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17)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17화(117/150)
사냥 대회가 개최된 숲속은 이제 횃불을 밝히지 않으면 사위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뿔뿔이 흩어진 참가자들에게서 총탄 소리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시야가 어두워지자 다들 목표물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듯했다.
반면 그 컴컴한 숲길을 빛 한 자락 없이 걷는 남자들이 있었다.
“두목.”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카에드가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로이가 들쳐멘 멧돼지를 수레 안에 가뿐히 내던졌다. 멧돼지의 미간에는 탄흔이 정확하게 남아 있었다.
“북부 팀에 또 점수를 올리셨네요.”
카에드는 조금 전 쏘아 맞힌 사냥감을 응시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로이는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을 좇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백색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세라엘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숲 어귀에 마련된 대기석에서 귀부인들과 안전하게 있을 텐데 어째서 머나먼 황궁을 신경 쓰는 걸까.
“근방에 독사가 있다는데요.”
그를 지켜보던 로이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 시원찮은 놈이라 점수는 얼마 못 줄 것 같은데, 그래도 잡으러 가시겠어요?”
한참 동안 황궁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카에드가 나지막이 답했다.
“그래야겠지.”
일전에 로이가 제안했던 대로 카에드는 사냥제에서 필립을 암살할 계획이었다. 밀로즈 후작을 죽이겠다는 필립의 협박은 세라엘을 위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그를 제거하리라 결심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필립이 사라진다면 마땅한 후계가 없는 지금, 다음 황위 계승자는 로잘린이었다. 그렇다 해도 서출인 여자가 제위에 오르는 일은 이례적이니, 황위를 노리는 자들이 반발하며 황궁을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계승권을 놓고 벌어질 소란 따위 카에드가 알 바는 아니었다. 최종적인 목표는 칼스비크의 독립으로 인한 세라엘의 안전이었으니까.
하지만 황녀를 옹립하는 움직임에 대공으로서 힘을 실어 볼 계획이었다. 그 대가로 황녀는 카에드가 칼스비크의 독립을 추진하는 일에 있어 어떠한 이견 없이 응해야만 할 것이다.
로이는 수레 옆에 매어 둔 말의 안장 아래서 또 다른 엽총을 꺼내 건네주었다. 필립이 사살당한 뒤 범인 색출을 위해 황실에서 모든 참가자의 총을 조사할 경우를 대비하여 마련한 여분의 총이었다.
두 남자는 인기척을 완벽하게 죽이고 숲길을 걸었다. 머지않아 그들은 호숫가 근방에서 창으로 사슴을 잡고 있는 필립을 발견했다.
횃불을 든 그의 수행원들이 사슴을 빙글 에워쌌고, 이미 다리에 중상을 입은 사슴은 절뚝거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필립은 잘 걷지도 못하는 사슴을 창으로 신나게 찌르며 살생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벙글거리는 낯짝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쓰레기.”
동물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로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카에드는 장전한 총을 소리 없이 들어 올렸다. 총구는 필립의 미간을 겨누었다. 딱딱한 개머리판이 어깨에 닿는 감각은 유독 선연했다.
“…….”
여기서 끝내는 것이다. 저 버러지의 눈이 두 번 다시 세라엘을 향하는 일이 없도록, 지저분한 주둥이에 그녀의 이름을 올릴 수도 없게 총알을 박아 넣는 것이다.
필립 하나를 죽인다고 해서 비아테 황가와 오래도록 이어져 온 악연을 끊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고 나면 저 비열한 치가 세라엘을 위협할 일만큼은 없을 것이다. 그토록 고대해 왔던 북부의 독립도 더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터였다.
차가운 손끝에 방아쇠가 걸렸다. 카에드는 줄곧 노리고 있었던 사냥감을 전에 없이 냉정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두목!”
헛숨을 들이켠 로이의 목소리가 카에드의 주의를 흩트렸다. 로이는 뒤돌아 어느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찍이 풀숲을 달려오는 발소리가 귓전에 번졌다. 엽총을 거둬들이고 뒤를 돌아본 카에드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
악셀은 4층 복도 안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침실을 하나하나 열어 보더니, 어떤 곳에서는 흰 시트를 어깨에 걸친 채로 나왔다.
곧 악셀은 복도 끝에 있는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 안을 둘러보았다. 다시 방 밖으로 나온 그가 일행에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들은 오래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내려앉은 너른 침실로 들어섰다. 앞장서 들어간 콜은 열린 창문 앞에 서서 심각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로잘린과 하녀는 침대 벤치 위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황녀는 둘째 치고 하녀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거구의 사내에게 몇 번이고 채였으니 어쩌면 뼈만 부러진 게 아닐지도 몰랐다.
세라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다 콜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창문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황녀궁의 뒤쪽에는 후원이 있었다. 네모나게 다듬어진 관목 울타리 안에는 알록달록한 화단이 있었고, 중앙에는 거대한 석조 분수대가 자리했다. 그러나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아찔한 높이에 눈앞이 다 어지러웠다.
“건물 뒤편으로 뚫린 창문이라 다행히 아무도 안 보이네요. 저 길로 빠지면 북쪽 숲을 향해서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콜은 후원과 이어지는 산책길을 가리켰다. 아마 사냥제가 진행 중인 숲과 연결된 길인 듯했다. 무사히 내려가기만 한다면 자객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희망적이었다.
콜이 로잘린을 불러 자신이 판단한 게 맞는지 확인했다. 그동안 세라엘은 불안감에 휩싸여 연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 과연 까마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리고도 무사할 수 있을까. 차마 꺼내지 못한 의문이 혀끝에 걸렸다. 세라엘의 염려를 읽은 악셀이 입을 열었다.
“이 높이에서 그냥 뛰어내리는 건 자살행위예요.”
악셀은 침실에 일일이 들러서 가지고 나왔던 시트들을 한데 묶어 기다란 줄처럼 만들었다. 어떤 용도인지 알아챈 세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창문에 고정해서 타고 내려갈 생각이구나.”
“맞아요. 이 정도 길이면 땅까지 닿지는 않아도 안전하게 착지할 거예요.”
줄을 만들던 악셀이 콜을 돌아보았다.
“내가 누님과 레오를 데리고 내려갈 테니까, 나보다 완력이 더 센 형이 황녀와 하녀를 한 번에 맡아줘.”
“알았어.”
콜은 의젓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섬유가 얇아서 찢어질 수도 있겠어. 안전을 위해서 한 차례씩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악셀은 로잘린과 하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콜이 줄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어깨에 매달려 있을 수 있겠어요? 떨어지면 큰일 나니까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해요.”
하녀를 살펴보고 있던 로잘린이 망연자실 도리질을 쳤다.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마리의 부상이 보기보다 심한 것 같아요.”
“…당신 팔은 어때요?”
로잘린은 괴한에게 잡혔던 팔을 내려다보았다. 마구잡이로 당겨진 탓에 어깨가 완전히 탈구되어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악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콜에게 뭐라 조용히 속삭였다.
중간중간 어두운 표정으로 세라엘을 힐끔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세라엘은 직감적으로 콜이 부상자 둘을 한꺼번에 데리고 내려가는 건 무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어떻게 하려는 걸까. 세라엘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저들이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로잘린과 하녀를 구해 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악셀은 결연한 표정으로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세라엘이 선수를 쳤다.
“다 같이 내려가는 거야. 그렇지?”
“…물론이죠. 하지만 팔을 다친 사람을 한 번에 두 명씩 데리고 줄을 타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부상자는 한 명씩만 안고 내려갈 계획이에요. 한쪽 팔을 전혀 쓰지 못하니까 그편이 안정적일 거예요.”
“한 명씩만…?”
퍼뜩 스친 생각에 세라엘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 사이 콜은 시트를 이어 만든 줄을 창가 근처에 묶고 밖으로 길게 늘어뜨렸다. 악셀은 그를 힐긋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콜이 누님과 레오를 한 번에 데리고 내려갈 거예요. 레오는 가벼운 편이고 잘 매달려 있을 테니까, 처음 계획처럼 다치지 않은 누님과 같이 가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다음에는 제가 황녀를 데리고 갈 거고요.”
세라엘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그렇게 되면 혼자 남는 사람이 생기잖아….”
충격받은 그녀의 눈이 어깨를 틀어쥔 하녀에게로 향했다. 듣고 있던 로잘린이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황녀는 손끝이 하얘질 만큼 악셀의 옷자락을 꽉 틀어잡았다.
“부탁이에요! 마리를 두고 가지 말아요!”
“아무도 두고 가지 않을 거예요.”
“어릴 때 궁에 들어와 나 하나만 보고 살아온 아이인데…!”
제 운명을 예감한 하녀는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한낱 사용인에 지나지 않는 자신이 중상까지 입었으니 토를 달 수도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모두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아요.”
“마리….”
“전하와 대공작 부인께서 먼저 빠져나가셔야 해요.”
악셀은 난색이 물든 얼굴로 로잘린의 손을 떼어 냈다.
“진정하고 끝까지 들어 주세요. 제가 당신을 내려놓은 다음에, 다시 줄을 타고 올라와서 저 하녀를 데리러 올 거예요. 그러면 모두가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어요.”
“안전하다니요…! 만약 그사이에 놈들이 들어와 버린다면 마리는…!”
“그러니까 저 형보다 빠른 제가 하겠다는 거잖아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라엘은 입술을 짓씹으며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문을 쾅!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세라엘은 채찍이라도 맞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아까보다 머릿수가 더 많은 자객들이 4층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내려갔겠어!”
콜이 다급히 속삭이자 악셀은 세라엘의 팔을 붙들고 창문 가까이 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랄 새도 없었다. 창가에 한쪽 발을 걸치고 앉은 콜이 그녀를 끌어당기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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