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20)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20화(120/150)
‘어떻게 해야 하지.’
컴컴한 시야 속에 가둬진 세라엘은 입술을 깨물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정황상 카에드에게 줄곧 원한을 품고 있던 황태자의 소행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인질극이라도 벌이려는 걸까?
필립의 번드러운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이가 갈렸다. 세라엘은 몸을 한 번 더 꿈틀거렸다.
손목을 꽉 감은 줄은 풀 수 없겠지만, 두 눈을 두른 안대는 제법 헐거운 편이었다. 얼굴을 이리저리 문대면 어떻게든 벗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다음은? 홀로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이곳이 어디인지 갈피도 잡을 수 없는 데다, 괴한들이 사방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얌전히 앉아 누군가 구해 주러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때까지 놈들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어.’
황태자의 명을 받은 놈들은 황녀궁에 쳐들어와 로잘린까지 망설임 없이 해치려고 했다. 제 이복누이까지 해하려 했던 자가 원한을 품은 남자의 아내를 가만 내버려 두기만 할까.
뭐가 어떻게 되었든 일단 안대부터 풀고 주변을 둘러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어…!”
그리 결심한 순간, 아득한 곳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려왔다. 세라엘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곧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에 집중했다. 멀리서 물건을 집어 던지고 유리 같은 것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자객들이 내분을 일으키고 있는 걸까? 아니면 사태를 전해 들은 카에드가 벌써 그녀를 구하러 와 준 것일 수도 있었다. 세라엘을 쫓아오면 해코지하겠다고 단단히 을러 놓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카에드가 아니었으니까.
그 생각을 하자 용기가 생긴 세라엘은 어깻죽지에 이마를 대고 안대를 세차게 문질렀다. 안대는 금세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둠에서 벗어난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
점점 또렷해지는 시야로 비친 건 자그마한 침실이었다. 방 안에는 침대와 테이블 등 최소한의 가구만 놓여 있었고, 공간을 둘러싼 네 개의 벽은 어두운색의 통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곳곳에 먼지가 쌓인 걸로 보아 사람이 오래도록 거주하는 장소는 아닌 듯했다.
세라엘은 무릎걸음으로 탁자 가까이 살금살금 다가가 그 위를 살폈다. 촛대에서 흘러나온 촛농이 엉망으로 굳어 있을 뿐, 결박을 풀 만한 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창문 또한 굳게 닫혀 있었으나 열어 보지 않기로 했다. 만에 하나 바깥을 지키는 놈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시선은 자연스레 침실 문으로 향했다.
‘역시 나가 볼 수밖에 없어.’
간신히 몸을 일으킨 세라엘은 문 앞에 서서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식은땀이 밴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젖혔다.
끼익, 녹슨 경첩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으나 기척을 알아채고 달려오는 자는 없었다. 세라엘은 천천히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널찍한 홀에는 흔들의자와 촛불이 놓인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근처에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서 있는 곳이 가택의 최상층인 듯했다.
세라엘은 계단 난간을 잡고 슬쩍 몸을 기울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적어도 3층은 될 법한 높이였다.
두런두런 말소리와 간간이 터져 나오는 고함은 1층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붉은 옷을 입은 자객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다시 상체를 물린 세라엘은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숨을 내리 쉬었다. 심장이 쉴 새 없이 팔딱거렸지만, 층계를 내려가기 전에 상황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처음 황녀궁에 들어왔던 놈이 대략 열 명 정도. 모두 발켄족 소년들이 처리했다. 그다음에는 스무 명 가까이 쳐들어왔었지. 그중 다섯은 출입구를 지키다 후원으로 들어왔지만 콜 혼자서 해치웠다. 그렇다면 남은 자객은 대략 열다섯 명이다.
열다섯 명. 성인 남자 하나도 당해 내기 어려운데 도저히 맞설 수 있는 머릿수가 아니었다.
섣부른 짓은 하지 말고 처음 눈을 떴던 침실로 돌아갈까. 아니면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주변을 살피며 출구를 찾아봐야 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세라엘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험한 꼴을 보기 전에 뭐라도 적극적으로 해 보는 편이 나았다.
곧 그녀는 살금살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 누구도 마주치지 않은 것이 수상할 정도였다.
“약속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잖아!”
1층에 발을 내딛자마자 층계 바로 옆 방에서 괴한의 고함이 들려왔다. 가래가 낀 것처럼 매끄럽지 못한 목소리는 앞서 세라엘의 목덜미에 칼날을 댔던 자의 것이었다.
“그 흰머리가 우릴 엿 먹인 게 틀림없어. 그게 아니고서야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대체 뭐겠어!”
“진정해, 대장. 귀족 놈들이 벌이는 행사에 차질이 생겼을 수도 있겠지. 만일을 대비해 아까 절반으로 갈라져서 흰머리를 찾으러 갔잖아.”
흰머리는 분명 황태자를 지칭하는 말일 테다. 등장하지 않는 그를 찾으러 몇몇이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어쩐지 가택 내에 있는 자객의 수가 적은 것 같더라니, 대략 일곱 명 정도가 이 안에 있는 거겠지.
세라엘은 살짝 열린 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도, 출구를 찾아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그놈 사정을 봐주고 있을 때야?”
주먹이 테이블을 쾅!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깜짝 놀란 그녀는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제기랄! 우리 쪽은 벌써 열 명이 넘게 죽었다고! 그 망할 흰머리 놈이 우리 쪽에서 피를 볼 일은 없을 거라며 고용비까지 실컷 깎아 먹은 거 다들 기억 안 나?”
“맞는 말이야. 황녀궁 안에 있는 금발 여자를 납치해서 넘기면 끝날 줄 알았더니만,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잖아.”
“어쩐지 다섯 명이서 해치울 수 있는 일을 두고 자객 단원 전부를 고용하겠다며 고집부릴 때부터 수상했어. 빌어먹을, 그 흰머리 놈은 우리가 누굴 상대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분기를 이기지 못한 사내가 화병을 재차 내던지며 괴성을 질렀다.
“마취 독을 네 방이나 맞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괴물 놈을 어떻게 상대해! 대체 뭐 하는 여자길래 그런 놈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거야!”
세라엘은 방문을 의식하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디뎠다. 복도 곳곳에 문이 자리하여 도대체 어디가 출입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야. 황녀궁의 4층으로 올라가면서 보았더니 처음 진입한 놈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더군. 그놈들,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머릿수도 둘밖에 되지 않았잖아.”
“난 그놈 중 하나가 다섯을 해치우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어. 덩치는 더럽게 큰 주제에 어찌나 잽싸던지 눈 깜짝할 새에 우리를 처리했다고.”
자객단의 대장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놈들에게도 우두머리가 있는 것 같더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쯤 세라엘은 출입구로 추정되는 문을 발견하여 숨을 죽인 채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문 바로 옆에 자리한 유리창 덕분에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약한 귀족 여자 하나를 빼돌리는 일인 줄 알았더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흰머리가 나타나지 않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여자를 황궁에다 다시 데려다 놓아야 하는 거 아냐?”
“헛소리 집어치워! 놈에게서 아직 고용비의 절반을 받지 못했잖아. 그전까지 여자는 아무 데도 가서는 안 돼.”
의지와 관계없이 호흡이 짧아지면서 차가워진 손끝에 땀이 배었다. 문고리를 잡자 밧줄로 결박된 손목에서 찌릿한 아픔이 전해져 왔다. 그때, 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고함치듯 말했다.
“이봐, 스테판.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여자가 깨어났는지 보고 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면 찬물을 뿌려서 깨워. 흰머리가 오기 전에 물어볼 게 있으니까.”
“알겠어.”
세라엘이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등 뒤로 사내가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속력으로 뜀박질을 한 것처럼 가슴속이 쿵쿵 뛰어댔다. 빨리, 이 모습을 들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덜컥, 그가 방문을 열고 나옴과 동시에 세라엘은 후다닥 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혹여 들킨 건 아닐까. 그녀는 문을 닫고 나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귀를 기울였다.
들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안도감에 젖을 순 없었다. 세라엘은 사위가 어두운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출입구 밖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세라엘은 급한 대로 근처 덤불 뒤에 몸을 숨기고 어수선한 호흡을 골랐다. 그녀의 부재를 눈치채기까지 시간 싸움이었기에 서둘러 길을 파악하고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놀랍게도 가택은 인적이 없는 길가에 홀로 세워져 있었다. 맞은편에는 광활한 숲이 자리했고, 그 가운데에는 마차가 다니는 평평한 자갈길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나마 가택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아니었다면 짙은 어둠에 잠식되어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높이 솟아오른 백색 황궁이 보였다. 세라엘은 이곳이 궁과 시가지, 성벽까지 통과해야 나오는 외진 곳이란 걸 알아차렸다. 예상보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이, 일단….’
사내들이 타고 온 말이 지척의 말뚝에 매어져 있었다. 세라엘은 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승마하는 법을 배워 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말은 고삐를 잡아당겨도 움직이지 않았다. 꼬리를 펄럭이며 투레질 소리만 크게 낼 뿐이었다. 이러다간 말이 내는 소리가 사내들의 주의를 잡아끌고 말 것이다.
‘안 되겠어.’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다락으로 올라간 사내가 그녀의 부재를 눈치채기 전까지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했다.
세라엘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무작정 황궁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갈로 포장된 길 한가운데가 아닌, 듬성듬성 덤불이 나고 흙이 깔린 길섶을 달렸다. 혹여 사내들에게 따라잡힌대도 덤불 속에 숨는다면 그녀를 찾지 못하고 지나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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