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02)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02화(102/150)
말로만 들었던 황궁은 시커멓고 뾰족뾰족한 대공성과는 확연히 달랐다.
백색과 연노란색 돌로 조화롭게 이루어진 성벽은 화사했고, 그 위에 자리한 십수 개의 지붕은 연한 청록색으로 테두리마다 번쩍이는 황금이 둘려 있었다.
가느스름하게 좁힌 눈으로 궁을 훑던 세라엘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줄지어 나열한 마차에서 루시와 렉터, 악셀이 따라 내리고 있었다. 카에드의 부하들도 가벼운 몸짓으로 하나둘 뛰어내렸다.
“다들 수도까지 따라왔는데 너무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고생할 일은 없을 겁니다. 갈까요?”
카에드가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청하자, 그녀는 그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었다.
상앗빛을 띠는 돌계단을 올라 황궁 내부로 들어서는 입구에 다다랐다. 문 앞에는 놀랍게도 그들을 마중하러 나온 이가 있었다.
세라엘은 낯익은 얼굴을 바로 알아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황녀 전하.”
은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을 대동한 로잘린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로페른 황궁에 온 것을 환영해요, 대공작 부인. 다시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요.”
“저도 전하를 다시 보게 되어 기뻐요.”
대공성에서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면 황녀의 얼굴이 조금 수척해 보였다.
그때도 새벽 비를 쫄딱 맞은 상태라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얼굴이 더 상한 걸까.
세라엘은 필립이 이보다 더 천박할 수 없을 만큼 로잘린을 윽박지르던 모습을 떠올렸다. 혹시 그 간악한 무뢰배가 이복 누이를 괴롭혔을까.
남들 보는 앞에서도 상스러운 언행을 서슴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더할 것이다.
세라엘은 조심스럽게 로잘린의 손을 잡았다. 흠칫 떠는 손이 무척이나 차가웠다.
“보내 주신 편지를 읽고 정말 기뻤어요. 사정이 있어 힌델에 올 계획은 없었는데, 전하의 편지를 받고 행사에 참석하기로 결정했거든요.”
원래는 불참할 계획이었다는 말을 듣자 로잘린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마워요. 칼스비크에서부터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여정이 힘들지는 않았나요?”
“오는 길에 충분히 휴식을 취해서 괜찮았어요.”
“나쁘지 않았다니 다행이에요. 가면무도회도 꽤나 기운 빠지는 일이라 체력을 아껴두는 게 좋을 거예요. …환영합니다, 대공.”
로잘린은 뒤늦게 카에드를 향해 인사를 보냈다.
그는 대답 대신 출입구 주변을 훑고 근처에 선 위병 수를 가늠하듯 관찰했다. 마치 적진을 탐색하는 척후병 같은 눈빛이었다.
묘한 정적이 흐르자 세라엘은 팔꿈치로 슬쩍 그를 찔렀다. 고개를 내려 세라엘을 내려다보던 카에드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문 앞에서 뜸 들이지 말고 처소로 안내하십시오.”
“흠흠!”
절대 공손하다고 할 수 없는 태도에 세라엘은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혹시 처소에 들러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무도회는 아직이지만 모두 간단한 음식을 들며 연회를 즐기고 있어요.”
로잘린은 한숨을 삭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머무는 궁에 빈 침실이 여러 개 있어요. 그곳으로 안내할게요. 정리를 마치고 연회장으로 오시면 되겠어요.”
“어째서 당신의 거처로 가는 겁니까?”
카에드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의문을 표했다. 로잘린은 다소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다른 초대객은 황궁 내의 귀빈관에서 지내겠지만, 대공과 부인께서는 제 손님이니 제 궁으로 모시는 거예요. 귀빈관은 오라버니의 궁과 가깝기도 하여 불편하실까 봐서요.”
로잘린은 고개를 살짝 빼고 그들 뒤에 선 일행을 바라보았다. 모로 봐도 호위로 추정되는 사나운 남자들과 하녀가 서 있었다.
귀족을 따라온 수행원은 황궁 하인들이 지내는 곳에 처소를 잡고 그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명목상의 초대일지라도 로잘린은 대공의 수행원을 황궁 하인과 함께 지내게 할 순 없었다. 최근 황실 재무에 간섭하기 시작한 필립이 하인에게 들어가는 예산을 대폭 삭감한 뒤로 그들이 받는 대우가 몹시 나빠졌던 것이다.
“수행원의 숙소도 황녀궁에 마련할게요. 대공께선 그편이 더 안심되실 테니까요.”
특별한 환대에도 카에드가 여전히 못마땅한 낯을 하자 세라엘이 나서서 대신 감사를 표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궁은 금남 구역이지만 대공 부부께 예외를 두는 것이니, 혹시라도 다른 손님께 말이 새어 나가는 일 없도록 주의해 주세요.”
“알겠어요.”
“처소로 안내할게요. 따라오세요.”
로잘린은 미리 준비된 궁내 이동용 마차로 그들을 이끌었다. 마차는 황궁 중앙에서 벗어나 널따란 전정을 가로지른 후, 샛길로 빠져야 나오는 황녀궁으로 향했다.
***
해바라기.공금
안내받은 침실은 깨끗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손님 대접을 위해 정돈은 물론 이곳저곳에서 각별히 신경을 쓴 티가 났다. 그들을 황녀궁에서 지내게 하려던 호의가 즉흥적인 결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기 테이블 위에 우산이 있어요.”
세라엘의 머리를 다시 매만져 주던 루시가 어딘가를 힐긋거리며 말했다.
“우산?”
“연두색 우산이에요. 황녀 전하께서 왜 우산을 놓아두셨을까요?”
세라엘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드렸던 우산인가 봐. 전하께서 대공성을 떠나시던 날에 비가 많이 왔었거든. 다시 만난 김에 돌려주려고 거기 놓아두신 듯해.”
“그렇구나. 참 온화하고 인자하신 분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문득 따가운 눈길을 감지한 루시가 화장대의 거울을 통해 카에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조각상처럼 미동 없이 침대 발치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무릎에 두 팔꿈치를 올리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앉은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불량해 보였다. 루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주, 준비는 다 됐어요.”
“고마워. 힌델까지 따라와서 고생하는구나.”
당연한 노고를 칭찬받자 루시가 겁먹은 기색을 지우고 주먹을 꼭 쥐었다.
“천만에요! 아가씨가 계시는 곳이면 불지옥이라도 따라갈 거예요. 물론 지옥에 가실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재차 카에드의 눈치를 살핀 루시가 황급히 덧붙였다. 세라엘은 싱겁게 웃으며 카에드를 뒤돌아봤다.
“준비는 다 끝났대요. 이제 연회장으로 갈까요?”
시종일관 마뜩잖은 표정을 하고 있던 그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성큼 일어났다. 곧 서늘한 눈이 루시를 향했다.
“잠시 나가 있어라.”
주인의 명령에 루시는 꾸벅 몸을 숙이고는 재빨리 침실 밖으로 나갔다. 세라엘은 의아한 눈으로 루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요?”
“…….”
그와 마주 서자마자 커다란 덩치가 그녀를 덮치듯 끌어안았다. 급작스러운 포옹에도 세라엘은 그의 등허리를 안고 토닥였다.
요즘 들어 그가 위로를 구하듯 파고드는 일이 잦아졌다.
힌델에 오기 전부터, 정확히는 황태자와 만나고 돌아온 날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마음 쓰이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황궁이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에 불안감을 표출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세라엘은 자신 때문에 내키지 않은 결정을 내린 그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더 깊이 껴안았다.
머지않아 상체를 느릿하게 뒤로 물린 카에드가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고 시선을 맞대었다.
“떠나기 전에 약속했던 규칙은 명심하고 있겠죠.”
“네.”
고개를 끄덕인 세라엘은 손가락을 접으며 착실히 말을 이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기. 음식은 남들이 먹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먹기. 궁에서 혼자 돌아다니지 않기. 남편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기. 화장실에 가기 전에는 남편에게 먼저 알리고 루시를 동반하기.”
“잘했습니다.”
그는 상을 주듯 짧은 입맞춤을 내렸다.
줄줄 읊고 보니 기함할 규칙이었다. 모자랄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저 완벽한 남자가 중증 의처증 환자는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카에드가 얼마나 염려하고 있는지를 고려해 보면 못 들어줄 규칙도 아니었다.
화장실 앞까지 따라오겠다는 초기 규칙을 바꿔 달라 요청했더니, 마지못해 받아들여 주는 융통성도 보였다.
“무도회까지 왔으니 후회 없이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편지 나누었던 귀부인들도 만나고 싶었을 텐데 좋은 시간 보내 봐요.”
“고마워요. 규칙도 염두에 두고 있을게요. 남편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기.”
카에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규칙을 거듭 읊자 그제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사과처럼 어여쁜 이마에 입술을 제법 오래도록 내리눌렀다.
이제 연회장으로 갈 시간이었다.
***
황실에서 열리는 행사였으나 초대객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주제는 단연 블카노프 대공 부부였다.
유리온실에서 펼쳐진 찬란한 결혼식도, 냉혈한이나 다름없던 남자가 사랑에 빠진 일도, 그의 마음을 앗아간 신부가 크게 특별한 점이 없는 여자란 사실 모두 세간의 관심을 독식하는 요소뿐이었다.
그런 대공 부부가 황실 연회에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은 솔깃한 가십거리였다. 겨울 축제에서부터 퍼진 너저분한 소문 때문이었다.
“연적이라니, 정말일까요?”
부채로 입을 가린 귀부인 중 하나가 조심스레 소곤거렸다.
“쉿! 누가 들으려면 어쩌려고요.”
주어가 없는 말도 단박에 알아챈 오웬 백작 부인이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아까부터 치정이니 연적이니 하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황녀 전하가 귀신같이 나타나서 눈치를 주고 다닌다고요.”
“아무래도 오라비가 얽힌 소문이니….”
“어쨌든 말도 안 되는 망발이에요. 술 취한 한량들이 멋대로 지껄이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어요.”
“저도 믿지 않아요. 결혼식에서 대공 부부의 노골적인 애정 행각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 나라고요.”
몸을 낮춘 귀부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였다.
“그렇지만 최근 두 분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라더군요. 그것도 칼스비크 한복판에서요. 목격자만 수십 명이라고 들었어요.”
“소년 시절부터 알던 사이라니 치고받고 싸울 수야 있겠죠. 우리가 뭘 알겠나요. 뭐든 대공작 부인과 연결시키지는 말자고요.”
“하지만 가면무도회가 곧 시작할 텐데 도착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답장에는 분명 참석하겠다고 하셨거든요.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소문이라….”
그 순간, 둔중한 소리와 함께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느리게 벌어지는 문짝 사이로 모습을 내비친 두 남녀는 모든 초대객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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