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13)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13화(113/150)
황태자는 시뻘건 눈과 새하얀 털을 가진 알비노 말 위에 올라 있었다. 카에드와 대치하듯 그의 맞은편에 서서 세라엘과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어 보였다.
미끈거리는 낯이 어찌나 불쾌한지, 세라엘은 손에 엽총이 있다면 그를 냅다 쏴 버리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윽고 남자들과 각각의 수행원은 숲 안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쉴 새 없이 콩닥거리는 마음을 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귀부인들이 차를 들이켜며 재잘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공기 좋은 숲속에서 이러고 있으니 꼭 소풍 나온 것 같고 좋네요.”
“그렇죠? 차분히 앉아서 어느 쪽이 승리할지나 예측해 보자고요.”
“아무래도 사냥 경험이 더 많은 북부 팀이 승산이 있겠지요.”
“하지만 단체전이라 변수가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요? 팀에 발목을 잡는 사람이 많으면 점수 올리기가 지지부진할 거예요.”
“그렇다기엔 대공 전하께서 워낙 일당백이시잖아요. 장벽 너머에서 원정으로 보낸 시간만 한두 해가 아니시니….”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곧 세라엘이 곁에 앉아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대공과 황태자를 필두로 진행되는 시합이니만큼, 대공비인 세라엘 앞에서 그들의 승부를 두고 왈가왈부 떠들기가 눈치 보이는 듯했다.
그때 라미레트 영애가 어깨를 살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부군께서는 사냥제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셨나 보네요.”
“…그렇게 되었어요.”
“부인을 홀로 두고 가시는 게 많이 걱정되셨나 봐요. 저리도 듬직한 호위병을 두고 가신 걸 보면요.”
카에드의 행방을 좇아 숲 안쪽을 응시하던 세라엘이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콜과 악셀, 렉터가 우뚝 서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대기석에 있는 사람 중에서 개인 호위를 달고 온 이는 세라엘뿐이었다.
저들의 엄호가 필요한 사람은 그녀가 아닌 카에드였다. 경기에 불참하는 사람들이 노닥거리는 이곳보다 총탄이 난무하는 사냥터가 더 위험할 테니까.
세라엘을 향한 그의 과보호가 되레 그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건 아닐까. 무도회가 끝나자마자 궁을 떠나자던 남자가 어째서 결정을 번복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갖은 의문은 물론이고,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사냥 시합이 아닐 것 같다는 노파심 때문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거기, 와인 한 잔만 따라 주겠어요?”
귀부인이 대기 중인 황궁 하녀를 향해 손짓했다. 어린 하녀는 포도주병을 들고 와 그녀의 잔에 쪼르륵 붉은 술을 따랐다.
“숲속에서 마시는 포도주가 별미라니까요. 나도 우리 그이를 따라 저택 근처 숲으로 사냥을 하러 갈 때마다 꼭 포도주를 한 병씩 챙겨 간답니다.”
“그래요? 그럼 나도 한 잔 마셔 볼까.”
차를 마시던 귀부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와인을 요구했다.
그들에게 술을 따라 주던 하녀가 자연스레 세라엘의 잔 위로 병을 갖다 대자, 오웬 백작 부인이 손을 뻗어 그녀를 만류했다.
“대공작 부인께서는 음주를 자제하고 계시니 되었어요.”
“아….”
“내 생각엔 아이를 계획 중이신 것 같거든요.”
백작 부인이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레 덧붙였다. 그녀의 말장난에 맞춰 줄 기분이 아니었던 세라엘은 겸연쩍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잠시 세라엘을 응시하던 하녀가 실례했다는 듯 몸을 꾸벅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세라엘은 짤막하게 답한 뒤 고개를 돌렸다. 그때 라미레트 영애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런데 황녀 전하는 어디 계시는지 아시나요?”
백작 부인이 포도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몸 상태가 안 좋으셔서 궁에서 휴식을 취하실 거라고 들었어요.”
“그랬군요. 가면무도회에서는 괜찮아 보이셨는데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네요.”
로잘린은 얼굴에 생긴 상처 때문인지 많은 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것 같았다.
하지만 사냥제가 끝나고 나서 진행될 여러 행사까지 불참할 순 없을 텐데 어쩌려고 그러지.
그때쯤이면 세라엘은 이미 궁을 떠났겠지만, 필립의 손찌검으로 상처를 입은 로잘린을 떠올리자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앗…!”
사념에 잠긴 세라엘을 현실로 데려온 건 가슴께에 왈칵 느껴지는 축축함이었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자, 입고 있던 흰 드레스가 검붉은 액체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조금 전에 와인을 대접했던 하녀가 유리병을 든 채 당혹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어느 틈에 지척까지 달려온 렉터가 전에 없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하녀는 파리하게 질린 낯빛으로 엉망이 된 세라엘의 옷을 보다가 황급히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세상에! 이게 웬일이에요!”
화들짝 놀란 백작 부인이 뒤늦게나마 냅킨으로 닦아 주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액체는 이미 옷감 안으로 흡수되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손쓸 수 없이 젖어 드는 드레스를 보며 백작 부인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걸 어쩐담! 시합이 끝나자마자 수상식도 치를 텐데 부인의 드레스가 이래서야….”
하녀는 손을 덜덜 떨면서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수, 술을 드시지 않는다기에… 주스라도 챙겨드리려고 했는데….”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사달을 냅니까!”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악셀이 하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매서운 일갈에 하녀는 히익, 소리를 내며 냅다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사색이 된 그녀를 내려다보던 세라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악셀. 음료를 엎지른 것뿐이니 화내지 마.”
“불순물 없는 일반적인 포도 주스인 것 같아요.”
허공에 대고 코를 킁킁대던 콜이 여분의 냅킨을 건네주었다. 머리를 조아린 하녀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저, 저는 단지 귀부인께 음료를 드리고 싶어서….”
“호의에서 빚어진 실수를 질책할 마음은 없어요.”
세라엘은 하녀를 진정시키며 냅킨으로 옷을 대강 닦았다. 그러나 얼룩덜룩 엉망이 된 드레스는 물론 몸을 감싸는 찝찝함은 그대로였다.
소용없는 손짓을 몇 번 반복한 세라엘이 자포자기하여 냅킨을 내려놓았다. 사냥제가 끝난 후에 귀족들이 모일 것을 생각하면, 이런 차림으로 카에드를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처소에 다녀와야겠어요.”
“제가 동행해 드릴게요.”
오웬 백작 부인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세라엘은 도리질을 치며 그녀를 저지했다.
“괜찮아요. 마침 호위가 있으니 함께 다녀오면 될 것 같아요.”
로잘린의 부탁대로 황녀궁에서 편의를 받고 있단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라엘이 소년들에게 말했다.
“잠깐 다녀올까?”
예기치 않은 상황에 발켄족 소년들은 떨떠름한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변수를 전혀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기에 잠자코 세라엘을 따라 걸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며 뒷정리를 하던 하녀가 뒤늦게 스윽 시선을 들었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하녀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다.
***
마차를 타고 황녀궁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세라엘은 가슴께부터 허벅지까지 검붉은 얼룩이 진 드레스 차림으로 침실에 들어섰다. 일찍이 기척을 눈치채고 문 앞에 앉아 있던 레오가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짐 정리를 하고 있던 루시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요?”
“주스를 엎질렀어.”
“깜짝이야! 색깔 때문에 오해할 뻔했어요!”
루시는 분주히 움직이며 가방에서 여벌 드레스를 꺼냈다.
“하녀들이 자리를 비워서 목욕물도 달라고 하지 못할 텐데!”
“폐막식에 가는 것도 아닌데 목욕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사냥제가 언제 끝날지는 몰라도 세라엘 일행은 카에드가 돌아오는 즉시 궁을 떠날 계획이었다.
루시는 젖은 물수건을 준비하는 동안 소년들이 세라엘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루시는 쌍심지를 켜며 그들을 째려보았다.
“나가 있어!”
“응?”
“옷 갈아입으셔야 하는데 어딜 들어오는 거야!”
“앗, 나도 모르게 그만….”
엉거주춤 멈춰 선 소년들은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파렴치한으로 오인받기 싫었던 렉터가 서둘러 자신들의 행동을 변호했다.
“두목이 누님한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야.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문밖에서 기다릴게.”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고 그러니? 기껏해야 레오가 양탄자에 쉬를 하는 사고가 전부일 거야.”
루시의 꾸중에 소년들은 얌전히 문밖으로 향했다. 악셀은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아기 늑대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레오, 너도 이리 나와.”
익살스럽게 혀를 빼문 수컷 늑대까지 질질 끌려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 옷을 벗은 세라엘은 루시의 도움을 받아 끈적한 몸을 닦고, 새 슈미즈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저녁이라서 그런가 궁이 조용하네.”
점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창밖을 올려다보며 세라엘이 중얼거렸다. 루시는 그녀가 벗은 옷가지를 주섬주섬 개서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하녀들이 폐막식 준비를 도우러 떠났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몇 명 안 남아 있을 거예요.”
“어쩐지 오는 길에 사람이 별로 안 보이더라.”
“황녀 전하께선 궁 안에 계시는 것 같던걸요. 제가 짐을 챙기는 동안 간식을 가져다준 하녀가 말해 주었어요.”
루시가 말을 끝맺자마자 방 밖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머지않아 누군가 문짝을 두드렸고, 세라엘이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밖에는 오른쪽 뺨에 손바닥만 한 반창고를 붙인 로잘린이 하녀 한 명과 함께 서 있었다. 문을 지키고 서 있던 소년들은 약간 경계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로잘린.”
“세라엘이 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어요. 사냥제가 벌써 끝난 건가요?”
세라엘은 그녀의 반창고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아직 진행 중이에요. 옷이 더러워져서 갈아입으려고 저 혼자 잠깐 들른 거예요.”
“그랬군요.”
로잘린은 계면쩍은 얼굴로 제 반창고를 만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면 같이 차라도 마실래요?”
“차를요?”
“부담 갖지 말아요. 다시 숲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면 말리지 않을게요.”
로잘린은 두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녀의 제안에 긴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귀부인들이 자아내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으니, 궁으로 돌아온 김에 황녀와 짧게나마 시간을 보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좋아요.”
세라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잘린은 기쁜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3층에 실내 정원이 있는데 그곳에서 차를 대접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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