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07)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07화(107/150)
“…….”
거듭 세라엘이 거론되자 카에드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필립을 응시했다. 필립은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 나는 관대한 사람이라 여성도 사냥에 동참하는 것을 허락하거든.”
세라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냥터에 부인을 데려가는 일이 전무한 건 아니었으나, 필립의 입에서 나온 제안이니만큼 더러운 속셈을 엿본 기분이었다. 카에드 또한 같은 생각이었던 듯 바짝 들어 올린 삼백안에서 날카로운 적의가 드러났다.
때마침 단상에서 내려온 로잘린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필립은 그녀를 턱짓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 누이도 형편없는 사격 실력으로나마 참가한 적이 있어. 자네 부인에게 총 한 자루 쥐여 주면 다람쥐라도 잡아서 북부 측에 힘을 실어 줄지 누가 알겠는가.”
노골적인 야유에 카에드는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들짝 놀란 세라엘이 그의 팔을 껴안듯 붙들었다. 당장이라도 필립의 목을 틀어잡을 기세에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필립은 소리 없이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왜 이리 민감하게 반응해? 내기에서 질까 봐 정말 겁이 난 거야? 자네가 북벌 중에 잡아 죽인 사냥감만 수백이 넘는다면서.”
“사냥감이 인간이었다는 말은 못 들었나 봐.”
연회장 내에 서릿발 같은 침묵이 흘렀다. 고저 없는 카에드의 저음이 음산하게 말을 이었다.
“난 짐승을 고의로 풀어 놓고 쫓는 광대 짓에는 흥미 없거든.”
카에드는 불길할 정도로 조용히 내뱉었다.
“혹시 몰라. 누군가 뱀 가면을 쓰고 몸소 내 사냥감을 자처하면 어울려 줄지.”
“……!”
필립의 드러난 목에 핏대가 곤두서며 벌건 열이 올랐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두 번씩이나 망신을 당했다는 자각에 그는 분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주변 시선이 있으니 바락바락 화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필립은 그저 노기에 가득 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늘 무도회는 여기까지입니다.”
그 순간, 필립 옆에 선 로잘린이 단호한 목소리로 팽팽한 공기를 갈랐다.
“초대객 여러분은 처소로 돌아가 주세요. 가면무도회는 사냥 대회의 전야제로 내일 저녁에도 진행될 예정입니다.”
필립이 황녀를 홱 노려보며 조용히 이를 드러냈다.
“누구 마음대로 해산하는 거야? 아직 대공이 사냥제에 참가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어!”
“이제 그쯤 하세요!”
로잘린이 전에 없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불참하겠다는 답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대공의 출전 여부를 그리도 물고 늘어지시는 건가요?”
난생처음으로 제게 반항하는 누이의 태도에 필립은 할 말을 잃고 벙찐 낯을 했다.
그 틈을 타 하나둘씩 일어난 귀족들은 슬금슬금 연회장을 떠나기 시작했고, 카에드는 그들보다 먼저 세라엘의 손을 잡고 복도로 향했다.
세라엘은 성큼성큼 앞장서 걷는 그를 달려가다시피 따라야만 했다. 그녀를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일념이 그득 어린 아귀힘 때문에 손가락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카에드…!”
참지 못하고 신음과 함께 내뱉자 카에드가 우뚝 멈춰 서서 세라엘을 돌아보았다. 아직 격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거친 손짓으로 제 가면을 벗고 세라엘의 것도 벗겨 냈다.
드러난 얼굴을 마주하자 조금 진정이 된 듯 그가 숨을 들이켜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아뇨…. 사과하지 마세요.”
“…….”
“제 손에 사냥총이 있다면 다람쥐가 아니라 독뱀을 겨냥했을 거라고 되받아칠 걸 그랬어요. 가면 속 표정이 볼 만했을 텐데.”
세라엘은 그의 뺨을 매만지며 일부러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카에드는 웃지 않고 잠잠한 눈으로 그녀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때, 누군가 종종걸음으로 그들을 뒤따라왔다.
“대공 전하!”
헉헉거리며 달려온 밀로즈 후작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카에드는 살벌한 눈빛으로 후작을 보다가 다시 세라엘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목전에서 무시당한 후작은 당황스러워하다 그들을 따라잡으려 후다닥 달려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듣기 싫으니 돌아가십시오.”
“잠깐이면 됩니다만…! 전하!”
싸늘한 일갈에도 후작은 끈질기게 두 사람을 따라왔다. 황궁 밖으로 나가는 정문을 지난 그들이 처소인 황녀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 앞에 서자, 다급해진 후작이 재차 외쳤다.
“전하가 아닌 제 여식에게 할 이야기입니다!”
도저히 넘길 수 없는 발언에 카에드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와 눈을 맞추었다. 후작은 움찔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꽤 중요한 용건인지라….”
“피로연에서 후작 부인이 내 아내에게 무례를 저지른 건 알고 있습니다. 멱을 따지 않고 눈감아 주었더니 이번엔 아비 되는 자가 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는군요.”
명백한 협박조에 밀로즈 후작은 아연실색하여 입을 벌렸다. 카에드는 후작을 쳐다도 보지 말라는 듯 세라엘의 시야를 가리고 마차 문을 열었다.
“두 번씩이나 아량을 베풀어 줄 생각은 없으니 그대로 걸음을 돌리십시오.”
“잠시만요.”
마차 안으로 반쯤 욱여넣어지고 있던 세라엘이 카에드의 팔을 붙잡았다.
“어떤 말을 하시려는 건지 한번 들어 보고 싶어요.”
“돈이나 빌려 달라는 요구를 굳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까?”
카에드가 탐탁지 않은 어조로 되묻자 등 뒤에서 후작이 새된 목소리로 변명했다.
“결코 그런 요구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 다만 확인할 것이 있어서….”
무거운 정적이 흐른 뒤 카에드는 한 걸음 비켜서서 부녀를 마주 보게 해 주었다.
“3분 내로 끝내십시오.”
“…….”
카에드는 지척에서 팔짱을 끼고 떡하니 섰다. 밀로즈 후작은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송구하오나, 대공 전하. 되도록 여식과 단둘이 나누고 싶은 주제입니다.”
필립의 조롱에 더없이 예민해져 있던 카에드는 후작을 난도질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허튼짓했다간….”
그는 소리 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서 당신 목이 날아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예, 예…! 절대로… 제 여식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겠습니다!”
카에드는 그 괴이쩍은 사과가 진실인지 가늠이라도 하는 것처럼 후작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돌려 자리를 비켜 주었다.
세라엘과 밀로즈 후작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녀가 저택을 떠나던 날 이후 처음으로 부친과 말을 나누는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밀로즈 후작은 카에드가 있는 방향을 연신 곁눈질하더니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항간에 나돌던 소문이 진짜냐?”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 거죠?”
“얼마 전부터 사교계에 쫙 퍼진 소문 말이다.”
그는 더욱 작아진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네가 대공 전하를 두고 황태자와 정을 나누었다는 말이 있어. 그게 사실이야?”
분명하게 들었는데도 말을 이해하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당혹하여 입을 벌린 세라엘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말도 안 돼….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절대로 아니에요!”
“오늘 연회에 온 초대객 중 반절이 넘는 사람들은 그리 알고 있을 것이다. 조금 전 두 분 사이에서 벌어진 마찰로 인해 기정사실이 되었겠지.”
세라엘은 문득, 연회 내내 자신을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좌중의 시선을 기억했다. 정답게 대화를 나누던 귀부인 중에서도 그런 눈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저 관찰하는 시선 정도로 치부했을 뿐인데, 그 안에 내밀한 뜻이 담겨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 중 누구도 세라엘이나 카에드 앞에서 그 추문을 입에 담지 못했을 것이다. 우습게도 밀로즈 후작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일이었다.
“터무니없는 헛소문이에요! 갑자기 나타나서 하신다는 말이 그런 지저분한… 어째서 그런 소문이 퍼진 건가요?”
자신이 황태자와 정분이 났다는 괴소문에 황당한 것도 잠시, 곧 거대한 두려움이 세라엘을 덮쳤다. 그녀는 카에드가 들을까 무서워 토끼 눈을 뜨고 그를 곁눈질했다.
그가 알게 되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잖아도 행동거지를 주의해야 하는 황궁에서 그가 이성을 잃으면 어떤 일이 생길지 두려웠다.
“칼스비크의 길 한복판에서 두 분이 너를 두고 다투었다고 하더구나.”
“마찰이 있긴 했지만, 그건 황태자가 저를 겁박하고 희롱했기 때문이에요. 그걸 보고 화가 난 남편이 가만있지 않았던 거고요.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거기서 비롯된 헛소문이겠지요.”
밀로즈 후작은 눈초리를 가늘게 좁혔다.
“그럼 사실이 아니라는 게냐?”
“결단코 아니에요!”
“이상한 일이구먼.”
너저분한 풍문에 휩싸인 여식을 안심시켜 주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남 일처럼 대하는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밀로즈 후작은 비밀이라도 알려 주듯 고개를 숙였다.
“소문이 퍼지면서 황태자는 제게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는 귀족들을 하나씩 숙청하기 시작했다. 주로 대공작 전하의 종신인 북부 소영주들이었지.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아 자금 세탁이니 탈세니 낙인을 찍으면서 갖은 권모술수를 부리고 있다고.”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런….”
“개중에는 쫄딱 도산하여 대공 전하께 파산 신청을 넣은 귀족도 있다더구나. 하나같이 칼스비크에서 사업을 시작한 자들이라더군.”
후작은 멀찍이서 자신을 살벌하게 응시하고 있는 카에드를 힐끔거리며 속삭임을 계속했다.
“그뿐이 아니다. 폐하께서 오랫동안 공석이었으니 머지않아 황태자가 즉위한다는 말도 있다. 그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겠지.”
세라엘은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건 빛바랜 기억 어디에도 없는 전개였다.
카에드로부터 황제가 위독한 상태란 건 전해 들었지만, 그다음 제위 계승자는 필립이고 그게 어떠한 영향을 불러올지까지는 깊이 고려해 본 적 없었다. 부친의 말을 듣고 나서야 머릿속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어떠한 가닥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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