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27)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27화(127/150)
혹한의 계절이 찾아왔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미지의 영역에서부터 하행한 한파는 제국 중부 지역에까지 지독한 폭설을 퍼부었다.
북방에 위치한 칼스비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가뜩이나 황폐한 영지의 추위는 겨우내 셀 수 없이 많은 이의 생명을 동사로 앗아 갔다.
혹독한 겨울은 카에드에게 있어 기회였다. 국경 너머 미지의 영역에서 양아버지인 공작과 전쟁을 지속하던 그는 은밀히 전장을 벗어나 장벽 아래의 땅, 칼스비크로 내려온 상태였다.
바로 공작 군대에 조달 예정인 군량을 불태워 보급선을 끊을 작전 때문이었다. 황실에서 국고를 털어가며 지원한 거대 군수 물자였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작의 원정군이 확보하기 전에 전소시켜야 했다.
대군이 동원된 겨울 전쟁은 결국 병량 싸움이다. 이번 작전은 종전을 판가름하는 중요 전략으로,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다시 북부로 돌아갔을 때 전력을 잃은 그들을 격파시킬 수 있을 것이다. 카에드는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계획이었다.
“두목.”
멀찍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에도 굳건히 뿌리 박고 선 블카노프성을 바라보던 카에드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최측근인 로이가 포로의 뒷덜미를 잡은 채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정찰을 나갔던 렉터가 방금 도착했어요. 이놈 말대로 칼스비크와 맞닿은 경계에 보급대의 주둔지가 있다는데요.”
로이는 카에드 앞에 포로를 내던졌다. 그는 전장에서 생포한 적군의 보급병으로, 군량 전소 작전은 그를 한 달간 고문하여 캐낸 정보를 기반으로 얼개를 짠 것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빌빌거리는 포로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던 카에드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발각되지는 않았겠지.”
“두목이 알려 준 대로, 절벽이 나오는 숲길을 통한 덕분에 들킬 염려도 없었다고 해요.”
전시 상황에서 사령관인 카에드가 극소수의 측근만 거느린 채 몸소 국경을 넘어 공작의 영지로 내려온 이유는 누구보다도 이 땅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공작에게 입양되었던 소년기부터 열아홉이 되던 해, 미지의 영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었으니까.
열아홉이라.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과 흉터를 남긴 해를 떠올리자 왼쪽 어깻죽지에 찌릿 묘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그해 겨울, 블카노프 공자인 민튼이 재미 삼아 쏜 화살이 박혔던 곳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공자의 목을 비틀어 살해했던 카에드의 충동은 업보가 되어, 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단발성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황실에서 전적으로 공작 군대를 지원하고 나선 뒤부터 종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실 측이 어째서 국고까지 탕갈하여 공작을 원조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이, 이제 약속대로 자비를….”
그때, 온 얼굴이 피로 물든 포로가 무릎을 꿇고 카에드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가 입은 의복의 가슴께에는 붉은 눈의 은빛 독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달달 떨리는 포로의 손끝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카에드가 건조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죽여.”
“아, 안…!”
단도를 꺼낸 로이가 포로의 목을 그었다. 그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새하얗게 쌓인 눈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카에드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궐련을 빼 들어 익숙하게 불을 붙였다. 희뿌연 연기가 서늘한 바람을 타고 흩어져 나갔다. 메마른 시선은 다시 블카노프성을 향한 채였다. 그런 그를 로이는 착잡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 전 최전선에서 악셀과 콜을 포함한 소년병 여럿을 잃은 뒤로, 카에드는 지나칠 정도로 잔혹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수틀리게 하는 이는 단박에 목을 잘라 효시하기 일쑤였고, 순순히 굴복하는 포로에게도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카에드는 본래 미지의 영역에서 나고 자란 남자였다. 로이 또한 소년기 시절, 그가 소리소문없이 실종되기 전까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찍이 발켄족의 차기 수장으로 임명되었던 그는 나이는 어렸어도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에게 굴종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배웠던 이였다. 말수와 표정 변화가 적어 의중을 알기 어려운 건 그때도 매한가지였지만.
실종되었던 그가 완연한 성인이 되어 미지의 영역으로 되돌아온 건 열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카에드는 오래전 야만인 소탕을 명목으로 북벌 중이던 공작에게 납치나 다름없이 입양되었던 사정이 있었다.
성장기 동안 귀족의 성에서 지내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로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기류를 지니고 있었다.
머지않아 카에드의 손에 아들을 잃은 공작이 대군을 끌고 국경을 넘어왔다. 카에드를 따르는 이들은 그의 살인으로 비롯된 전쟁에 망설임 없이 참전했다.
남부 귀족과 북부 야인은 오래도록 갈등을 빚어 왔으니 그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터질 싸움이었다.
해를 4번이나 넘기며 이어진 교전에서 탈영병이 나온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카에드 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탈영의 원인이 카에드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승전을 위해 여자와 아이까지 건드리는 타 종족을 군대에 흡수시키는 것은 물론, 아군조차 오금이 떨릴 만큼 무자비한 성정을 드러내고 있던 탓이었다.
익숙하게 포로의 시신을 처리하던 로이는 문득 피로 범벅이 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살다가는 승전고를 울린대도 예전 삶으로 돌아갈 수 없지….’
최측근 중에서도 가장 신사다웠던 시프는 카에드를 감내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탈영한 지 오래였다. 호크나 바이퍼처럼 충성심 높고 감정이 조금 결여된 이들은 끝까지 남아 있겠지만, 지금은 로이조차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죽고 죽이는 혈투에 바치는 것보다 불행한 일이 있을까.
로이는 카에드가 흩뜨려 보낸 궐련의 연기를 회의적인 눈으로 응시했다. 이 모든 불행의 중앙에 선 카에드 또한 도망치고 싶겠지.
“혹시 전쟁이 끝나면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질문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로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해 보고 싶은 거나… 그런 거 있어요?”
카에드는 로이를 향해 흘깃 시선을 던졌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영역의 물음이었다. 눈길을 거둔 카에드는 양자로 지내는 동안 끔찍한 기억만을 안겨 준 블카노프성을 한동안 응시했다. 새하얀 기체와 함께 토해진 무감한 저음이 말했다.
“성으로 돌아가야지.”
“두목이 살았던 저곳이요? 집도 아닌데 왜 저기로….”
“돌아가서 다 죽여야 하거든. 저 성에 살던 것들이 다 전쟁터로 뛰어나온 것도 아니잖아.”
느릿하게 쏟아진 음성은 어떠한 감정도 싣고 있지 않았다. 분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과업이라는 것처럼 무덤덤한 어투였다.
“…도망치고 싶었던 적은 없어요?”
“도망?”
“…….”
“어디로?”
그의 되물음에 로이는 말문을 잃고 시선을 배회했다. 답을 바라고 한 물음은 아니었던 듯 카에드는 곧 그를 지나쳐 걸었다. 로이는 한숨조차 뱉을 수 없었다.
저 남자에게는 전쟁이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닐 터였다. 벗어나고 싶다는 인식은 있어도, 이미 피 칠갑이 된 삶에 익숙해져서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닐까.
잠시간 마른세수를 하던 로이는 쓸데없는 상념을 잘라내고 카에드를 따라 걸었다. 이번 작전으로 이 참담한 사투가 종결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
“얼마간 정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말 등에 얹은 안장을 다시 고정하던 렉터가 말했다.
“그 포로의 말에 따르면 보급할 군량이 아직 절반밖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라고 해요. 나머지는 일주일 내로 들어올 거고, 한꺼번에 북상해서 공작 군대에 조달할 예정이래요.”
“지금 주둔지에 있는 경비는 어느 정도지?”
로이의 물음에 렉터가 차분히 대답했다.
“이렇다 할 장교급은 보이지 않는데 백 명 정도예요. 근무조가 돌아가면서 지키고 있고요.”
“잠입해서 불태우는 건 둘째 치고, 치받고 싸워야 할 수도 있겠는데. 머지않아 만월이니 승산이 없지는 않을 것 같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호크가 나무에 기대선 카에드를 향해 물었다. 완연한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발켄족은 평소보다 배가 넘는 괴력을 끌어낼 수 있으니 피를 보자는 뜻이었다. 궐련을 빼 문 카에드는 다른 상념에 빠져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해 보고 싶은 것. 글쎄, 블카노프성으로 돌아가 자신을 박해했던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또 있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4년간 이어진 교전이 그를 머릿속을 깊이 좀먹어서 사고 회로를 부서뜨리기라도 한 건가.
생각해 보면 고작 서너 해 동안 지속된 전쟁이 아니었다. 처음 공작의 성에 입성했던 날부터 그에게는 삶이 사투였다. 어서 쉬기 위해 끝내 버리고 싶은 사투일 뿐, 그 뒤에 무언가를 하고 싶은 의지는 없었다.
“두목?”
건조한 눈으로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던 카에드가 뒤늦게 읊조리듯 말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보급선을 끊는 거다. 전면전으로 번지는 일은 되도록 피하는 게 좋겠지.”
그는 정찰을 다녀온 렉터를 응시했다.
“육안으로 보기에 군량이 전세에 영향을 줄 만큼 많은 양이었나?”
“아니었어요.”
“주둔지를 빠져나가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어요. 군량을 싣고 들어온 마차는 여럿 보았지만요.”
“포로가 사실을 말하긴 했나 보군. 보급선을 확실하게 끊으려면 모든 군량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해.”
렉터가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도 동의해요. 마침 근처에 임시 거처를 찾아 놓았어요. 주둔지를 주시하면서 작전을 세우기 좋을 거예요.”
카에드는 독한 연기를 차디찬 공기 속에 흩날려 보내며 앳된 소년을 응시했다.
“숲속에 거처할 만한 곳이 있던가.”
“오두막집이 하나 있었어요.”
“안에 있던 건, 죽였어?”
무감히 묻는 물음에 렉터가 약간 당황한 낯으로 말을 더듬었다.
“…아, 아뇨. 그러니까,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 먼지만 쌓여 있었고 창문도 깨져 있었거든요.”
진위를 파악하듯 소년을 물끄러미 보던 눈동자가 다시 허공을 향해 날아들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에서는 눈이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만 가지.”
남자들은 하나둘 말 위에 올라탔다. 그대로 임시 거처를 향해 눈이 켜켜이 쌓인 숲길을 내달렸다.
빛 한 점 없이 어둠이 잠식한 길, 선두에서 달리고 있던 카에드의 흑마 앞으로 자그마한 형체가 하나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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