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28)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28화(128/150)
말은 길게 울음을 터트리면서 앞을 향해 힘찬 발질을 했다. 카에드는 욕설을 내뱉으며 고삐를 홱 잡아당겼다.
사슴이라도 뛰쳐나온 건가. 처음엔 자신이 무얼 맞닥뜨린 건지 몰랐다. 넝마쪽처럼 널브러진 하얀 형체를 얼마간 주시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겁도 없이 내달리는 말 앞으로 끼어든 건, 짐승이 아니라 새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초한의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그의 앞을 막은 여자는 당연히 주의를 잡아끌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카에드는 칼을 빼 들고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눈이 쌓인 땅바닥에 넘어져 얼굴을 숙인 채 콜록거리고 있었다. 카에드가 급히 말을 멈춘 덕에 타박상을 입지 않은 듯했다.
허리께를 스치는 여자의 밝은 금발이 겨울바람에 나부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간격을 좁히자, 괴롭게 기침하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
대리석처럼 핏기없는 안색을 가진 여자였다. 자그마한 체구와 쇄골 아래 도드라진 가슴뼈로 하여금 무척 말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푸른 물빛처럼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한없이 유약해 보이는 용모와 어울리지 않아 묘한 이질감을 주는 눈이었다.
카에드는 어쩐지 의연한 빛을 띠는 그 눈에 사로잡힌 것처럼 가만히 여자를 응시했다. 시선은 다시 볼썽사납게 후들대는 어깨를 훑고, 그 아래로 얇고 파인 옷차림으로 내려갔다.
꼬락서니가 엉망이었다. 어디 무도회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차림은 둘째 치고, 허연 드레스 자락이 무엇에 긁힌 것처럼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흙먼지와 핏방울이 묻은 자국은 몇 번이나 구르고 넘어졌다는 사실을 방증했다.
모로 봐도 숲길을 달려온 꼴을 한 여자는 심지어 맨발이었다. 카에드는 턱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던 걸까.
무감한 시선은 다시 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묘하게 당돌한 느낌을 주는 벽안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
돌연 사색이 된 여자의 눈이 카에드가 든 칼로 향했다. 길쭉한 칼은 당장에 무엇이든 벨 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상태였다. 겁먹은 토끼처럼 오들거리며 칼끝을 보던 여자의 눈이 카에드와 등 뒤에 선 부하들을 차례차례 보았다.
“하지 마세요.”
속삭이듯 애원하는 음색이 가냘팠다. 카에드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여자와 시선을 맞대었다.
“그냥, 지나가 주세요.”
파랗게 질린 입술 새로 달달 떨리는 목소리가 재차 흘러나왔다. 오밀조밀한 얼굴을 잠시간 관찰하던 카에드는 이내 짧은 코웃음을 치며 칼을 검집에 넣었다.
바로 그 순간, 눈을 내리감은 여자가 눈 위로 풀썩하고 쓰러졌다. 까무룩 기절해 버린 것이다.
“…….”
카에드는 눈밭 위에 금실 같은 머리칼을 흩트리고 기절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무뢰배였다면 조금 전 그녀가 간절히 부탁한 모든 것을 무시했을 테지.
“근방에 사는 귀족처럼 보이는데요. 이런 데서 뭘 하고 있었을까요?”
어느 틈에 말에서 내린 로이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는 널브러진 여자를 보더니 곤란하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죠? 여기 내버려 뒀다간 꼼짝없이 동사할 텐데.”
그러자 늘 남부 귀족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던 호크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누군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을 치르는데 실크 옷이나 차려입고 노닥거리는 귀족을 구해 줘서 뭐 해! 망토로 대강 덮어 놓고 물통만 옆에 두고 가는 게 최선일걸.”
“노닥거리다 여기까지 나온 것 같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좀 어려 보이는데….”
렉터는 체구가 작은 여자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보다, 흘깃 카에드의 눈치를 살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카에드는 망토를 벗어 여자의 몸에 두르고 번쩍 들어 올렸다. 여위어 보였던 여자는 예상대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안아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카에드는 그녀를 제 흑마 위에 실은 뒤 자신도 올라탔다. 그를 지켜보던 남자들 또한 군말 없이 말에 올랐다.
그들은 종전을 결정짓는 작전을 위해 눈보라에 몸을 숨겨 장벽을 넘은 야인이었다. 여자는 그들을 목격한 장벽 아래 귀족이었고.
만에 하나 여자가 어딘가로 돌아가서, 그들의 인상착의를 읊으며 수상한 이를 목격했다고 주장한다면 작전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뒷일은 어찌 되었든, 일단 여자를 목적지였던 오두막집으로 데려갈 심산이었다.
***
해바라기.공금
“생각보다 넓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을 상상했는데.”
오두막집 내부를 둘러보며 로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먼지 쌓인 테이블 위에 앉은 호크가 험상궂은 얼굴로 투덜거렸다.
“여기가 우리 사는 데랑 같냐. 재수 없는 남부 놈들 우리보다야 따뜻한 곳에서 잘들 살겠지.”
“이번이 역사상 최악의 겨울이라잖아요. 지금은 남부인도 우리랑 비슷한 처지겠지요.”
렉터가 두꺼운 외투를 여미며 한마디 던졌다.
“넓기는 해도, 깨진 창으로 눈바람이 자꾸 들이쳐서 오래 묵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에요. 차라리 헛간이 더 따뜻할 거예요.”
로이는 휑 뚫린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오두막집 뒤에는 그리 크지는 않아도 사면이 막힌 목조 건축물이 하나 있었다.
“헛간이라면 저거?”
“네.”
“흐음.”
로이가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두목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가 본데.”
“왜요?”
“그 여자를 데리고 헛간으로 가고 있어.”
창가로 다가온 렉터가 고개를 빼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로이의 말대로 카에드가 검은 망토에 둘둘 싸맨 여자를 안고 헛간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카에드의 팔 밖으로 삐져나온 상처투성이 발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내버려 두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저 여자를?”
“네. 카에드 님한테 온정을 베풀 정도의 인간성이 남았다는 뜻이잖아요.”
“음….”
글쎄, 온정에서 비롯된 행동인지는 모르겠다만.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로이는 헛간을 향해 묘한 시선을 주다가, 헛기침을 하며 숙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어쨌든 나는 놈들의 근무조나 파악하러 가야겠군. 날이 밝으면 교대하러 올 테니까 몸조심하고 있어.”
“알았어요.”
“춥겠지만 불 피울 생각은 하지 말고.”
“들킬 짓은 안 해요.”
맹랑한 대답에 로이는 가벼이 웃으며 렉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친형제나 다름없었던 콜과 악셀을 잃은 뒤로 깊은 비탄에 빠져 있던 소년은 다행히 장벽을 벗어난 뒤로 차츰 이전과 같은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녀온다.”
로이가 막 걸음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저기, 형.”
소년의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발목을 붙들었다. 로이는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이어 렉터가 조용히 털어놓은 사실에 눈을 크게 치뜰 수밖에 없었다.
카에드는 건조한 흙과 밀짚이 이리저리 흩어진 바닥에 여자를 내려놓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는 검은 옷감에 잡아먹히듯 둘러싸여 얼굴만 빼꼼 내놓은 채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무의식중에도 바닥이 추운지 몸을 말고 끙끙거렸다.
그 하찮은 모습을 무감한 눈으로 응시하던 그는 벽에 기대앉아 다시 궐련을 피워 물었다.
유난히도 피로한 하루였다. 끔찍한 기억이 스민 그 성을 봐서 그런가. 아니면 작전을 목전에 둔 탓에 중압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초점 흐린 시선은 너저분한 헛간의 벽에 한참이나 꽂혀 있었다. 한밤중의 어둠이 사위에 깔리고 밤새가 우는 무렵은 그나마 그가 선호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이다지도 지독하게 느껴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즈음 자그맣게 콜록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내리니 망토에 돌돌 말려 누운 여자가 몸을 바르작대며 기침을 하고 있었다.
카에드는 아직 반도 피우지 못한 연초를 바닥에 비벼 껐다. 감정을 담지 않는 눈동자는 다시 여자에게로 향했다.
뒤척인 탓에 여자의 두 발이 망토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시커먼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더럽혀진 맨발은 여자가 오래도록 길을 뛰었음이 분명한 증거였다.
어딘가에서 급히 도망쳐 나온 것쯤은 알겠다. 어떤 부류의 인간에게 쫓기고 있었는지도 대강 감이 잡혔다. 나약한 이를 구석에 몰아넣고 채찍질하기 좋아하는 쓰레기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저 가느다란 몸으로 뭘 할 수 있다고 계획도 없이 달아난 걸까. 폭설이 내리는 이 혹한에 무기도 없이, 잡아 뜯으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얄팍한 드레스를 입고서. 그것도 맨발로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던 걸까.
불쑥 몸을 일으킨 카에드는 여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망토를 당겨 삐죽 튀어나온 발을 가렸다.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도망치려는 발악이 여실히 느껴지는 것 같아서, 눈에 담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린 카에드는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과 시선이 부딪쳤다. 투명한 바닷물을 연상시키는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동그랗게 커지고 있었다.
“뭘 봐요.”
카에드가 서늘하게 일갈했다. 여자는 채찍에 후려 맞은 것처럼 어깨를 움찔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초도 안 되어 다시 눈을 뜬 여자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언가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뭘 보냐고.”
“눈앞에 있으니까….”
여자는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디서 봤던 사람 같기도 해서요.”
덧붙이는 중얼거림을 무시하며 카에드는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어디서 보았기는 헛소리. 구면이었다면 여자를 기억했을 것이다.
그는 여자와 한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 털썩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눈만 도르륵 움직여 그의 동선을 좇던 여자가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뒤늦게 카에드가 덮어 준 망토를 발견한 여자는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카에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꼴이….’
여자의 부스스한 머리칼 위로 밀짚과 낙엽이 엉켜 있었다. 검댕이 묻은 얼굴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지를 연상케 하는 그 딱한 꼬락서니를 훑던 카에드는 고개를 돌리고, 피곤한 듯 눈을 내리감았다.
“저어….”
“…….”
“저기.”
카에드는 머뭇대는 음성을 잇달아 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그의 이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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