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08)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08화(108/150)
만일 필립이 실질적인 권력을 갖게 되면 지금보다 북부 귀족을 압박하는 행태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카에드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려고 갖은 흉계를 꾸미겠지.
연회장에서 필립이 카에드의 사냥제 불참을 들먹이며 북부 귀족의 사기를 운운한 이유도 그의 위신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냥 대회에 세라엘을 동참시키려는 듯한 뉘앙스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카에드를 조롱하기 위해서였을까?
세라엘은 머릿속을 잠식하려는 복잡한 상념을 밀어내고 부친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지금 아버지가 하시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요?”
얼마간 뜸을 들이던 밀로즈 후작이 더욱 비밀스러워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 시기에 귀족들은 확실한 곳에 줄을 서고 싶어 한다. 나는 너를 북부로 보냈으니 선택의 여지 없이 대공 전하 쪽의 노선을 타야겠지.”
세라엘은 그제야 부친이 자신과 대면하고 싶어 했던 연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예감에 도장을 찍듯 후작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내가 대공작 전하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겠느냐? 네가 중간에서 처신을 잘해 줄 수 있겠어?”
세라엘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아버지는 제가 황태자의 정부인지 아닌지에 대한 사실 여부가 궁금하신 게 아니었군요.”
“…….”
“저를 일평생 자식 취급도 해 주지 않으셨던 분이 이런 부탁을 하시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심지어 늙은이의 재취로 팔아넘기려 계획하셨잖아요. 이제 와서 염치도 없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밀로즈 후작은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래전 나타샤의 말실수로 네가 그 일을 알게 되었다는 건 들었다. 앙금이 남았겠지. 하지만 말 그대로 계획이었을 뿐, 맥슨 백작과의 정혼을 고민만 했을 뿐이지 결국 너를 대공과 이어 주지 않았느냐?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왜 백작이 아닌 대공을 저택으로 초대했겠어?”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세라엘은 이마를 짚었다.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이상하리만큼 머리가 어지러웠다.
“게다가 맥슨 백작이라면 얼마 전 갑작스러운 변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어.”
밀로즈 후작은 묻지도 않은 정보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나타샤와는 이혼 절차를 밟기로 했다. 그 여자가 오늘 행사에 따라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냐.”
“…….”
“네가 아니꼬워했던 의붓어미도 없으니, 대공 전하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정도를 넘어선 뻔뻔함에 세라엘은 눈자위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 남편의 보호를 원하신다는 건 결국 금전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아닌가요?”
밀로즈 후작은 정곡이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가 남편의 종신들을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뜨리고 있다니 아버지도 같은 위기를 맞으실까 봐 이러시는 거고요.”
“나도 사업가인데 아무런 대가 없이 요구한 줄 아느냐. 내 말 잘 듣거라. 아까 연회장에서 엿들은 건데, 황태자가 대공 전하를 위협해 너와 이혼시킨 뒤 너를 차기 황후 자리에 앉힐 속셈이라는 유언비어까지 있더구나. 내 사교계에 지인이 많으니 너와 대공 전하를 둘러싼 소문을 어떻게든 수습해 줄 수 있다.”
세라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설마 그걸 믿는 사람은 없겠죠….”
“두 분 사이에 분쟁이 시작되었다는 건 사실이니, 충분히 신빙성 있다고 믿는 치도 있겠지.”
기함할 듯 어깨를 떨던 세라엘은 문득 카에드를 향해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아까부터 그가 이쪽을 험악하게 주시하고 있는 것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기민한 청력을 가진 남자가 정말 후작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그만 얘기하고 싶어요. 이런 곳에서 나누기엔 부적절한 대화예요.”
“그래서 넌 어찌할 것이냐? 아비의 몰락을 보고만 있을 거야?”
세라엘이 대화를 끝맺으려 하자 후작이 다급히 말했다.
“이대로 있다가 난 완전히 파산하고 말 것이다. 정녕 그 꼴을 보고 싶은 게야?”
“금전적인 도움이 필요하신 거면 정식으로 대공성에 서한을 보내시든지요.”
“네가 북부로 떠났을 때부터 대공성에 수백 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다! 대공이 너에겐 아비의 처절한 몸부림을 전달하지 않은 모양이지?”
“모르는 게 낫다고 판단하셨으니까 그랬을 거예요!”
“에잇…! 널 북부에 보냈단 이유만으로 황태자에게 단단히 밉보였으니 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밀로즈 후작이 대번에 눈을 부라렸다.
“길러 준 은혜도 모르고 이리도 배은망덕할 수가 있더냐?”
“뭐라구요…?”
“네가 20년 넘게 저택에서 사는 동안 네 입으로 들어간 음식과 따뜻한 잠자리는 다 누구 주머니에서 마련된 것 같냐? 내가 가정에 소홀했던 건 인정하나, 네가 성장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금전적인 시련을 겪게 한 적이 있었느냐?”
분하게도 반절은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세라엘은 곧장 맞받아치지 못했다. 뒤늦게 쥔 주먹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배를 곯고 지내지 않았더라도, 친부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넘길 수 없었다.
세라엘이 자아를 가진 환생자가 아니었다면 저택에서의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을까? 사춘기가 오기도 전에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홀로 감내하고, 계모의 냉대를 받으며 방치 속에서 자란 여자아이는 어떤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까. 게다가….
“아버지는 집안이 어려워진 결정적인 순간에 저를 팔아넘기려고 하셨잖아요!”
“도대체가,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여태껏 앙심을 품고 있는 게냐!”
“말이 되는 소리를… 카에드가 아니었다면 결국에는…!”
언성이 높아지자 카에드가 그들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라 소리를 지르려던 후작은 냉큼 입을 다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구김 하나 없는데도 카에드의 얼굴엔 형형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그, 마, 마지막으로 할 얘기가 있….”
손을 뻗은 카에드는 후작의 옷깃을 가만히 틀어잡고 제 쪽으로 느릿하게 당겼다. 강한 완력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후작의 몸뚱이가 종잇장처럼 나부꼈다.
“여기서 당신 멱을 따고 싶지 않습니다.”
“…….”
“아내 앞에서 장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갖추게 해 주시죠.”
장인의 멱살을 틀어쥔 남자가 할 말은 아니었으나 잔뜩 겁에 질린 후작은 황망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저기압인 대공의 명령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카에드는 후작의 옷자락을 놓고 세라엘을 도로 마차에 태웠다.
궁내 이동용 마차는 어둠이 깃든 전정을 달려 황녀궁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내내 세라엘은 눈을 내리깔고 침묵을 유지했다.
북받쳐 오른 감정이 가라앉으면서 아비로부터 전해 들었던 소문들이 둥실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굴려 옆자리에 앉은 카에드를 곁눈질했다.
그 또한 무엇도 묻지 않았다. 이 사달이 날 줄 알았으면 황궁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며 질책할 만도 한데 그럴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더욱 무거워진 중압감이 세라엘의 어깨를 짓눌렀다.
“왜 자꾸 눈치를 보지.”
팽팽한 공기를 가른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달리 무미건조했다.
“후작이 무슨 말을 했길래 그렇게 겁을 먹었어요.”
“그게….”
“이리 와요.”
카에드는 불쑥 손을 내뻗더니 세라엘을 끌고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두 팔로 단단히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기까지 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이유를 묻듯 그를 바라보자 나지막한 음성이 답을 내놓았다.
“안아 주고 싶어서요.”
“…….”
한숨과도 같은 숨결이 목덜미에 흩어졌다. 다시 턱을 들어 올린 그의 눈동자가 무미건조하게 메말라 있었다.
“날이 밝으면 황궁을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
“원한다면 당장 칼스비크로 떠나지 않고 주변 관광을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황궁은 내일 바로 떠나기로 해요.”
“…남은 행사는 이대로 불참하시려구요?”
“지금도 무도회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아뇨….”
“계속 남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힐난조는 아니었으나 은근하게 날이 선 어조였다. 세라엘은 말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대었다. 단조로운 속도의 박동이 귓바퀴를 통해 번졌다.
“이런 곳에 더 있을 이유는 없잖아요, 응?”
“…….”
“슬슬 집으로 돌아가요. 우리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카에드는 그녀의 동글동글한 머리통에 입술을 붙이며 조용히 타일렀다. 이번에도 세라엘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황녀궁에 마련된 침실로 돌아오자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따뜻한 다과를 내어 왔다. 목욕물은 조금 뒤 준비해 오겠다는 말과 함께 물러갔다. 따로 목욕 시중을 든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부부이니만큼 두 사람이 함께 몸을 담그리라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카에드와 세라엘 둘 다 다과를 즐기거나 한가로이 목욕이나 할 계제가 아니었다.
카에드는 목을 죄는 타이를 죽 잡아 빼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세라엘은 착잡한 눈으로 그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그의 말을 따르는 게 옳았을지도 몰랐다. 로잘린의 편지는 무시하고 성안에서만 지내다가, 계획대로 보육원에 들러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더라면 물밑에서 오가는 정치사와 추문 따윈 전혀 몰랐겠지. 하지만….
“카에드.”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입술을 깨물던 세라엘은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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