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25)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25화(125/150)
“당신이랑 좀 걷고 싶어요.”
성큼 몸을 일으킨 카에드가 그녀의 안색을 확인하듯 두 뺨을 움켜쥐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네. 해가 저물기 전에 나가고 싶어요. 햇살도 좋아 보이는걸요.”
“알았습니다. 잠깐 기다려요.”
말을 마친 카에드는 침실을 나가더니 두툼한 겉옷 두 개와 희고 뭉실뭉실한 양털 담요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세라엘에게 손수 겉옷을 껴입히고 그 위로 담요까지 둘렀다.
“갈까요?”
“…….”
세라엘은 제 꼬락서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털 깎는 시기를 놓친 통통한 양이 따로 없었다.
“이런 차림으로 산책을 가요?”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요.”
“밖이 그렇게 추워 보이지는 않는데….”
햇빛을 환하게 투과하는 창문을 응시하자, 카에드가 옷깃을 여며 주며 간단히 일축했다.
“보기보다 꽤 춥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세라엘을 안고 가려는 듯 허벅지 아래로 두 손을 넣었다.
“됐으니까 내려 줘요.”
공중에 두 다리가 뜨인 세라엘은 그의 어깨를 두들겨 한사코 만류해야만 했다.
“걸을 수 있겠어요?”
“그럼요.”
원래도 유난스러운 남자였지만 그녀가 바람에 날아가기라도 할까 봐 애지중지하는 모습에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제 발로 걸을 수 있으니까 어서 가요.”
세라엘은 그의 큼지막한 손을 잡아끌었다. 핏물이 완전히 빠진 손을 빈틈없이 깍지 껴 잡는 그녀를 응시하던 카에드 또한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여관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호숫가였다.
광활한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정경을 보며 걷던 세라엘은 이곳이 처음 후작저를 떠나 칼스비크로 향하던 마차 안에서 본 호수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기 와 보고 싶었던 호수예요. 당신이랑 처음으로 마차를 같이 탔을 때 봤거든요. 기억하세요?”
“빠짐없이 기억합니다.”
카에드의 입술 끝에 희미한 웃음기가 스쳤다. 일출하는 햇빛에 비친 세라엘의 옆모습을 넋을 빼고 지켜보았던 순간이 떠올라서였다.
세라엘은 그때와 완연히 달라진 시야로, 역시나 변해 버린 풍경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녹음으로 물들었던 숲은 칼스비크의 것과 같은 검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마냥 부드러웠던 호수 안의 물결도 겨울 특유의 차디찬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삭막해 보일 만도 했지만, 칼스비크를 연상케 하는 시린 풍경은 도리어 묘한 안정감과 평온함을 안겨 주었다. 이 느낌을 감상으로 그치는 것보다 그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꼭 칼스비크에 와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해져요.”
세라엘이 뱉은 숨결이 겨울 공기에 녹아 희부옇게 번져 나갔다. 하얗게 흩어지는 숨을 지켜보던 카에드가 그녀의 머리 위로 나직한 목소리를 떨어뜨렸다.
“춥지는 않습니까?”
“아뇨. 덕분에 따뜻해요.”
세라엘은 곁에 나란히 선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지난 며칠 사이에 너무도 많은 일이 일어난 탓인지, 그와 밝은 햇빛이 내리비추는 겨울 호숫가를 걷는 지금이 그저 꿈결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걷던 도중 세라엘은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의 둥치를 가리켰다.
“저기 잠깐 앉는 게 좋겠어요.”
카에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이끌었다. 그들은 나무가 뻗은 가지 모양대로 그림자를 내린 풀밭 위에 자리를 잡았다.
카에드는 망토를 벗어 그녀가 앉을 자리에 고이 깔아 주었다. 걷는 동안 조금 흐트러진 담요까지 다시 빈틈없이 여며 주었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은 세라엘이 그의 눈에는 한파 속에 벌거벗고 오들오들 떠는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문득 카에드가 턱을 기울여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세라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당신 안색이….”
“…….”
“정말 불편한 곳 없어요?”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른 남자였다. 세라엘은 자기도 모르게 배를 쓸어 만졌다.
“사실 아까부터 속이 조금 안 좋아요.”
“이런.”
말을 끝마치자마자 카에드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또 진찰이니 의사니 할까 싶어 세라엘은 서둘러 그를 만류했다.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더부룩한 거예요. 속이 좀 얹힌 거로 일일이 의사를 보고 싶지 않아요.”
볼멘소리로 말한 세라엘이 막무가내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전 여기서 겨울 호수를 보고 싶단 말이에요.”
“당신이 이렇게 고집쟁이일 줄은 몰랐습니다.”
카에드는 한숨을 쉬면서도 팔을 둘러 그녀를 안아 주었다.
“여관에서 한나절은 쉬다 갈 테니까 편치 않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줘요.”
“알았어요.”
세라엘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살얼음이 진 수면을 응시했다.
멀찍이 발켄족 소년들과 루시가 풀밭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세라엘의 눈길을 알아챈 루시가 손을 높이 들어 올려 흔들었다. 그녀 또한 손바닥을 보이며 흔들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콜이 그랬어요.”
그들에게서 뗀 시선이 카에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당신이 나와 떨어져서 사냥제가 개최되는 숲에 가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고요.”
“…….”
“처음 결정을 번복해야만 했던 사정이 있는 것처럼 들렸는데, 무엇이었는지 알려 줄 수 있나요?”
그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정면을 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답을 들려줄 생각이 없는 걸까. 조각처럼 반듯한 그의 옆모습을 응시하던 세라엘이 막 눈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내 손으로 필립을 죽여 버릴 계획이었어요.”
하얀 입김을 실은 카에드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말에 담긴 무게가 한숨 늦게 다가왔다.
황족을 암살하려 했다는 토로에 놀란 세라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의문을 표했다.
“왜… 언제부터 계획한 거예요?”
“수도에 오기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세라엘은 턱을 갸웃 기울였다.
“하지만 당신은 사냥제에 참가하지 않으려 했잖아요. 심지어 수도에 오는 것조차 반대했었고요.”
“실제로 행할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시답잖은 입지와 평판을 가진 놈이지만 정실 소생의 황태자니까, 그의 죽음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몰라 망설여졌어요.”
뭐든 미적거림 없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남자가 망설였다는 말이 퍽 생경하게 다가왔다. 소리 내어 묻지 못한 의문을 읽은 듯 카에드가 조용히 덧붙였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 괜한 위험을 감수하기는 싫어서.”
카에드는 끝모르게 이어진 호수 어딘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필립은 위험합니다. 비열하지만 아둔하고 겁이 많아 큰 사고를 낼 배포는 없는 인간이라 판단했는데 내가 틀렸어요. 위협의 여지가 있는 인간은 죽여 버리는 게 간단하니까, 그러면 놈이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 염려할 필요도 없으니까 기회가 온 김에 끝장을 보려고 했어요.”
카에드는 손을 뻗어 붕대가 둘린 그녀의 손목을 매만졌다. 결박 때문에 붉은 상처가 남은 곳이었다.
“결국 당신에게 상처를 입혔으니 잘못된 결정이었어요.”
세라엘은 깜짝 놀라 그의 손을 붙들었다.
“궁에 남아 있겠다고 먼저 고집한 사람은 저였잖아요. 카에드가 와 준 덕분에 다치지도 않았구요.”
“아니, 무리해서 계획을 밀어붙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당신 말대로 이튿날 궁에서 떠나 버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혼잣말에 가까운 목소리는 진한 자책감에 물들어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세라엘은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저 다친 데 없이 멀쩡하잖아요. 이번 일은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세라엘은 그의 손을 가져가 제 뺨 위로 갖다 대었다. 부드러운 살결 위로 복숭앗빛 홍조가 떠올랐다. 카에드는 그것을 어루만지며 그녀를 잠잠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치부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타국 어딘가로 보내져 어떤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몰랐다.
“내 실수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입니다. 그 멍청한 놈의 도발에 넘어가서… 전부 내 잘못이에요. 난 끝까지 당신 곁을 지켜야만 했어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우리 지나간 일은 자책하지 않기로 해요.”
세라엘은 그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눈을 내리감았다.
“찾아와 줄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
“그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요.”
포근한 온기를 음미하던 세라엘이 고개를 쳐들었다.
“저, 사실 신기한 경험을 했거든요.”
카에드는 듣고 있다는 듯 바람결에 흔들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 주었다. 머리 사이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손길에 눈꺼풀이 다시금 감겼다.
“다락방에 갇혀 있던 도중에 갑자기 어떤 기운이 느껴졌어요.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고 그냥 두루뭉술한 기운이요. 하지만 방 안에 있던 황태자나 기사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분명히 뭔가를 느꼈거든요.”
세라엘은 꿈꾸듯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창밖에서 전해져 온다는 확신이 들어서 밖을 내다보았어요. 그때 거짓말처럼 당신이 나타난 거예요. 무서웠던 상황이라 돌이켜 볼 경황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어요.”
“…….”
“이상하지 않아요?”
카에드는 동조를 묻는 목소리에 답하지 않았다. 갈증을 삼키듯 툭 불거진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돌연 고개를 기울인 카에드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귓불 뒤 우묵하게 들어간 부분에 간지러운 숨결을 머금은 입술이 맞닿았다.
“세라엘.”
그녀가 어깨를 움츠리며 떨자 장난스러운 웃음이 목덜미에 흩어졌다.
“이제 나한테서 도망가고 싶어도 절대 못 가겠네요.”
“네?”
“당신은 나와 각인을 한 겁니다.”
어쩐지 현실성이 없는 표현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카에드는 대답 대신 그녀의 목 언저리에 연거푸 입술을 내렸다. 그것도 모자라 세라엘을 번쩍 안아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히고 강하게 끌어안았다.
“……!”
몇 겹이나 껴입은 옷감 너머로도 단단히 한계치를 넘은 그의 열기가 느껴졌다. 당황한 세라엘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한번 들썩이자 그가 낮게 신음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틈 없이 맞물린 건 부지불식간이었다.
햇살이 내리비추는 겨울의 오후, 멀리 풀밭에서는 루시와 소년들이 평화롭게 장난치는데 그녀의 남편은 목을 붉게 물들이고 핏대까지 세우며 흥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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