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03)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03화(103/150)
장내에 퍼지던 말소리가 가위로 자른 듯 뚝 끊겼다. 악단의 연주가 아니었다면 몹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을 터였다.
“…드디어 왔네요.”
모 귀부인의 속삭임을 기점으로 귀족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기심이 그득 어린 눈길은 연회가 한창일 때 등장한 대공 부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세라엘은 카에드의 손을 잡은 채 우아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연회장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보석 같은 샹들리에 아래 펼쳐지는 연회가 무척이나 화려했다.
“불편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주변을 둘러보며 걷던 세라엘의 머리 위로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대었다.
“괜찮아요. 왜요?”
“맥박이 조금 빨라서요. 호흡도 가쁜 것 같고.”
카에드가 맥박을 가리키듯 세라엘의 손목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세라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떨려서 그런가 봐요. 황궁도 가면무도회도 다 처음이라서요.”
“안에다 또 쓸데없는 속옷을 입은 건 아니고?”
“코르셋이라면 안 입었어요.”
“확실해요? 오늘은 당신 속옷을 찢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당신이 안 찢으면 될 일이잖아요.”
불퉁한 얼굴로 답한 세라엘이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너른 연회장 내부에는 다채로운 드레스와 정복을 입은 귀족들이 무리 지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카에드를 홀린 듯 응시하는 여러 쌍의 시선은 다분히 노골적이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부드럽게 웃던 결혼식 때와 달리 예민해 보이는 기류가 그의 번듯한 외양을 돋보이게 했다.
“사방에서 당신을 힐끔거려요.”
세라엘이 몸을 기울이고 속삭이자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거슬려요?”
“네. 아주 샅샅이 훑어보는데요. 신경 쓰이지 않아요?”
“난 당신을 보는 눈이 더 거슬리는데.”
카에드는 인파 틈에서도 세라엘에게 향한 시선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호기심을 넘어 묘하게 번들거리는 사내의 눈빛이 어떤 감정을 품었을지 모를 리가 없었다.
“뻔히 남편까지 대동한 여자를 무슨 배짱으로 쳐다보는 건지.”
카에드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차림을 훑었다.
별다른 장식 없이 단정하게 빗어 내린 백금발은 별빛처럼 찬란했고, 살랑거리는 샴페인 색의 이브닝드레스는 그 안에 자리한 육감적인 곡선을 은근하게 드러냈다.
시선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차림에 그는 짓씹듯 으르렁거렸다.
“가면을 쓰고 나면 더 노골적으로 변하겠죠. 이거 생각할수록 불쾌해서 안 되겠습니다.”
“뭘 하시게요…?”
“저 분수도 모르는 치들의 눈알을 찔러서 두 번 다시 당신을 쳐다보는 일이 없도록….”
세라엘은 다급히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았다. 목소리 크기도 낮추지 않고 신랄하게 내뱉던 그가 곧장 얌전해졌다.
치켜뜬 눈꺼풀 아래로 서늘하게 드러났던 삼백안이 주인을 보는 개처럼 유순하게 반짝였다. 세라엘은 짐짓 엄중한 낯으로 그를 타박했다.
“누가 들을까 무서워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알았습니다.”
농담이 아니었다고 말하려던 카에드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에 닿았던 보드라운 촉감 덕분에 불쾌한 심기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대공, 대공작 부인.”
때마침 그들 곁으로 다가온 로잘린이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세라엘 또한 살짝 허리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황녀 전하. 아주 성대한 연회네요. 전하의 손님으로 참석하게 되어 영광이에요.”
“천만에요. 부인의 결혼식도 무척 아름답고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들었어요. 두 눈으로 보지 못해 아쉬워요.”
로잘린은 연회장 한 편에 있는 기다란 시식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시장하지 않으신가요?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에 요깃거리라도 좀 들어요.”
“좋아요.”
세라엘은 황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카에드는 그녀의 꽁무니에 붙어 졸래졸래 따라갔다.
여자들이 식기에 음식을 담아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시도 세라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그런 그를 로잘린은 다소 의문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이렇게 큰 연회에서는 같은 성별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는 게 일반적이었다. 안면이 있는 귀족 사업가나 북부의 다른 영주를 두고 세라엘 옆을 차지한 카에드가 의아할 따름이었다.
심지어 그는 세라엘이 덜어 온 갑각류 구이 요리의 껍질을 손수 까 주기 시작했다. 번거롭지도 않은지 희고 통통한 살코기를 발라 바지런히 그녀의 접시 위에 얹어 주었다. 세라엘은 그것을 무척 자연스럽게 입으로 가져갔다.
일상에서 수없이 행해진 일이란 걸 알 수 있는 동작이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로잘린이 남몰래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한때 필립이 자신을 이용하여 저 순애보적인 남자를 꾀어낼 계획을 짠 것이 돌이킬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결혼식에는 왜 안 오셨어요?”
불쑥 질문을 던진 세라엘이 생각에 잠긴 로잘린을 현실로 데리고 왔다.
“결혼식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셔서 참석하실 줄 알았거든요. 겨울 축제에 오신 걸 보면 줄곧 칼스비크에 계셨던 것 같은데, 예식 당일에 어디 편찮으셨던 거예요?”
“…아뇨. 갑작스럽게 사정이 생겨서 가지 못했어요. 드레스를 입은 부인을 보지 못해 무척 아쉬웠답니다.”
“그랬군요. 피로연에서 담소를 나누어도 좋았을 텐데 저도 아쉬웠어요.”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로잘린이 카에드를 향해 힐긋 시선을 던진 후 말을 이었다.
“로잘린이라고 불러요.”
“네?”
“나를 경칭 없이 불러 주었으면 해요. 부인이 괜찮다면 나도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요.”
뜻밖의 제안에 눈을 둥그렇게 뜨던 세라엘이 입매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도 사양하지 않을게요, 로잘린.”
“친우가 된 것 같고 좋네요. 또래의 여성이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은 난생처음이에요.”
로잘린이 말을 끝맺자마자 카에드로부터 가시처럼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제 부인과 우의를 다지는 황녀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로잘린도 마찬가지였다. 화기애애한 기류 속에 자리한 커다랗고 시커먼 덩치가 꽤나 신경이 쓰였다.
세라엘과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녀는 불청객처럼 여인들의 대화에 낀 카에드를 쫓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물리적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세라엘.”
“네.”
“기혼인 세라엘이 나보다 인생 선배잖아요. 친우가 된 기념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황녀 전하… 로잘린보다 인생 선배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로잘린은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문지른 후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성의 초야는 무척 고통스럽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새우 살을 레몬 소스에 찍으려던 세라엘의 손이 석상처럼 굳었다. 동시에 껍질을 까 주고 있던 카에드의 동작도 우뚝 멈추었다.
“어… 초, 초야요…?”
“나 또한 길어야 1년 내로 혼례를 치를 거예요. 불가피하게 거쳐야 할 밤이 두려우면서도 궁금해서요. 기절할 정도의 격통은 물론 살인 사건을 방불케 하는 혈흔이 남는다는데 모두 사실인가요?”
로잘린은 모르는 수학 문제라도 묻듯 여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반면 세라엘의 목 언저리에서 높은 온도의 열이 왈칵 번졌다. 항상 듬직하기만 했던 카에드의 존재가 지금처럼 불편한 적은 없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오갈 수 있는 흔한 주제였으나, 그 초야를 함께 보낸 상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옆에 앉아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경험치가 높은 부인이라면 태연스러웠겠지만 세라엘은 아직 그럴 깜냥은 못 되었다.
“글쎄요. 고통이라면 그랬던 것 같기도… 며칠 밤이나 이어지면 확실히 버거운… 아, 아니, 꼭 아프기만 했던 건 아닌데….”
당황한 세라엘이 횡설수설 나불거렸다. 로잘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대며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며칠 밤이나 이어진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보통 초야를 며칠씩이나 치르나요?”
“…아, 아뇨. 일반적이진 않을 거예요.”
“아프지만은 않았다니 그것도 처음 듣는 얘기네요. 유모나 시녀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로 고통스럽다던데요.”
“저도 여러 번 울었어요. 아파서 운 건 아니었지만요.”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는 자각에 세라엘의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로잘린이 상체를 숙이고 카에드를 응시했다.
“어째서 곤혹스러워하나 싶었더니 옆자리에 부군이 계셨군요.”
“…….”
“미안해요, 세라엘. 여자들끼리 나누는 담소에 신사분이 떡하니 동참하고 계셨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동참한 적 없습니다.”
카에드는 로잘린을 향해 험악한 시선을 보냈다. 자신을 세라엘 곁에서 밀어내려는 속셈이 훤히 보여 속에서 이가 갈렸다. 로잘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인 곁에 착 붙어 계시니 동참하신 거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어요.”
“남편이 아내 옆을 지키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편합니다. 어찌 신사분 앞에서 남사스러운 이야기를 할 수가 있나요?”
“난 불편하지 않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얘기나 하십시오.”
세라엘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공방이 제법 치열했다. 로잘린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그를 향해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여자인 대공작 부인과 내가 불편해요. 미안하지만 자리를 좀 비워 주시겠어요?”
“미안하면 무리한 부탁은 하지 마십시오.”
“설마 부인과 부인 친우의 은밀한 대화를 엿듣고 싶으신 건 아니겠지요.”
“지금 누굴 의처증 환자 취급하는 겁니까?”
카에드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칠 듯한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