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09)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09화(109/150)
“아버지가 했던 말 중에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카에드는 담담한 얼굴로 세라엘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추저분한 치정극에 휘말렸다는 얘긴 듣지 못한 건가…. 아니면 엿들을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듣지 않았던 건지도 몰랐다. 뭐가 되었든 그 소문만은 그에게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었다.
“황태자가 북부 소영지를 다스리는 귀족들을 탄압하고 있다던데, 알고 있었어요?”
“후작이 쓸데없는 말을 전했군요.”
툭 내뱉은 그가 목깃에 걸린 타이를 마저 풀며 시선을 돌렸다. 대화를 피하려는 듯한 태도에 세라엘은 고집스럽게 그와 눈을 맞추었다.
“어째서 황태자가 당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숙청하려고 하는 건가요?”
“우려하는 부분이 무엇인지는 알겠습니다만, 필립은 본래 거슬리는 가신이 있을 때마다 온갖 트집거리를 잡아 패악을 부리기로 유명한 인간입니다. 혹시 후작이 또 금전을 요구하던가요?”
“에둘러서 말씀하시긴 했지만… 네, 당신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카에드는 얼핏 불길해 보이는 실소를 흘렸다. 세라엘 앞에서 차마 내뱉지 못한 상스러운 욕설이 혀끝에 걸렸다.
“알만하네요. 가뜩이나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그들과 같은 곤경에 빠질까 봐 짐짓 부풀려서 말을 전했나 본데, 이건 갑작스러운 일도 아닐뿐더러 당신이 신경 쓸 만한 게 아닙니다.”
일축하듯 말하는 목소리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세라엘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허벅지 위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그러자 목 아래 단추를 끌러 내리던 카에드의 손짓이 일순 멈췄다.
시선을 내려 제 몸을 짚은 손을 응시하던 그가 다시 눈동자만 들어 올려 세라엘을 바라보았다.
평소 그녀의 자그마한 숨소리에도 열띤 반응을 보이던 남자의 눈이 더없이 메말라 보였다. 마치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하는 눈치였다.
세라엘은 긴장으로 침을 삼키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 황궁에 남아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무슨 뜻입니까?”
예상보다 더욱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녀는 꿋꿋한 태도로 말을 계속했다.
“당장 이곳을 떠나지 말고 행사에 참석했으면 해요.”
힌델에 오지 않았더라면, 밀로즈 후작을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너저분한 소문을 바로잡고 싶었다.
그를 위해 세라엘은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방도가 썩 없는 건 아니었다. 사교계를 주름잡는 귀부인들을 통해 필립의 추태와 진실을 퍼뜨리면 될 일이었다.
황궁을 방문한 일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제국 각지에 있는 귀족들이 한데 모인 자리였으니 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물론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그들이 어디까지 믿어 줄지 확신할 순 없었다. 일이 엇나가면 황실 모독으로 꼬투리가 잡힐 수도 있으나,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황위에 오를 필립의 예비 정실이라니. 아무리 여럿의 입을 거쳤다지만 어쩌다 그따위로 각색이 되었을까. 절대 가만두어서는 안 될 추문이었다.
카에드는 그 소문을 알게 되더라도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다닐 사람이 아니었다. 귀족들이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하게끔 위협했으면 했지….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세 사람을 둘러싼 낭설이 사실이라고 도장을 찍어 주는 격이었다.
“세라엘.”
문득 바늘처럼 찌르는 눈길을 알아챈 세라엘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단 한 번도 그녀를 향해 불쾌감을 드러내 본 적 없던 남자가 서늘하게 굳은 낯을 하고 있었다.
“나한테 너무 지나친 걸 바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했다.
“필립의 입에서 당신을 사냥제까지 동행하라는 말이 공연히 나올 리가 없잖아요. 뻔히 알면서도 그의 도발에 넘어가 당신 신변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까지 무릅쓰라는 건 지나친 요구 아닙니까?”
“아….”
“당신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에요. 하지만 이런 건 아닙니다. 총구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장소에 당신을 데려가 달라는 도를 넘은 요구에 응해 줄 순 없습니다.”
세라엘은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당신과 사냥제까지 가기를 바랐던 게 아니에요.”
물론 카에드를 따르는 북부 영주들을 생각하면, 필립의 말마따나 사기 때문이라도 사냥제에 출전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 또한 카에드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총탄이 난무하는 사냥터에, 어떤 사고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전야제인 무도회에만 가자는 거예요. 하룻밤만 더 있다가 돌아가요.”
그럼에도 서릿발처럼 얼어붙은 낯은 풀어지지 않았다.
“내가 필립의 수작질을 또다시 감내해 주길 바라는 거군요.”
“그런 의도가 아니에요…. 제가 당신이 조롱받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할 리가 없잖아요.”
“그 쓰레기가 좌중 앞에서 나를 두고 뭐라 하든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조롱의 대상에 당신이 있다는 겁니다.”
“…….”
“당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위협했던 인간을 다시 한번 마주하라는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후작이 무슨 말을 했기에 이러는 겁니까?”
황태자를 향한 그의 분기가 극한을 달리고 있는 와중에 세라엘은 차마 세 사람이 얽힌 소문을 언급하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대답 안 해 줄 건가요?”
안달하여 설득할 때는 언제고 세라엘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카에드는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흠잡을 데 없이 말끔했던 그가 삽시에 흐트러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저를 믿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카에드 역시 그녀가 단순 유희를 위해서 이러한 제안을 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저 조그만 머리에서 나름대로 하는 생각이 있나 본데,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에겐 중요치 않았다. 그저 필립이 두 번 다시 그녀를 우롱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루면 돼요. 내일 연회가 끝나자마자 칼스비크로 돌아가요. 날이 밝기도 전에 곧바로 돌아가는 거예요.”
잇달아 이어지는 부탁에 카에드는 눈을 내리깔았다. 몇 날 며칠을 꼬박 새우며 업무를 볼 때도 반듯했던 남자가 무척이나 피로한 기색을 보였다.
“…그렇게 해요, 그럼.”
하지만 카에드는 더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았다. 딱 하룻밤. 하루만 감내하면 돌아가는 것이다. 내일이면 세라엘이 또 고집을 피운대도, 어떤 상황이 온대도 그녀를 들쳐메고 궁을 나설 생각이었다.
때마침 문을 두드린 황녀궁에서 일하는 하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끓인 목욕물이 든 거대한 들통을 들고 와 방 안에 있던 욕조에 쏟아부었다.
카에드는 세라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가 전하는 온기와 체향에 깊숙이 몸을 묻고 어디서 기원했는지 모를 불안감을 잠시간이라도 지우고 싶었다.
“…….”
세라엘은 보는 눈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고드는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목욕물을 붓던 하녀들은 침대에 나란히 앉은 그들에게 무심코라도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하녀들이 침실을 뜨고 나서도 세라엘은 그가 내키는 대로 그녀를 취하게끔 내버려 두었다. 열락에 부풀고 싶은 게 아니라 이건 그가 불안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혹시 화가 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친 손짓이 그녀의 몸을 덮은 연한 직물을 찢고 숨겨져 있던 살결에 온기를 남겼다. 밤의 서막을 알리는 행위는 곧 욕조에서도 이어졌다.
세라엘은 찰랑거리는 수면 아래에서 정신없이 밀려드는 그를 끌어안으며, 맞물린 잇새로 젖은 신음을 흘려 넣었다.
***
다음날 이어진 가면무도회는 지난밤과 사뭇 달랐다.
대공 부부를 훑던 호기심 어린 시선에는 어떠한 사달이 날까 봐 조마조마한 빛이 덧씌워졌다.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인지 아슬아슬한 기류도 감돌았다.
세라엘은 내밀한 속마음을 가면 뒤에 숨긴 채 귀부인들과 한 테이블에 모여앉아 있었다.
“우리 그이 좀 보셔요.”
지척에 앉아 있던 오웬 백작 부인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엔 오웬 백작을 포함한 귀족 사업가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 가운데에는 카에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술은 끊겠다더니 지인들을 만나 어지간히도 흥이 올랐나 봐요. 볼 때마다 포도주를 들이켜고 있어요. 저러다 실수라도 하지 않았으면!”
“제 남편도 마찬가지예요. 사업하다 보면 음주는 불가결한 요소라나 뭐라나.”
“저리 고주망태로 비틀거리면서 무슨 사업을 하겠다는 걸까요? 그저 술을 마시고 싶어서 대는 핑계 아닌가 싶어요.”
부인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술이 첨가되지 않은 칵테일을 마시던 세라엘이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군께서 호텔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세라엘에게 줄곧 호감을 보여 준 백작 부인을 향해서였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오, 아직이에요. 칼스비크에 사업 신청서를 넣었는데 아직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거든요. 거의 두 달 정도 된 것 같네요.”
“그랬군요. 동쪽 해안가 근처에서 개업하신다기에 기대하고 있었는데, 신청서가 아직 결재되지 않았던 거군요.”
“대공 전하께선 누구보다도 분주하신 분으로 소문이 자자하잖아요. 교역항이 열린 뒤로 업무량이 더욱 많아지셨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저번에 집무실에 들렀을 때 보았더니 남편 앞으로 서류가 어마어마하게 쌓였더라구요. 매일 새벽까지 업무를 보는데도 줄어들지 않는 것 같아요.”
“세상에. 집무실에서 낮잠 자는 저희 남편과 상반되는걸요.”
그녀의 농담에 푸스스 웃은 세라엘이 곧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부인을 봐서 제가 살짝 귀띔을 해 드려야겠어요. 오웬 백작님의 편의를 봐주실 수 있는지 한번 여쭤볼게요.”
백작 부인의 얼굴에 눈에 띄게 화색이 돌았다.
“정말 그래 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산처럼 쌓인 신청서 중에 한 장 정도 먼저 확인해 달라 부탁드리는 건데 무리도 아니에요. 긍정적으로 검토해 달라는 말도 덧붙일게요.”
“어쩜, 남편의 염원과도 같은 사업이었는데…. 벌써부터 그이의 꿈이 이루어진 것 같은 기분이네요. 고마워요, 대공작 부인.”
“천만에요. 백작 부인은 제 친우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고 싶어요.”
오웬 백작 부인은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미소로 답한 세라엘은 음료를 홀짝이며 다른 부인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거나 카에드 곁에 선 제 남편을 향해 묘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슬슬 서두를 떼는 게 좋겠어.’
다짜고짜 소문을 부정하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수 있는 부인을 제 편으로 만들어 놓고 시작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것 같았다. 마침 그 사람이 말재간 좋은 백작 부인이라 다행이었다.
세라엘이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누군가 그들이 앉은 테이블로 천천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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