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10)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10화(110/150)
“세라엘.”
낭랑한 목소리가 부인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음성의 주인은 어제와 같이 초록색 부엉이 가면을 쓴 로잘린이었다.
“잠깐 대화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럼요.”
세라엘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에드를 흘깃 뒤돌아보자 그는 팔짱을 낀 채 그녀의 동선을 좇고 있었다. 앞장서 걷던 로잘린은 연회장 내의 약간 후미진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어제 일, 따로 사과하고 싶어서 불렀어요.”
미약한 한숨을 내쉰 로잘린은 세라엘의 두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가 설마 황궁 연회에서까지 그럴 줄 몰랐어요. 미안해요.”
“로잘린의 잘못이 아니었으니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세라엘은 내가 대접하고 싶어 초대한 손님이잖아요. 오라버니가 무례하게 굴지 않도록 주의했어야 했어요. 공식 석상에서 연설하지 못하도록 폐하께서도 엄명을 내리셨는데 어찌 저리 막무가내인지….”
세라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막을 방도는 없었을 거예요.”
“세라엘이 이해해 주어야 하는 상황도 아닌데… 정말 미안할 따름이에요.”
진심이 전해지는 사과에 세라엘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망나니 오라비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그녀가 무척이나 측은했다.
불현듯 세라엘은 로잘린의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부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무슨 일 있던 거예요?”
“네?”
“오늘 무도회에 오기 전에 차나 식사를 함께 들고 싶었는데, 궁 안에서 로잘린을 전혀 보지 못했거든요.”
세라엘을 대접하고 싶었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황녀궁에선 아침부터 성대한 식사가 준비되었다.
칼스비크에서 대동한 수행원들도 합류하여 원 없이 즐길 수 있게끔 점심은 정찬실에서 마련되었다. 무도회에 오기 전까지 다과 또한 계속해서 제공되었다.
황녀궁의 주인은 로잘린이니 그녀가 내린 명령일 터였다. 그러나 로잘린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미안해요. 사정이 있었어요.”
약간 당황한 듯 로잘린은 제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세라엘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는 무도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황궁을 떠날 예정이거든요. 아쉽지만 사냥제와 폐막식은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요.”
“아… 그렇게 되었나요?”
“네. 초대해 주어서 정말 고마웠어요. 로잘린 덕분에 첫 가면무도회를 아주 성대하고 즐겁게 보낼 수 있었어요. 나중에 칼스비크에서도 연회가 열리면 꼭 초대할게요.”
“그리 말해 주니 저 또한 고맙지만, 미안한 마음도….”
로잘린이 말하는 도중, 별안간 가면을 고정한 끈이 툭 끊기면서 그녀의 부엉이 가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라엘은 부지불식간에 드러난 황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
로잘린의 오른쪽 따귀가 시뻘겋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눈가도 약간 찢어져 있었고, 흰자위에는 미세한 실핏줄이 돋은 상태였다. 이마에는 날카로운 물건에 스친 것처럼 주욱 그어진 상처도 보였다.
서둘러 가면을 주운 로잘린이 얼굴을 감추었으나, 찰나 본 것만으로도 단발성에 그친 손찌검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라엘은 아연실색하여 입을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황태자가….”
설마 어제 일 때문인가. 필립의 잔악한 성미로 미루어 보건대, 초대객 앞에서 제게 언성을 높인 누이를 가만두었을 리가 없었다.
황녀궁에 머무르던 세라엘과 카에드 앞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도 흉하게 부은 얼굴 때문일 터였다. 당혹감에 휩싸였던 세라엘의 눈에 노기가 번졌다.
“그 사람이 그런 거예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이제껏 상처가 날 정도로 손찌검을 한 적은 없는데 어젯밤은 적잖이 화가 났었나 봐요.”
가면을 고쳐 쓴 로잘린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오라버니께 대든 건 난생처음이었거든요. 그것도 귀족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으니 얼마나 노여웠겠어요.”
“하지만 폭력을 휘두른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에요.”
“죽이지 않은 게 어디인가요. 부탁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세라엘은 다급히 도리질을 쳤다.
“말할 리가 없잖아요….”
“이만 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저는 초대객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테이블에 합류할게요.”
상처를 보인 게 부끄러웠던지 로잘린은 자리를 피하고 싶어 했다. 세라엘은 더 묻고 싶은 게 있었으나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는 걸음을 돌려 다른 귀부인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고, 세라엘은 원래 앉아 있던 테이블로 돌아왔다. 뜻하지 않게 불상사를 목격하여 심경이 엉망진창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무슨 일이셨나요?”
착석하자마자 묘한 호기심을 담은 질문이 날아들었다. 어젯밤 두 남자가 충돌했던 일과 필시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던진 물음이었다. 차마 그 일을 언급하지 못했던 귀부인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잠시간 얼이 빠져 있던 세라엘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리 경황이 없다지만, 고집을 부려 다시 무도회에 온 이유를 잊어서는 안 되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대신 사과하려고 절 찾으신 거예요. 황태자 전하가 많은 사람 앞에서 저를 두고 지나친 농을 하셨으니, 남편도 단단히 화가 났거든요.”
오웬 백작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쳐 주었다.
“전하의 말장난이 지나치긴 하였지요.”
“사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세라엘은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이건 부인들께만 긴히 말씀드리는 것이니 비밀을 지켜 주시길 바라요.”
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귀부인들이 비밀을 지키리라 믿지 않았다. 사실 그래야만 했다. 비밀스럽게 전달해야 날개를 달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갈 것이다.
“물론이에요.”
“제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귀부인들이 눈을 빛내며 약속했다. 세라엘은 골치 아픈 것처럼 이마를 짚었다.
“결혼식 이후 며칠 되지 않아서 아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어요. 제가 남편의 선물을 사러 축제에 갔을 때였어요.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다짜고짜 제 손목을 틀어잡고 밤일을 잘하느냐고 묻더군요.”
세라엘은 사실만 골라 적절히 각색했다. 귀부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가리며 경악했다.
“세상에나! 그런 덜떨어진 무뢰한이 다 있나요!”
“못 배워먹은 시정잡배 같으니!”
기대했던 반응에 세라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멀쩡히 길 가던 초면의 여성에게 그런 질문을 하다니, 저도 처음엔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요. 무시하고 갈 길을 가려 했는데 느닷없이 자기가 황태자라며, 황명을 거절하면 감옥에 처넣을 거라며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더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길 한복판이었어요.”
말을 끝맺자마자 귀부인들은 너무나 놀라 시선을 주고받았다. 오웬 백작 부인은 자리에서 작게 뛰어오르기까지 했다.
“설마요…. 그 남자가 정말 황태자 전하였나요?”
“말도 안 돼요. 그런 제정신 아닌 인간이….”
“밤일을 운운한 것뿐 아니라 당신께 입까지 맞추라고 하시더군요. 놀라운 사실은 그 남자가 정말 황태자 전하였던 거예요. 전하는 저와 면식이 없었으니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는 것 같았어요.”
세라엘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열심히 각색했다. 뒤끝이 잡힐 일 없도록 사실만을 전달했고, 극적인 효과를 위해 특정 대목은 짐작하듯 아리송하게 말했다.
“공교롭게도 남편이 그 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외간 남자에게 손목을 틀어 잡힌 채 희롱당하고 위협당하던 제 모습을요. 그 상황에서 남편이 얼마나 분노했을지 상상이 가시나요?”
백작 부인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탄식했다.
“대공작 전하께서는 부인의 운신에 해가 갈까 봐 후사를 갖는 일도 염려하셨던 분인데…. 애지중지하던 새신부에게 큰일이 날뻔했으니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요.”
“칼스비크에는 여성을 희롱하면 손목을 자르는 형벌이 있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남편은 법도 또한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 그를 처형대로 데리고 갔어요. 손목을 자르려던 순간, 남자의 정체가 황태자 전하란 걸 알았기에 멈추신 거예요.”
세라엘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눈매를 쓸어 만졌다.
“하지만 슬프게도, 전하께선 사과는커녕 어제 초대객 신분으로 입궁한 저와 남편을 다시금 우롱하셨죠. 그래서 두 분의 사이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상태예요. 남편은 제게 어떤 변고도 생기는 걸 원치 않아 사냥제에도 불참할 예정이구요.”
“그런 일이 있었으니 예민해질 수밖에 없으시겠지요. 세상에…. 부인도 마음고생이 심했겠어요.”
“제 존엄성을 위해서 남편은 이 사건을 함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황태자 전하가 저와 정을 통했다는 허황된 소문이 퍼지고 있다지 뭐예요. 정말 비참하고 두려웠어요. 남편이 알게 되면 또 어떤 사달이 날지….”
가히 충격적인 속사정에 귀부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오웬 백작 부인과 라미레트 영애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세라엘의 어깨를 토닥였다.
“슬퍼하지 마세요, 부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는 자는 지탄 받아 마땅해요.”
“무지몽매한 이들이나 믿을 법한 추문이에요. 제 가까운 인척이 귀부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가십지를 발행하는데 혹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물어볼게요. 너무 상심하지 마셔요.”
세라엘은 귀부인들의 위로를 받으며 풀 죽은 듯 몸을 늘어뜨리고 눈을 깜박였다. 흥겨운 군무곡이 흘러나오는데, 귀부인 중 누구도 일어나서 플로어로 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여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필립은 연회장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어제와 달리 아무 문양 없는 백색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도록 머리통을 완전히 덮는 디자인이었다. 예상대로 황태자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귀족들이 내밀하게 주고받는 대화를 엿들을 요량이었다. 가면무도회가 있을 때마다 필립이 종종 하는 짓이었다.
주변을 훑던 필립은 반가면을 쓴 세라엘을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었다. 그는 고민 없이 그쪽을 향해 휘적휘적 다가갔다.
별안간 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필립을 덮쳤다. 필립은 기습당한 것처럼 움찔하여 한 발짝 물러났다. 목전에 나타난 남자는 넓게 벌어진 어깨로 필립의 시야를 완전히 막았다.
“어디 가?”
검은 가면 속 자리한 형형한 금안이 필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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