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11)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11화(111/150)
필립은 한쪽 입매를 비틀어 당겼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과 다부진 체격이 아니었더라도 남자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연회장 내에서 감히 황태자를 막아설 수 있는 남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대공. 너 인간 맞아?”
한 걸음 다가선 필립이 눈을 매섭게 부릅뜨고 카에드를 노려봤다.
“사실은 짐승 아냐? 살갗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가면을 썼는데 나를 어떻게 알아본 거지?”
모욕적인 언사에도 카에드는 미동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필립은 계속해서 카에드를 몰아붙였다.
“안 그래? 특수 직물로 눈이 뚫린 구멍까지 가렸는데 알아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네가 짐승이 아닌 이상 불가능….”
“너한테서 지저분한 악취가 나거든.”
느릿한 저음이 말을 잘랐다. 필립은 대번에 눈썹을 추켜세웠다. 카에드는 글자를 읽어 내리는 것처럼 고저 없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쥐새끼처럼 몰래 기어 다니면서 남의 목소리나 엿듣는 네게서 시궁창 냄새가 나. 혹시나 반란 분자가 있는 건 아닌지, 붙잡고 뒤흔들 약점을 찾을 수 있을지 역겨운 의도를 품고 빨빨거리는데 악취가 나지 않겠어?”
필립은 삽시에 극한까지 치달은 격분으로 씩씩거렸다. 두 남자 사이에서 오가는 대치를 알 리 없는 귀족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는 소리까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장내에 울리는 우아한 음악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쥐새끼는 내가 아닌 너겠지.”
볼썽사납게 이를 갈던 필립이 한마디 내놓았다.
“양자 시절에 죽은 쥐새끼처럼 살던 네가 이제 와 뭐라도 된 양 날뛰고 있는데, 내가 황위에 오르면 네 실체를 온 제국에 까발려 개망신을 주겠어.”
“내 실체?”
카에드는 피실 웃음을 흘렸다.
“모르는 게 좋을 텐데.”
“이미 알고 있어. 넌 더러운 야만인이야.”
필립은 독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어조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작고한 공작이 널 장벽 너머에서 데려왔다는 걸 들었어. 이 근본도 없는 천민 자식아.”
필립은 검지로 카에드의 오른쪽 어깨를 쿡쿡 찔렀다. 황태자를 똑바로 직시하던 눈이 그의 손짓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네가 공자의 화살을 맞은 곳이 여기지? 그 자리에 나도 있었으니 똑똑히 기억해. 당시 넌 화살을 맞고도 짐승처럼 빽빽 울부짖기는커녕 태연하게 걸어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왼쪽인데.”
“…….”
필립은 헛기침을 하며 그의 오른쪽 어깨에서 손가락을 뗐다.
“미지의 영역에는 온갖 야만인 종족이 있다지. 인간의 생혈을 빨아 먹는 종족, 늑대의 피가 섞인 종족, 고통을 느끼지 못해 투견처럼 날뛰는 종족까지 다양하다더군. 넌 후자인 거야. 맞지?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
“입양아인 네가 천출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온 제국민이 혐오하는 야만인이라면 문제가 다르지. 이 사실이 까발려지면 어떻게 될까.”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는 얼뜨기의 협박이라니…. 가소롭기 짝이 없군.”
“웃기지 마! 차기 황제가 될 남자에게 온갖 무례한 짓을 벌이고도 감당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모양인데, 자네는 나를 잘못 판단한 거야.”
살얼음판 같은 기류 속에서 울리던 음악은 곧 익살스러운 춤곡으로 바뀌었다. 촛불이 꺼지면서 주위는 더 어두워지고,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플로어로 달려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주 보고 선 두 남자는 움직임이 없었다.
“사냥 대회는 끝끝내 불참할 계획이라며.”
필립이 귀족들을 슬쩍 곁눈질하며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북부 귀족의 우두머리가 귀감은 되지 못할망정 꼬리를 말고 도망가다니, 이거 남겨진 사람들이 불쌍해서 어떡하나.”
“…….”
“지휘자가 없으니 사기를 잃고 날뛰다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안 그래?”
필립을 응시하는 황금색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명백히 누군가를 없애겠다는 협박이었다. 카에드의 참가 여부에 이상하리만큼 집착하더니, 협박해서까지 그를 끌어들이려는 심산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남자 귀족 중에 필립의 으름장이 유의미할 정도로 카에드와 가까운 이는 없었다.
“누구 목숨?”
기다렸다는 듯 이어진 필립의 목소리는 예상 밖의 인물을 끄집어냈다.
“가령… 밀로즈 후작이라든지?”
카에드가 눈에 띄게 경직하는 모습을 본 필립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돌연 손을 뻗은 카에드가 필립의 뒤통수를 콱 틀어잡았다. 견고한 가면이 무지막지한 아귀힘에 의해 빠직,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필립은 제 두개골이 부서지는 듯한 착각에 휩싸여 어깨를 움찔했다. 이내 카에드의 팔목을 움켜쥐고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놔!”
“…….”
“이거 안 놔?”
“밀로즈 후작이 내 약점이라고 생각했으면 넌 단단히 착각한 거다.”
칼날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쓰레기가 목숨을 잃든 불구가 되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거든.”
“네 여자도 동의할 것 같냐?”
가면을 틀어잡은 손아귀에 계속해서 압력이 가해졌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필립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여자한테 가서 물어봐. 아비의 목숨이 위태로울지 모르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황태자가 아비를 없애겠다고 협박했는데 넌 무시할 계획이란 것도 한번 말해 보지 그래.”
“…….”
“어떨 거 같아?”
우스운 일이었다. 카에드 또한 언제나 밀로즈 후작을 죽이고 싶었기에 이건 협박 축에도 낄 수 없었다.
반면 세라엘은 어떠한가. 카에드가 후작을 죽이고 싶었던 적은 없냐 물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모순적이라지만 사업가인 아버지 덕에 우리가 만나지 않았냐며,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과거와 함께 묻어두고 싶다고 했다.
말해 줄 수도 있었다. 우리가 만나게 된 건 과거의 연을 붙든 카에드가 그녀를 찾아왔기 때문이며, 그 과거에서 카에드가 보고 왔던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아비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인해 어떠한 불행에 치달았는지 빠짐없이 알게 된다면, 세라엘 또한 그를 당장 죽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심경의 변화를 눈치챈 필립이 만족한 듯 입술을 비틀었다.
“어때? 사냥제에 출전할 마음이 좀 생겨?”
또 다른 문제는 필립의 협박이 전에 없이 노골적이란 것이다.
밀로즈 후작을 향한 칼끝이 언젠가 세라엘에게 향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사냥제를 이토록 물고 늘어지는 걸 보면 다른 꿍꿍이까지 있는 듯한데, 그 대상이 카에드나 세라엘 둘 중 하나임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돌연 필립이 쓴 흰 가면에 지맥이 갈라지듯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곧 빠각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반절로 쪼개진 가면은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난데없이 얼굴이 드러나자 당황한 필립은 붕어처럼 입을 벌렸다. 피처럼 붉은 그의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에드는 말없이 걸음을 돌렸다.
결국 피를 보아야 끝이 나는 굴레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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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얘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세라엘은 카펫 위에 배를 깔고 누운 늑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최근에 늑대 모가 데려온 새끼인 레오였다.
덩달아 쭈그려 앉은 루시가 레오의 자몽빛 털을 어루만졌다.
“레오가 따라오겠다고 자꾸 마차에 오르는 바람에 영주님의 부하가 데려왔다고 해요. 혼날까 봐 숙소에 몰래 숨겨 두고 있었대요.”
“아마 카에드 님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주셨을 거야.”
“저도 그러실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루시는 축 처진 레오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신나게 뛰어다니더니 갑자기 풀이 죽었어요. 저녁을 잘못 먹었나?”
“몰래 황궁까지 따라왔는데 이제 떠난다고 하니까 시무룩한가 봐.”
세라엘은 탁자 위에 놓인 짐가방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나저나 짐은 다 준비되었니?”
“네. 영주님께서 돌아오시면 곧바로 떠날 수 있어요.”
“잠깐 부하들과 나눌 얘기가 있다고 하시니까 금방 돌아오실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세라엘은 창가로 다가갔다. 장막처럼 드리운 밤하늘에는 샛노란 달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한밤중이었지만, 카에드와 약속했던 대로 연회가 끝났으니 바로 황궁을 떠날 계획이었다.
“서운하지는 않으세요?”
“응?”
“황녀 전하의 하녀들이 말해 주었는데, 사냥제가 끝나고 난 다음에 열리는 행사의 폐막식이 정말 화려하다고 들었거든요. 후원에서 폭죽놀이도 구경하고 야외 무도회도 진행한다지 뭐예요.”
세라엘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서운하지 않아. 그리고 무도회가 끝나자마자 떠나기로 카에드 님과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서민의 주거지와 맞닿은 연안에는 로잘린이 언급했던 힌델의 야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둑한 밤인데도 떠들썩한 기운이 황궁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그래도 황궁에서 나가면 저기 야시장이랑 바닷가도 갈 예정이야.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저도 같이 가도 되는 거예요?”
“당연하지. 마차 안에만 있을 거야? 카에드 님의 부하들이나 루시 너는 행사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잖아.”
세라엘은 포갠 두 팔 위에 턱을 올렸다.
“처음 칼스비크로 떠나던 마차 안에서 예쁜 호수를 본 적 있거든. 거기도 한번 가 보고 싶어.”
“중부까지 나온 김에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들르자고 해 보세요. 영주님께서는 모두 좋다고 하실 거예요.”
루시가 제 무릎 위에 턱을 올린 레오의 복슬복슬한 얼굴 털을 장난스레 잡아당겼다. 대형견만큼 커다란 아기 늑대는 시무룩한 낯을 하면서도 빗자루 같은 꼬리를 붕붕 흔들어 화답했다.
때마침, 문이 덜컥 열리고 카에드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가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눈치 빠르게 늑대를 데리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카에드.”
세라엘은 침실을 저벅저벅 가로질러 오는 그를 보고 턱을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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