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21)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21화(121/150)
두 손이 포박된 채로 허둥지둥 달리자 금세 숨이 가빠 왔다.
세라엘은 헉헉대면서도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머지않아 등 뒤에서 목재 문이 벌컥 열리며 매서운 고함이 떨어졌다.
“제기랄! 여자가 도망쳤어!”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 당장 근처를 둘러봐!”
세라엘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안간힘을 쓰며 걸음을 재촉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면서 발목에 추를 매단 것처럼 다리가 무거웠다.
마취 독이 너무 강했던 걸까. 평소보다 저조한 체력 때문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쫓고 쫓기는 상황이 되니 뜀박질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불현듯 말발굽의 묵직한 울림이 느껴졌다. 그녀가 향하던 방향으로부터 대여섯 마리의 말에 오른 남자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세라엘은 길가 쪽으로 발을 헛디뎠다. 두 손이 결박되어 있던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가택을 향해 달려오던 남자들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속도를 늦추었다. 세라엘은 무릎이 아픈 와중에도, 다가온 사람이 카에드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멈춰라!”
중앙에 선 남자가 크게 소리 지르며 고삐를 홱 당겼다. 눈처럼 새하얀 백마는 세라엘의 목전에서 앞발질하며 기세 좋게 울부짖었다. 안도감에 젖어 들려던 세라엘의 눈이 당혹스러운 빛을 머금었다.
남자의 양옆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횃불을 든 채 갈색 말을 타고 있었다. 샛노란 불빛이 밝힌 그들의 갑옷에는 세라엘도 익히 아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 눈의 흰 독사가 교차한 검 두 개를 감은 문양이었다.
세라엘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났다. 중앙에 선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그가 필립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야.”
필립은 미간을 좁히며 횃불로 세라엘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게 왜 여기 나와 있는 거야?”
세라엘은 눈동자만 굴려 등 뒤를 의식했다. 통나무집에서 나온 사내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고, 눈앞에는 필립과 그의 호위 기사들이 있었다. 어디에도 도망갈 곳은 없었다.
“이제서야 도착하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세라엘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사내가 분기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필립의 붉은 눈이 험악한 빛을 띠었다.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언성을 높이느냐? 너희야말로….”
매몰차게 말을 잇던 필립이 별안간 세라엘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사내를 직시하는 필립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쓸데없이 듣는 귀가 있어서는 안 되겠지.”
필립이 말을 끝맺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온 사내가 세라엘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칼칼한 냄새가 나는 헝겊이 다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심한 현기증이 일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희미해지는 시야에 비친 필립은 험상궂은 얼굴로 자객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설명 좀 해 보실까? 술래잡기라도 하고 있던 거야, 뭐야?”
“따지고 싶은 건 우리 쪽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약속했던 것과 다르지 않소!”
“여자 하나 간수도 못 한 놈들이 말이 많군그래. 저게 나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도망을….”
윽박지르는 필립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속수무책으로 흐려지는 머릿속을 다잡을 재간이 없었다. 기를 쓰고 달아났던 것이 무색하게도, 세라엘은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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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엘은 다락 침실 안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낯설지만은 않은 공간이 시야에 들어오자, 도망쳤던 것이 예지몽은 아니었나 싶은 착각이 일었다.
“으….”
머리가 지끈거렸고 귓전에 이명이 울렸다. 독한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누군가 어지럼증을 앓는 그녀의 어깨를 틀어쥐고 마구 흔들면 이런 기분일까.
세라엘은 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였다. 처음 눈을 떴을 때와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고매하신 부인께서 꼴이 말이 아니시구먼그래.”
조소 어린 목소리는 기름칠한 듯 미끄러웠다. 문 앞에 서 있던 필립은 즐거운 표정으로 세라엘의 몰골을 내리훑었다.
가뜩이나 가느다란 백금빛의 머리칼은 너울너울 산발한 상태였고, 드레스는 흙투성이에다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필립은 입매를 비틀었다.
“설마 저놈들이 너를 욕보인 건 아니지?”
“단단히 미치셨군요.”
머릿속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강한 노기가 고개를 쳐들었다. 필립은 뚜벅뚜벅 걸어와 그녀 앞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제정신인데?”
얄밉게 되받아친 필립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세라엘은 눈을 치뜨고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필립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죽으로 된 물병을 내밀었다.
“물을 마시겠나?”
그리 물으면서도, 황태자는 물통의 주둥이에 달린 걸이에 손가락을 끼고 대롱대롱 흔들어 보였다. 명백히 그녀를 약 올리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마취 독이 제법 강한 편이거든. 수분을 섭취해서 조금이라도 해독을 하는 게 나을걸.”
“날 여기로 끌고 온 이유가 내 남편에게 앙갚음하기 위해서인가요?”
세라엘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흠, 콧숨을 내쉰 필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린애 다툼도 아니고 앙갚음이 뭐야. 정치사적인 분쟁이라고 칭하면 어떨까? 무지한 여자는 알 턱이 없는.”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요?”
세라엘이 싸늘하게 되받아쳤다.
“저 남자들을 사주해서 황녀궁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황녀와 내게 위해를 가하고도 정말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이 사실은 남편뿐만이 아니라 내 사용인들, 황궁 하인들도 알고 있어요.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머지않아 온 제국민이 알게 될 거예요.”
자존심 강한 필립의 안면이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세라엘의 말을 듣고 두려운 게 아니라, 말대꾸하듯 따지는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밀로즈 후작이 자식 교육을 단단히 잘못했어. 하늘 같은 황족을 대하는 태도가 버르장머리 없기 짝이 없군그래.”
“무뢰배를 시켜 저를 납치하고, 협박하듯 으르고 계시면서 제가 예의를 차리길 바라시는 건가요?”
“전제부터 잘못되었잖아. 납치는 무슨, 내가 널 뭐에다 쓰려고 납치를 하겠어?”
“목적이 무엇이든 상대의 동의 없이 강제로 끌고 가는 게 납치예요.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으니 당신은 절대로 문책을 피할 수가 없을 거예요.”
“증거도 증인도 없는데 무슨 수로?”
필립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증인도 없을 거라는 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떻게 밝힐 건데? 넌 여기서 어떻게 나갈 거고?”
그는 잇달아 의문을 표했다. 그러더니 세라엘의 손목을 빈틈없이 두르고 있던 결박을 풀어 주었다.
“한번 도망쳐 봐.”
“…….”
“풀어줬잖아. 열심히 도망쳐서 살려달라고 소리라도 질러 봐.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는지 지켜봐 줄게.”
달아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필립의 기사들까지 가세했으니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필립의 요구대로 응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난 여기서 나가지 않을 거예요.”
세라엘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처럼 고분고분해지지 않는 그녀를 보며 필립은 미간을 구겼다.
“남편이 나를 찾으러 와 줄 테니까요.”
“너 말이야. 그 정도로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내가 잘못 판단했던 것 같네.”
필립은 세라엘이 내달렸던 길을 가리키듯 닫힌 창문을 턱짓했다.
“아까 밖으로 나왔을 때 황궁이 손톱만큼 작아 보였던 거 기억나지? 여기는 제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외곽이야. 그놈이 무슨 수로 여길 와? 상식적으로 추적은 불가능하지.”
“…….”
“게다가 좋든 싫든 너는 곧 이곳에서 나갈 예정이거든.”
세라엘은 불쾌하리만치 번들대는 그의 낯에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입술을 짓씹으며 삼켜 냈다. 답이 없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필립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단 마셔.”
필립은 코앞에 다시 물통을 내밀며 명령했다. 세라엘은 고집스럽게 턱을 비틀었다. 미치지 않은 이상 그 물을 넙죽 마실 리가 없었다.
“마시라니까?”
“…….”
불복종이 이어지자 필립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필립은 물통의 뚜껑을 천천히 돌려 열었다. 그러고는 물통을 쥔 손을 들고 세라엘의 머리 위로 기울였다.
차가운 액체가 정수리를 적셨다. 짙은 악의나 다름없는 그것은 미세하게 떨리는 뺨과 목덜미, 어깨와 가슴께까지 흘러내렸다. 진득한 불쾌감이 몸 이곳저곳에 달라붙었다.
필립은 팔을 탁탁 흔들어서 물통 안에 든 마지막 한 방울까지 흩뿌리는 수고를 들였다. 몸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나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선명했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고 있어.”
세라엘은 얼룩지는 바닥을 응시하던 눈을 들어 필립을 쏘아보았다. 있는 힘껏 그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다락 침실 문을 정중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필립의 기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쪽지가 들려 있었다.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전하. 다콘 왕국으로 떠나는 무역선이 항구에 준비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한 시간 내로 출항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좋아, 슬슬 떠날 때가 되었군.”
필립은 접었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라엘은 당혹감에 휩싸여 입술을 벌렸다. 다콘 왕국, 출항. 그 단어만으로도 황태자가 그녀를 배에 태워 외국으로 보낼 계획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용한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손해를 보았으니 비용이라도 더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만….”
“도대체가 천민들이란 말을 해도 알아 들어먹지를 못하는군. 귀찮으니 지금 없애 버려.”
필립은 귀찮다는 듯 손짓하며 명령했다.
바로 그 순간, 세라엘은 미묘한 기척을 감지하고서 고개를 쳐들었다. 어디서부터 느껴지는 건지 헤아려 보기도 전에 눈길은 자연스레 창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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