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05)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05화(105/150)
세라엘은 한 겹 씌워진 가면 하나로 낯선 분위기를 풍기는 카에드와 눈을 맞추며 사뿐사뿐 발을 디뎠다.
무도회에서 여자와 발을 맞춘 경험이 많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그녀의 몸을 인형처럼 다루며 능숙하게 춤을 주도했다. 그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더니 매끄러운 곡선처럼 동작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어찌나 즐거운지, 카에드가 두 손으로 허리를 잡아 공중에 살짝 들어 올려 주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웅장한 서커스를 연상케 하는 신비로운 왈츠에 맞춰 유유히 움직이고 있으니 무도회장에 그와 단둘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세라엘을 한 바퀴 휙 돌리고서 제 가슴팍에 안은 카에드가 조용히 속살거렸다.
“혼자 오셨습니까?”
아무래도 상황극이 흥미로운 사람은 세라엘뿐이 아닌 듯했다. 혹은 가면을 쓴 카에드의 정체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보고 싶다는 그녀의 낭만을 들어주기 위해서일지도.
세라엘은 입가를 끌어 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남편이 동행했어요.”
“내 눈엔 안 보이는데.”
“친우들과 어디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거예요. 그이는 술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몹쓸 놈이군요. 부인이 다른 남자와 몸을 맞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술독에 빠져 있다니.”
귓전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 세라엘은 어깨를 움츠렸다.
“신사분과 춤을 추는 것 정도야 그이도 흔쾌히 허락해 줄 거예요.”
“우리가 무도회장에서만 뒹굴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것도 허락해 줄 것 같습니까?”
“…그건 비밀로 하는 편이 좋겠네요.”
왈츠는 조금씩 격정으로 향해갔다. 세라엘을 안고 돌리는 그의 동작도 과감해지고 있었다. 맞잡은 손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온이 시나브로 달아올랐다.
느리게 상체를 숙인 그가 세라엘의 귓가에 낮은 바람을 담은 목소리를 흩트렸다.
“부인께서 때린 곳이 지금도 아립니다.”
“춤 상대도 해 드리고 있는데 또 언급하시네요. 뒤끝이 긴 편이신가 봐요.”
“하마터면 생식 기관이 파열될 뻔했는데 뒤끝이 남을 수밖에요.”
노골적인 말장난에 세라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여성의 작은 주먹에 망가질 정도로 약하실 것 같지는 않은걸요.”
“멀쩡한지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글쎄요….”
“미혼이었으면 아예 책임져 달라고 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책임은 못 져 드리겠지만….”
그녀는 카에드의 옷깃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사과라도 해 드릴까요?”
의미심장한 되물음에 그가 입을 우뚝 다물었다. 둘 사이에 오갔던 사과는 단순히 목소리로 전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어느 방향으로든 해석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검은 가면 아래 자리한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파도쳤다. 세라엘을 뚫어지듯 직시하던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와중에 흥분하는 나도 참….”
“…….”
“이리 와요.”
카에드는 세라엘의 손을 붙잡고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세라엘은 춤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해 붕 뜬 마음으로 그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쾅, 거대한 문이 닫히면서 등 뒤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꿈결처럼 아스라했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듯 빠른 걸음으로 어둑한 복도를 걷던 카에드는 곧 거대한 돌기둥 뒤로 그녀를 밀어 세웠다.
열린 창문으로부터 밤벌레 우는 소리가 쏟아졌다. 그새 가빠진 호흡으로 가슴을 오르내리던 세라엘이 그의 검은 가면 가까이 손을 뻗었다.
벗겨낸 가면 속 카에드는 몇 번이고 그녀를 안고 휘두른 사람 치곤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리창을 투과한 달빛을 내리받고 나서야 그의 입술이 조금 벌어지며 헛숨이 흘러나왔다.
카에드가 손을 내려 세라엘의 붉은 가면을 벗겨내자 두 사람은 본래의 낯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세라엘은 보름달처럼 반짝이는 남자의 눈동자에 매혹되어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도회장에서부터 벗기고 싶었는데 참았습니다.”
“가면을요? 아니면….”
“가면이죠.”
세라엘의 오른손등에 입술을 내리누른 그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천진한 얼굴을 하고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세라엘은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 얼굴을 보고 싶었으면 아까 벗기지 그러셨어요.”
“가면무도회 도중에 타인에 의해서 가면이 벗겨지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는 미신이 있어서요.”
“허황된 미신을 믿으시는 건가요?”
“믿지 않습니다. 불행의 화근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고 싶을 뿐이지.”
“…….”
뼈가 있는 말을 듣고 나서야 세라엘은 마법이 풀린 것처럼 몽롱한 기분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낮은 숨을 내리 쉬며 속눈썹을 깜박였다.
달빛을 받은 얼굴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입을 맞추었다. 카에드는 짧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을 잠시간 응시하다 그녀의 허리를 으스러뜨릴 듯 끌어안았다.
기둥이 가로막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숨결이 얽혀든 건 부지불식간이었다. 세라엘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뒤덮은 그는 깊은 곳에 고인 자그마한 숨결까지 모조리 앗아갈 기세로 파고들었다.
연회장에서부터 번져 나오는 몽롱한 왈츠가 마치 다른 세상의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지그시 감은 세라엘의 눈 아래로 속눈썹이 파르르 날갯짓했다. 황홀함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배덕감 같은 것이 한데 얽혀 머릿속이 팽팽 어지러웠고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턱을 비틀면서 도톰한 입술을 짓뭉개던 카에드가 문득 입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세라엘은 금세 끊어져 버린 타액의 끈을 초점 잃은 눈으로 응시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
“어….”
두 개의 기둥 사이에는 로잘린과 그녀의 기사가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으로 헝클어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세라엘은 흐트러진 옷자락을 갈무리했다.
“화, 황… 로잘린.”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가면이라도 뒤집어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욕망에 눈이 먼 남녀가 황궁 복도에서 일을 치를 때도 있다던 로잘린의 말에 남사스럽다며 질겁해 놓고 이게 웬 모순이란 말인가.
“방해해서 미안해요. 그….”
난데없이 부부의 사생활을 목격한 로잘린이 얼굴을 붉히고 턱을 긁적였다. 기사는 괜히 허공 어딘가를 보며 짧게 헛기침했다.
“곧 초대객을 위한 감사 인사와 짧은 연설이 시작될 예정이라서요. …혹시 침실로 돌아갈 계획이었나요?”
“아니에요. 방금 막 연회장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세라엘이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쓸며 뻔한 거짓을 고했다. 똑같이 낯부끄러운 짓을 하다 들킨 카에드는 태연한 표정으로 가면을 집어 그녀의 얼굴에 씌워 주기 시작했다.
머리통을 끌어안듯 손을 둘러 뒤통수에서 끈을 교차해 주는데, 자세 때문인지 밀회를 들키고도 키스를 계속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로잘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회도 막바지에 다다랐으니 정 피곤하다면 일찍 돌아가도 좋아요. 의례적인 연설이라서요.”
“연설은 로잘린 혼자 하는 건가요?”
“맞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오라버니가 맡았는데….”
필립이 언급되자 로잘린이 머뭇거리며 카에드의 눈치를 살폈다. 카에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라엘의 삐죽 튀어나온 머리칼을 매만져 주고 있었다.
“크게 말실수를 한 뒤로 폐하께서 공식 석상에서의 개회사나 인사는 내가 전담하라 이르셔서요.”
“아…. 로잘린의 연설이라면 한번 들어 보고 싶어요. 처소로 돌아가기 전에 귀부인들한테 잘 자라는 인사도 하고 싶구요.”
“그럼 연회장으로 갈까요?”
“네.”
세라엘은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을 얼굴을 가면 뒤에 숨기며 앞장서 걸었다. 성큼 따라선 카에드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바람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다시 돌아온 연회장 안에서는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로잘린이 단상에 올라서자 연주가 잦아들었고, 하인이 종을 울려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오늘 행사를 위해 황궁을 방문해 주신 초대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로잘린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세라엘은 카에드와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다소곳이 앉아 콩닥거리던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특히 먼 칼스비크에서부터 걸음을 해 준 블카노프 대공 부부께 감사를 드리며….”
많은 청중 앞에서도 황녀는 긴장한 내색 없이 차분하게 연설을 이어 나갔다. 세라엘은 새삼 감탄하며 로잘린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세라엘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카에드는 멀리서 회색 민무늬 가면을 쓴 중년 남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가 밀로즈 후작이라는 걸 단박에 눈치챘으나 구태여 세라엘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가면을 쓴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찾는 사람이 있나 본데, 그게 누가 되었든 세라엘이 듣기에 달가운 일은 아닐 터였다.
“모쪼록 행사를 즐기는 데 모자람이 없길 바라며, 황실의….”
“지루한 연설은 그쯤 할까?”
갑작스럽게 장내에 울린 목소리가 연설을 이어가던 로잘린의 말을 잘랐다. 황녀는 물론 모든 귀족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뱀의 얼굴과 오돌토돌한 비늘까지 재현한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가 거만한 걸음걸이로 오고 있었다. 곁에 앉은 카에드가 그녀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고지식한 내 누이는 이따금 연회의 흥을 깨뜨리곤 하지. 오늘처럼 뜻깊은 날에 그래선 안 되지 않겠나.”
로잘린은 황제의 명을 깨고 단상에 올라선 오라비를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필립은 초대객들을 눈짓하며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뭐 하느냐? 당장 비켜서지 않고.”
“…….”
“고집부리기는.”
필립은 로잘린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단상 가운데에 섰다. 그는 귀족들을 향해 두 팔을 넓게 벌렸다.
“뜻깊은 날일세. 지고한 비아테 황가와 로페른 제국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거행된 행사니까.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호응을 약속했던 귀족 남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사냥제도 마찬가지야. 이 행사가 지닌 의의를 떠올리면 엄숙한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것이 옳지만, 짐승의 모가지에 총탄을 박아 넣는 일을 두고 어찌 들뜨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맞는 말씀입니다!”
허연 뱀 가면 안의 붉은 눈이 카에드와 세라엘이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그래서 내가 재미난 제안을 하나 해 볼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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