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14)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14화(114/150)
세라엘은 로잘린을 따라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소년들은 계속해서 밀려드는 예상 밖의 상황이 썩 달갑지 않은 눈치였으나 군말 없이 그녀를 뒤따랐다. 반면 루시는 카에드가 돌아오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짐 정리를 마저 하고 있겠다며, 레오와 함께 2층 침실에 머물기로 했다.
“이쪽이에요.”
로잘린이 이끈 3층의 홀 중앙에는 사면의 유리 벽이 세워진 작은 실내 정원이 있었다. 햇빛을 들여보내는 유리 천장이 뚫려 있진 않았지만, 투명한 벽면을 감싼 초목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이었다.
그 안에 자리한 티 테이블에 앉자 하녀가 요깃거리와 따뜻한 홍차를 가져다주었다.
“수행원분들의 충성심이 대단하네요.”
로잘린이 발켄족 소년들을 힐긋거리며 말했다. 그들은 유리 정원 바깥에 나란히 서서 세라엘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절대 눈을 떼지 말라던 카에드의 명령을 착실하게 이행하는 중이었다.
“남편이 임명한 제 전담 호위예요. 어리지만 실력이 확실한 아이들이거든요.”
“아이들…? 아무튼 그렇군요.”
로잘린은 아이라 칭하기엔 하나같이 장신에다 서슬 퍼런 낯을 한 그들을 보다가, 제 하녀를 향해 눈짓했다.
“마리, 대공작 부인의 수행원분들께도 다과를 가져다주겠니?”
“예, 전하.”
로잘린의 하녀는 그들 앞에도 샌드위치와 음료를 놓아 주었다. 소년들은 음식을 와구와구 먹으면서도 세라엘에게 꽂힌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약간 섬뜩할 정도로 괴이한 모습이었지만 로잘린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여기 있는 화초는 직접 기르신 거예요?”
세라엘이 온실 내를 가득 메운 각양각색의 화분을 둘러보며 말했다.
“맞아요. 저기 흰색 화분에 있는 나무는 10년 전부터 기르던 건데, 처음엔 내 손바닥만큼이나 작았답니다. 보다시피 지금은 나보다도 거대해졌지요.”
세라엘은 천장까지 솟은 나무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식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신가 봐요.”
“온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을 주게 되었어요. 여긴 황궁 안에서 유일하게 정이 가는 장소거든요.”
로잘린은 씁쓸한 낯으로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무게감이 남다른 말에 세라엘은 고개를 돌리고 로잘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으세요?”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갇혀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차를 한 모금 홀짝인 로잘린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스스로 황궁을 나갈 일은 결단코 없을 거예요.”
“어째서인가요?”
“궁 안에서 내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기 있는 마리를 포함해서요.”
로잘린은 살짝 미소 지으며 하녀를 응시하고 다시 세라엘을 마주 보았다.
“호위 기사 중 하나는 매달 편찮은 친모에게 약을 부치고 있는데, 그건 내 관할에 있는 궁내 약제실에서만 제조하는 약이거든요. 오라버니라면 절대 편의를 봐 주지 않았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외국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하거나 국내외적인 교류 활동에도 앞장서서 의무를 다해야 해요. 맡은 일이 있으니 책임감을 내팽개치고 달아나고 싶지는 않아요.”
차분히 말을 잇는 로잘린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짙은 녹안에도 강단이 어려 있었다. 황실에 애정이 있어서라기보다, 제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려는 굳건한 마음에서 불거진 의무감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세라엘이 다소 침울한 표정을 짓자,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로잘린이 탄식하며 힘없이 웃었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내 결혼 상대를 찾으면 올해 안으로 불가피하게 황궁을 떠나야 하겠죠. 어깨에 짊어진 의무를 내려놓겠지만 썩 홀가분하진 않네요.”
“로잘린의 결혼 상대를 황태자 전하가 정하시는 거예요…?”
“자신이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 적절한 짝을 골라 주겠다더군요. 지금도 열심히 물색 중일 거예요.”
세라엘은 침중해진 얼굴로 눈을 떨구었다. 이래서야 좋은 상대를 만날 가망조차 없지 않은가.
그 비열한 인간이 누이의 행복을 고려해서 정혼자를 선별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제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면 로잘린을 어디로든 떠밀고도 남을 인간이다. 결국 황녀는 원작대로 나이가 한참 많은 늙은이에게 팔려 가듯 결혼하는 건 아닐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세라엘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차기 황위에 오를 사람이 로잘린이면 좋겠어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려던 황녀가 어깨를 움찔하더니 당혹감을 내비쳤다.
“예? 그런 터무니없는….”
“왜요? 황위 계승 권리라면 로잘린도 가지고 있잖아요.”
세라엘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차를 홀짝였다. 로잘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고려해 본 적 없는 영역이에요. 제가 오라버니를 제치고 황위를 잇다니 불가능한 일이고요.”
“입에 쉽게 담을 수 없는 주제란 건 알아요. 그렇지만 황위에 오르면 정략혼으로 인해 궁을 떠날 일도 없을 테고, 좀 더 능동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황궁이 로잘린의 통제하에 들어오면 갇혀 있다는 느낌 또한 덜 받을지도 몰라요. 지금보다 운신도 자유로워질 테니까요.”
로잘린은 눈만 깜박거리며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시원찮은 반응에도 세라엘은 말을 계속했다.
“칼스비크에 교역항이 열리면서 오가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 요즘처럼 타국과 활발히 교류하며 격동하는 시기엔 외교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재목이라고 해요. 황녀로서 줄곧 대외적인 활동을 해 왔다면 그런 일에도 꽤 능숙할 텐데, 로잘린이 황위에 오르는 것도 마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거라면 지금 맡은 직책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황궁을 떠나면 그 어떤 직책도 맡지 못할 수도 있어요. 로잘린이 편의를 봐 주던 하인들도 곤란해지겠지요.”
“…….”
정곡을 찔린 듯 로잘린은 입을 뚝 다물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기색을 보였다.
물론 정실 소생의 황태자를 두고 서녀인 로잘린이 황위에 오르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궁 내에서 황태자와 황녀의 구도가 어떠한지, 각각의 지지자는 얼마나 많은지 자세히 아는 바도 없었다.
하지만 로잘린 본인에게 황위에 대한 욕심을 조금이나마 심어 주고 싶었다. 승계하고자 하는 야망이 필립에게 저항할 힘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세라엘이 이러한 이야기를 꺼낸 건, 정혼자의 정체도 모른 채 타인의 손에 삶을 맡겨야 하는 처지가 남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카에드의 입지를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는 필립보다는 로잘린이 황위를 잇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 넌지시 열어 본 화두였다.
마침 황제도 병중에 있으니 누가 계승권을 차지할지에 대해 고려하는 건 지금이 적기 아닌가. 로잘린을 본격적으로 지지하는 게 칼스비크의 안위에도 도움이 되지는 않을지, 카에드와 대화를 나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아….”
세라엘은 작은 탄식과 함께 관자놀이를 짚었다. 필립과 함께 사냥터에 나가 있을 그를 떠올리자 기나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괜찮아요?”
“네. 날이 벌써 어두워졌는데 사냥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봐요.”
“흥이 오르면 시간제한을 넘기고 새벽까지 이어질 수도 있답니다.”
“어두운 곳에서 무슨 사냥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대공이 걱정되어서 그런 거군요.”
“티가 났나 보네요. 너무 걱정돼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답답하기도 하고요.”
세라엘은 고개를 빼고 멀찍이 유리 벽 너머의 창문에 시선을 던졌다. 그런 그녀를 로잘린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략혼으로 만난 남자와 깊이 사랑에 빠진 그녀가 새삼 신기하게 다가왔다.
“대공을 사랑하시나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세라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시감을 동반한 질문이었다. 얼마간 황녀와 시선을 맞대던 세라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 그 사람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워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답하기 망설였던 것 같은데 이제 확실해졌나 보군요.”
세라엘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찻잔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보고 가벼이 웃은 로잘린이 말을 이었다.
“5년에 걸친 대공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보았네요.”
“5년이요?”
“부군께서 공작위를 처음 얻었을 때가 대략 5년 전이잖아요.”
세라엘이 턱을 갸우뚱 기울이자, 로잘린이 차를 홀짝이며 설명해 주었다.
“그분은 공작위를 얻자마자 귀족 사업가들의 사교 클럽과 연회에 자주 나타나 눈도장을 찍곤 했었어요. 사교성이 좋지 않은 남자가 어째서 북적북적한 행사에 빈번히 모습을 드러내는지 늘 의아했었죠. 칼스비크의 부흥을 위해 사업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만들고 싶어서 그랬다기엔… 글쎄, 토벌 원정 직전에도 힌델에서 개최된 모임에 참석할 정도였으니 단순히 친목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로잘린은 단언하는 어조로 덧붙였다.
“이유를 이제 알겠어요. 아마 주기적으로 밀로즈 후작을 만나기 위해 그랬던 건 아닌가 싶어요.”
세라엘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스쳤다. 친부가 자신을 팔아넘기려 했던 것도, 그와 카에드 사이에 만남이 오갔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오래되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5년 전이라면 세라엘은 아직 미성년이었다.
“이건 내 짐작인데, 아마 대공은 작위를 얻기 전부터 세라엘을 어딘가에서 보고 반했던 게 아닐까요? 귀족들과 대면할 수 있는 작위가 생기자 세라엘과 연을 잇기 위해 사업가 모임에 참석한 거지요.”
“그럼 5년은 더 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잖아요…. 절 어디서 보았을까요? 저는 남편이 저택을 찾아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로잘린이 말꼬리를 흐림과 동시에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짐작이네요.”
두 여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 틈에 온실 안으로 들어온 악셀이 쭈그려 앉아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어?”
“어차피 유리 벽 밖에서도 다 들려요.”
악셀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활짝 열린 온실의 유리문 사이로 콜과 렉터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두목한테 그냥 물어보면 될 걸 왜 궁금해하고만 있어요? 의문점은 많은데 모르는 게 낫겠다 싶어서 여태 안 물어본 건가요?”
“…….”
“근데 이제는 사랑한다면서요.”
악셀이 낄낄 웃으며 세라엘을 놀려댔다.
“두목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면서요. 마음 놓고 사랑하려면 의심스러운 점은 없애 버려야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찝찝할 것 같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인데?”
카에드를 향한 사랑 고백을 하필 저 개구쟁이에게 들켰단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러자 콜이 진지한 얼굴로 동의했다.
“맞아요. 의심스러운 사람이랑 어떻게 마음 편히 아기를 가지겠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답을 듣고 없애 버려요. 나는 하루빨리 두목과 누님을 빼닮은 아기를 보고 싶단 말이에요.”
“알았으니까 그만해….”
세라엘은 한 손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장난기를 보이지 않는 콜 때문에 더욱 열이 올랐다. 렉터가 그들을 향해 핀잔을 던졌다.
“세라엘 님을 놀리지 마! 두목한테 일러바치기 전에 당장 그만둬!”
“바보야. 이건 놀리는 게 아니라 그냥….”
실실대며 말을 잇던 악셀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웃음기를 싹 거둔 그는 턱을 홱 돌려서 어느 한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콜과 렉터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돌려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소년들이 감각을 기민하게 곤두세우는 모습에 세라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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