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22)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22화(122/150)
‘…뭐지?’
잘못 들었던 걸까.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녀와 달리 필립과 기사는 어떠한 기색도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필립을 응시하며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던 기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하를 찾아 떠났던 놈들의 일행까지 돌아와 합류한 상태입니다. 수가 열다섯쯤 되는데 저희가 한 번에 처리하기는 어려운 머릿수입니다.”
필립은 대번에 눈을 부라렸다.
“그리 무능해서는 차기 황제를 대체 무슨 수로 지키겠다는 거야?”
기사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곧 필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적당히 달래서 협상할 수밖에 없겠군. 비켜서라. 내가 놈들의 대장과 대화를 해 볼 터이니.”
필립은 방 밖으로 나서기 전에 세라엘을 한번 돌아보았다.
“달아나지 못하게 문은 자물쇠로 잠가 놔. 저 여자가 도망쳐 봤자 얼마나 갈 수 있겠냐마는, 불가촉천민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지.”
“알겠습니다.”
이내 문이 닫히면서 자물쇠가 덜컥이는 소리가 났다. 세라엘은 망연자실하여 닫힌 문을 응시하다, 두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처럼 독한 무기력감에 휩싸인 건 난생처음이었다.
힌델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라는데 카에드 일행이 여기를 찾아와 줄 수 있을까. 정말 이대로 배에 실려 낯선 왕국으로 보내지는 건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문 사념이 그녀를 점점 수렁에 빠뜨렸다.
하지만 조금 전 묘하게 와 닿았던 느낌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세라엘은 물먹은 솜처럼 기운 빠지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그대로 손을 뻗어 굳게 닫힌 창문을 열어젖혔다. 종전과 달리 그녀가 갇혀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
정적과 어둠이 감싼 길가에서는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서부터 번져 나가는 작은 불빛은 아무것도 잡아내지 못했고, 어떠한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밤 벌레가 찌르륵 우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저 느낌뿐이었던 걸까? 세라엘은 자신이 감지했던 감각의 출처를 찾기 위해 몸을 물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카에드의 자취를 애타게 찾았다.
불현듯 벌레 우는 소리가 가위로 잘린 것처럼 뚝 멈추었다.
“……?”
여전히 시야에 들어오는 건 없었으나 강한 위화감이 몰려왔다. 평화롭게 울던 벌레들은 분명 안식을 방해받아 울음을 멈춘 것이다.
저 짙은 암흑 속에 누군가 있다. 기척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그녀가 익히 아는 누군가가.
세라엘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제 위치를 알리려 창밖으로 쭉 상체를 내밀었다. 그러다 1층에서 망을 보고 있던 괴한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너! 당장 그 얼굴 집어넣어!”
그는 빼꼼 고개를 내민 세라엘을 가리키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난데없이 윽박을 맞은 세라엘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안 들어가?”
남자는 당장 위층으로 올라가겠다는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덜컥 겁을 집어먹은 세라엘이 몸을 물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서걱, 무언가 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이 툭 잘려져 나갔다. 세라엘은 비명을 집어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둔중한 몸뚱어리는 썩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고, 그녀를 노려보았던 남자의 머리통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앞서 소리로 경험해 보았던 것이었으나 두 눈으로 보는 건 차원이 달랐다.
“우욱….”
속에서 울컥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창가에서 물러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뜻하지 않게 목격한 참혹한 광경 때문인지 목이 죄인 것처럼 숨쉬기가 어려웠고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엉망이 된 속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아래층에서 큰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부수고, 찌르고,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눈에 담지 않아도 끔찍한 장면들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분명 카에드 일행이었다. 세라엘은 창백한 얼굴로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자물쇠로 잠겨 있겠지만, 저 문을 열려는 시도를 해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난리통에 또다시 인질로 잡혔다간 어떤 사달이 날지 몰랐다. 지켜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불리해진다는 악셀의 말이 떠올라, 문을 박차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았다.
세라엘은 두 귀를 막고 눈을 꼭 감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무력감에 휩싸인 자신이 싫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순간, 나무 계단을 부술 듯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에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세라엘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저 괴물 같은 놈들이 올라오기 전에 얼른 열어!”
예상을 깨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녀의 목에 날붙이를 그으려 했던 남자의 것이었다. 위기에 몰린 자객들이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 올라온 게 틀림없었다.
자물쇠가 마구 철컥거렸다. 세라엘은 무기 하나 없는 휑한 침실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렸다. 그사이에 붉은 옷을 입은 네 명의 사내가 허겁지겁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리 와!”
연극에서 쓰는 탈처럼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진 얼굴을 한 사내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가뜩이나 힘이 빠진 여자의 발악은 사내에게 있어 우습지도 않은 일이었다. 우악스러운 손에 팔목이 잡히자 고통을 참지 못한 세라엘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때였다. 문을 등진 채 세라엘을 응시하던 다른 사내의 목이 단번에 베어져 나갔던 순간이.
“……!”
조금 전까지 생명이 붙어 있었던 몸이 순식간에 주검이 되어 고꾸라졌다. 그 위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세라엘이 애타게 기다리던 남자였다.
카에드는 어떠한 표정도 없이 서늘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방 안에서도 번득이는 눈동자는 광기나 다름없는 이채를 띠었고, 제 것이 아님이 분명한 피가 튀긴 얼굴은 숨이 막히도록 섬뜩함을 자아냈다.
“으, 으아!”
공포감에 휩싸인 자객 둘이 그에게 냅다 달려들었다. 카에드는 피로 물든 단도를 역수로 고쳐 쥐고 제 앞을 막아선 그들에게 꽂아 넣었다.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일행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본 자객단의 대장은 이를 갈며 세라엘을 앞으로 내세웠다. 세라엘은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힘을 쥐어짜며 제 목을 두른 남자의 팔을 마구 할퀴었다. 필사적인 저항은 여전히 무용지물이었다.
사내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카에드를 향해 단도를 내보였다.
“이 괴물! 다가오지 마!”
“…….”
“다가오지 말라고 했어! 네 여자가 눈앞에서 죽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겠지?”
칼끝은 재차 그녀의 목덜미로 향했다. 카에드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넘기며 세라엘을 똑바로 직시했다. 더없이 냉랭한 낯에 균열이 가면서 그의 입술이 벌어지고 가슴팍이 한번 크게 들썩였다.
이어 날카로운 눈초리가 세라엘의 목 부근을 훑었다. 아까 전 사내의 칼에 베인 생채기를 보는 게 틀림없었다.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려 사내와 눈을 맞춘 카에드의 낯이 음산하리만큼 얼어붙어 있었다.
“너였구나.”
나직한 목소리가 팽팽하게 날이 선 공기를 갈랐다. 카에드는 쥐고 있던 단도를 떨어뜨렸다. 날붙이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는 절망적이었다.
“아, 안 돼요!”
그가 투항했다고 생각한 세라엘이 아연실색하여 외쳤다. 무기를 놓으면 이 비열한 남자가 그에게 어떤 짓을 할지 두려웠다. 숨소리가 닿을 만큼 가까이 선 사내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좋아. 내가 지나갈 수 있게 그대로 물러서.”
남자가 말을 끝맺자마자 카에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침없이 거리가 좁혀지자 당황한 남자는 저도 모르게 세라엘을 밀치듯 놓았다. 그러고는 칼을 쥐어 방어 태세를 취했다.
카에드는 너무나 손쉽게도 그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그의 목을 틀어잡았다. 귀신같은 속도에 사내는 제 목이 잡혔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사내는 끔찍한 쇳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반항했다.
카에드는 그의 목을 틀어쥔 한 손에 힘을 주어 그대로 느릿느릿 허공에 들어 올렸다.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꺽꺽대며 두 다리를 세차게 버둥거렸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세라엘은 손으로 바닥을 짚다 무심코 죽은 자객의 머리를 스쳤다. 빛을 잃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기함할 듯 숨을 집어삼켰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 침대 옆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사내의 몸부림에서 점차 힘이 빠지고 있었다. 금속체도 부서뜨리는 손아귀에 잡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던 사내의 얼굴에 자울자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세라엘을 거뜬히 제압했던 남자가 카에드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눈이 희게 까뒤집어질 때쯤 카에드는 목을 틀어쥔 손을 놓았다. 꺼져 가던 생명을 간신히 붙잡은 사내는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
서늘한 눈으로 사내를 내려다보던 카에드는 곧 구석에 웅크린 세라엘을 찾아냈다. 그녀는 물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에드의 뇌리에만 존재하는 오랜 기억을 들쑤시는 처량한 모습이었다.
보폭을 넓혀 다가온 카에드가 세라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선뜻 그의 손을 잡지 못했다. 시선을 내린 카에드는 그제야 제 손이 벌건 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건조한 탄식을 뱉은 그가 잠시 제 손을 내려다보다, 침대 위 베갯잇에 손을 문대어 피를 닦았다. 그러고는 쭈그려 앉은 그녀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끈적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핏기가 스며들어 여전히 빨간 손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