 발짝 들어와 세라엘을 마주 보았다.
“마님, 주문하신 선물이 모두 도착했는데 한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이제 하인들이 개별로 선물 포장을 해서 보육원으로 보낼 거래요.”
“알았어. 지금 내려갈게.”
세라엘은 가면을 침대에 내려놓고 발걸음을 옮겼다. 방을 나서기 직전, 그녀는 뒤돌아 루시를 바라봤다.
“루시, 그 가면을 짐가방에 챙겨 줄 수 있겠니?”
“이걸로 결정하시겠어요?”
“응. 당장 내일 아침에 떠나야 하니까, 옷가지와 함께 챙겨 줘.”
“맡겨 주세요. 답장도 모두 작성하셨으면 전서구를 통해서 보내 놓을까요?”
“고마워. 부탁할게.”
고개를 끄덕인 세라엘은 릴리를 따라나섰다.
침실에 혼자 남은 루시는 콧노래를 부르며 세라엘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세라엘은 황궁 무도회에서 입을 예복도 기존 드레스 중에 골라 입겠다고 했지만, 수도까지 출타하는 그녀를 가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하녀들이 일찌감치 화려한 드레스를 구비한 상태였다.
짐가방 안에 옷가지를 개어 넣던 루시가 가면도 챙기기 위해 집어 들었다.
노을빛을 연상케 하는 붉은 반가면은 금실과 영롱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몹시 신비로웠다. 세라엘이 입을 상아색의 실크 드레스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흐뭇한 미소를 짓던 루시는 곧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가면의 설명이 적힌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흐음….”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 가면의 주제는 피에 젖은 복수였다. 그 외에 별다른 설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루시는 가면을 종이에 잘 포장해서 짐가방에 넣었다.
***
수도 힌델은 제국의 중동부에 위치한 대도시였다.
황궁을 기준으로 위로는 광활한 숲이 지붕처럼 도시를 감쌌고, 동쪽으로는 푸르른 바다가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궁을 떠받치듯 자리한 서민의 주거지에서는 중앙 도시 특유의 활기찬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한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황궁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더없이 아름다울 터였다.
궁정 내의 어느 후미진 복도, 로잘린은 창밖 너머 힌델을 홀로 응시하고 있었다.
기억이 존재하는 어린 시절부터 눈에 담았던 전망을 보자 언제나처럼 같은 감상이 뇌리를 스쳤다.
“고립된 감옥 같네.”
주홍빛 석양을 머금은 파도에 성의 없는 눈길을 꽂던 로잘린이 감정 없이 중얼거렸다.
“황녀 전하.”
황녀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은 갑옷을 철컥이며 다가온 기사가 투구를 벗어 예의를 표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잠시 쭈뼛거리던 기사가 하고자 하는 말을 내놓았다.
“뭐라도 드시는 건 어떨는지요. 벌써 창밖만 두 시간째 바라보고 계시기에….”
“배가 고프지 않군요.”
고개를 내저은 로잘린이 다시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은 북쪽 숲과 맞닿은 성문으로, 북방에서 제도로 들어오고자 하는 모든 이가 통과해야 할 입구였다.
그곳에선 상인의 짐 마차가 쉼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높다랗고 육중한 귀족의 마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인가요?”
“예. 성문을 지키는 위병에게서 블카노프 가문의 손님이 왔다는 전갈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까?”
“설마요. 차라리 오지 않는 편이 나을 사람들인데.”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공 부부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나. 황녀는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필립의 감시 아래 로잘린이 작성한 편지는 칼스비크로 전달되었다.
고민 끝에 괜한 야시장을 언급하며 강한 호위를 대동할 것을 언급하였으나, 오라비의 꿍꿍이를 알 수 없으니 불안한 건 매한가지였다.
만에 하나 세라엘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되면 얼마나 무거운 죄책감이 어깨를 짓누를지 가늠할 수 없었다.
심지어 변고에 로잘린이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어 있다는 걸 그 대공이 알아채면 어찌 되는 걸까.
황녀의 심경과 대조적으로 연회장에서부터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두런두런 대화 소리는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초대객들은 모두 모였나요?”
“아직입니다만 후원에서 다과와 담소를 즐기시던 귀부인들은 일찌감치 연회장으로 올라오셨습니다. 궁 곳곳에 계시던 신사분들도 집합하고 계십니다.”
늦은 오전부터 황실 행사를 위해 많은 귀족이 힌델을 방문했다.
느지막한 저녁이 된 지금, 초대장을 받은 이는 모두 궁정에 도착하여 간단한 식사를 곁들인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연회가 끝나면 본격적인 가면무도회가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블카노프 대공 부부는 아직 코빼기도 비추지 않은 상태였다.
“분란은 없었나요? 재작년에는 칼부림도 일어났었는데.”
사치와 향락을 좋아하는 귀족이 모여 말을 주고받다 보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로잘린의 질문에 기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없었습니다.”
그때, 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갑작스러운 소란에 로잘린과 기사의 고개가 잡아끈 듯 돌려졌다.
귀족 남자들이 술잔을 쥔 채 곤드레만드레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걸음걸이만으로도 취기가 얼큰히 올랐음을 알 수 있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작태를 보며 로잘린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제 생길 수도 있겠어요.”
기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귀족 남자들을 주시했다.
“칼스비크 한복판에서 황태자와 블카노프 대공이 여자를 두고 난투를 벌였다니까!”
조심성 없는 외침에 화들짝 놀란 다른 남자가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주위를 살폈다.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목소리 낮추게! 갓 결혼한 대공 부부한테 웬 망설이야.”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게 아니라고. 치정극이 따로 없었다니까? 축제가 한바탕 뒤집혀서는 보통 난리도 아니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거겠지.”
“그 대공 얼굴이 어디 가서 착각할 용모인가? 결혼식에서 두 눈으로 보고도 몰라?”
그러잖아도 솔깃한 가십은 알코올로 버무려진 입에 무척이나 쉽게 올랐다.
“내가 봤을 때 이거 보통 치정이 아니야. 황실의 누구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걸 보면 뻔하지, 뻔해.”
“대공작 부인과 황태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말인가?”
“그거지. 이제껏 블카노프 가문의 중대사에 황실이 불참한 적이 있었냐고. 정부가 결혼한다니 배알이 뒤틀리신 게야.”
“그렇담 대공도 오늘 행사에 오지 않으려나?”
“나야 모르지. 대공 부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뜬소문이 아닌 거야. 온다면 그것대로 무척 흥미로운 구경거리겠지.”
쉽사리 놀라는 법이 없는 로잘린은 크게 경악하여 어깨를 떨었다.
당사자가 들었다면 분란 정도로 끝날 발언이 아니었다. 칼스비크 축제에서 벌어졌던 그 사건이 어쩌다 저리 괴상한 소문으로 탈바꿈되었단 말인가.
차라리 황태자가 세라엘을 괴롭히다 대공에게 혼쭐이 났다는, 진실 그대로의 이야기였다면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저건 세 사람을 진흙탕에 밀쳐 뒤엉키게끔 하는 추잡스러운 소문이었다.
참다못한 로잘린이 뭐라 한마디 얹으려 한 걸음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무거운 갑옷이 척척 움직이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복도 끝에서부터 호위 기사 여럿을 거느린 황태자 필립이 연회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필립은 평소보다 유달리 미끈한 낯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귀족들은 허둥지둥 입을 다물고 예를 갖추었다.
“전하.”
“황태자 전하.”
필립은 턱 끝을 스치는 은발을 휘날리며, 불그스름한 눈으로 귀족들을 훑었다.
“음.”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귀족들은 침을 삼키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혹여 황태자가 농지거리를 들었을까 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네들이 보기에 행사는 어떠한가.”
필립이 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감탄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음식도 일품이고 악단의 공연도 훌륭합니다.”
“가면무도회는 물론 사냥제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페른의 역사 그 자체인 황궁은 언제 보아도 장엄한 곳입니다. 이리도 성대한 행사에 초대받아 어찌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필립이 입매를 비틀었다.
“로페른의 역사라. 세간에서는 황궁이 아닌 칼스비크의 성채가 제국 역사 그 자체라고들 하지.”
의미심장한 말에 귀족들은 묘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자네들, 얼마 전에 칼스비크의 결혼식에도 다녀왔었지.”
“그렇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예…?”
“로페른 황실의 건재함을 널리 알리는 엄숙한 연회와 대공의 결혼식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뜻깊은 행사라고 생각하나?”
유치할 정도로 우스운 물음에 귀족들은 말문을 잃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질문을 던진 이는 황태자고, 눈앞에 선 이도 황태자였다.
“당연히 황가에서 주최하는 행사입니다. 사사로운 소사 따위가 감히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는지조차 의문입니다.”
“동감합니다. 궁정에서 열리는 강아지 생일 파티도 칼스비크의 결혼식보다 위대할 것입니다.”
“푸흡! 그렇단 말이지.”
아첨이 마음에 든 듯 필립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이번 행사에선 내가 연설을 할 예정이니 자리 비우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게. 자네들의 열띤 호응도 기대하고 있겠어.”
“맡겨만 주십시오, 전하.”
필립이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물론 놈이 오기 전까지 연설은 시작하지 않을 예정이지만.”
그는 곧 시종을 바라보며 연회장 문을 고갯짓했다. 문이 열리자 악단의 선율과 웃음소리가 한데 얽힌 소음이 퍼져 나왔다.
필립이 그 안으로 자취를 감추자마자 남자들은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 전까지 그들이 입방아를 찧던 낭설에 당사자가 대놓고 도장을 찍어 주는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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