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29)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29화(129/150)
느릿하게 눈을 뜨자 여자는 상기된 낯으로 제 이마를 짚고 있었다.
“아, 이게….”
“…….”
“어디서 이런 소리가 난 걸까?”
여자는 허공을 보며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렸다.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지. 카에드는 자신이 갖고 있던 가죽 물통과 바싹 말린 고기를 여자에게 건넸다.
“먹어요.”
“…….”
여자는 선뜻 경계심을 지우지 못했다.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게 뭐예요…? 나무껍질?”
“먹기 싫으면 말든가.”
“머, 먹을게요!”
도로 손을 물리려 하자 여자가 서둘러 받아 들었다. 경계했던 게 무색하게도 그녀는 육포를 열심히 씹어먹었다. 중간중간 카에드를 스친 눈길에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여자는 육포를 먹다 말고 물통을 집어 들었다. 입구에 입을 갖다 대고 벌컥벌컥 마시던 여자가 눈썹을 와락 찌푸렸다.
“우욱…!”
여자는 소태라도 삼킨 듯 찡그린 얼굴로 기침을 터트렸다.
물인 줄 알고 마신 모양인데, 물통 안에는 독하디독한 술이 들어 있었다. 혹한기에 몸을 데우는 술을 휴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여자는 순간적으로 인상을 쓰고 카에드를 째려보았다. 그러나 매섭게 치켜뜬 그의 눈초리를 보고서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찰나였다지만 어찌나 겁이 없는지 기가 찰 정도였다.
문득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듯 여자의 허연 손등으로 향했다. 평생 궂은일 한번 안 해 보게 생긴 여자의 손등에는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붉은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짐승에 물린 듯한 자국. 개가 물고 잡아 뜯은 게 틀림없는 자국이었다. 귀족 여자가 지니기엔 부적절한 흔적이었다.
콜록거리던 것도 잠시, 순식간에 육포를 해치운 여자가 머뭇머뭇 입술을 움직였다.
“저기, 감사합니다.”
붉은 상흔을 주시하던 카에드는 한 박자 늦게 여자의 목소리를 인지했다.
“구해 주신 것도 감사해요.”
“…….”
“그런데 저는 이만 가 봐야 해서요. 여길 나가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어찌 보면 동의 없이 낯선 곳에 끌려온 처지면서 참 공손히도 물었다. 대답하기 귀찮아서 무시로 일관했다.
“안 될까요…?”
지치지도 않고 잇달아 질문이 날아들었다. 카에드는 미간에 주름을 새겼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꿋꿋이 질문을 던졌다.
“저를 이곳에 두실 생각인가요?”
작전에 방해가 될지도 모를 당신을 없앨지 말지 고민 중이라고 말하면 그 재잘거리는 입을 좀 다물려나. 카에드는 말없이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여긴 어디인가요?”
여자는 헛간 벽에 자그맣게 달린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하늘은 달빛 한 자락 비추어주지 않았다.
“헛간 같은데…. 그쪽은 누구신가요?”
“…….”
“누구세요….”
“어느 가문 출신입니까?”
마침내 입을 연 카에드가 대답 대신 되물었다. 호기롭게 질문을 던지던 여자가 어쩐지 뜨끔하여 침묵을 유지했다.
여자는 뒤집어쓴 망토를 방패처럼 여몄다. 검은 옷감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밀로즈예요.”
“밀로즈라.”
카에드는 어렵지 않게 여자가 읊은 성을 기억해 냈다.
밀로즈 후작가라면 블카노프 가문과 별다른 접점은 없지만 황실에 빌빌대기 좋아하는 쥐새끼의 가문이었다. 양자 시절, 성을 방문한 황실 수행원과 공작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몇 번 건너 들으며 밀로즈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황실이 본격적으로 블카노프 가문을 지지하자 많은 추종자가 전쟁 지원금을 보탰다는 사실은 잡아들인 포로를 통해 일찌감치 파악한 바였다.
여자의 가문도 마찬가지겠지. 카에드의 목을 공작에게 바치려는 자들과 한패인 것이다.
“그렇다면 밀로즈 후작의 여식이겠군요.”
예사롭지 않은 어조에 겁을 먹은 여자가 오들오들 떨었다.
“호, 혹시… 저를 죽이려는 건…!”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여자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저, 저는 그 사람이랑 어떤 관계도 없어요.”
“…….”
“정말이에요. 애초부터 아버지 같지도 않았던 사람이에요. 돈에 눈이 멀어서 나를….”
여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숙였다.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쳐든 여자가 목숨을 애걸했다.
“저를 죽이지 말아 주세요. 이대로 얌전히 보내 주신다면 은혜를….”
“…….”
“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은혜는 못 갚겠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요.”
카에드는 앉은 자리에서 성큼 일어났다. 여자가 히익 소리를 내며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헛간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 정말 나가 봐야 해요…!”
멀어져 가는 그의 등에 대고 여자가 가냘프게 외쳤다. 카에드는 눈이 쏟아지는 바깥으로 나가 헛간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으로 당황한 표정이 보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쇠줄을 집어 헛간의 문에 칭칭 동여맸다. 안에서 탈출을 시도해도 나오지 못하게끔 단단히 고정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여자를 긴 시간 동안 가둘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작전을 무사히 완수할 때까지만 이곳에 데리고 있을 생각이었다.
***
“추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밤사이 호되게 고생을 한 렉터가 심통을 부렸다. 오두막집의 창문이 깨진 탓에 실내로 눈보라가 고스란히 들이친 탓이었다.
호크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받아쳤다.
“버텨야지 뭐 어쩌겠냐. 따뜻한 곳에서 자려고 나온 것도 아닌데 좀 참아.”
“그래도 모포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망토나 여며.”
“낮은 기온에 익숙한 우리도 추운데, 그 사람은 괜찮을까요? 옷차림이 좀….”
렉터가 창밖 너머 헛간을 힐긋 눈짓했다. 의자에 걸터앉아 궐련을 피우던 카에드 또한 그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소년은 걱정스러운 어투로 중얼거렸다.
“불도 피울 수 없으니 엄청 추웠을 텐데.”
“이대로 비명횡사하면 우리에겐 간편한 일이지. 목격자가 될 수도 있는 여자를 손 안 대고 없앤 셈이니.”
호크가 심드렁히 말했다. 마음 약한 소년은 그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궐련을 비벼 끈 카에드가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걸음은 오두막집을 나와서 켜켜이 쌓인 눈을 밟아 헛간으로 향했다. 그의 손엔 물이 든 통과 말린 고기가 들려 있었다.
꽁꽁 매어 두었던 사슬을 풀고 끼익, 문을 열어젖혔다. 문틈으로 쏟아지는 빛줄기가 바닥에 웅크린 여자를 비추었다.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간 카에드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를 든 여자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밤사이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먹어요.”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물과 음식을 내밀었다. 여자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가 건넨 것을 받아들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으나 인내를 갖고 기다렸다.
“고마워요.”
엉망으로 꼬인 발음이었다. 동시에 독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발치에는 카에드가 두고 갔던 술통이 나뒹굴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다 마시고 말았어요.”
역시나 무시로 일관한 카에드가 벽을 기대고 앉았다.
“근데 몸이 따뜻해졌는지는 모르겠고, 머리가 어지럽다는 건 알겠어요.”
“…….”
“배도 고파요. 춥고, 배고파…. 거지가 따로 없어. 나무껍질은 잘 먹을게요.”
황망히 중얼거린 여자가 육포를 베어 물었다. 어제는 거지꼴이더니 오늘은 취한 거지꼴이었다. 지난밤 독주를 모조리 비운 여자는 해롱해롱 취한 상태였다.
“누구한테 쫓기고 있던 겁니까?”
부지불식간에 질문이 튀어 나갔다. 돌이켜 봐도 자신이 어째서 그런 물음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술기운에 제정신이 아닌 여자는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남편이요.”
“남편?”
“사실 쫓기고 있었다기보다, 몰래 도망치고 있었어요. 지금쯤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눈을 부릅뜬 여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저를 찾으려고 사냥개까지 풀지도 몰라요. 괜히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저 여기서 나가야 해요.”
“…….”
“그쪽을 만난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정말이에요.”
여자의 손등에 자리한 흉터가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카에드는 그녀가 늘어놓은 말을 하나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여상한 낯으로 손등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손은 어쩌다 다친 건데요.”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동작을 멈추고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눈이 오랜 과거를 회상하듯 희미하게 흐려졌다.
“사냥개가 물었어요.”
일전에도 개에 쫓기면서까지 도망친 경험이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여자를 뒤쫓는 일행이 수색견을 동반했다면 일이 조금 복잡해진다. 당장 여자의 목을 긋고 아무 데나 내버리든가, 요청대로 이곳에서 멀리 벗어나게끔 선의를 베풀어 주는 게 최선이었다. 전소 작전에 변수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그편이 현명했다.
카에드는 그럼에도 저 여자를 선뜻 내칠 수 없었다.
“갈 곳은 있어요?”
“아뇨….”
“목적지도 없는데 도망을 친다고?”
그의 목소리에 조소가 배었다. 여자는 물통을 꼭 부여잡았다.
“기회가 생겼을 때 어떻게든 달아났어야 했어요. 집은 감시가 심해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거든요.”
“집에서 나온 게 아닙니까?”
“남편을 따라 무도회에 온 거예요. 그 인간은 사교 모임에 항상 저를 동반하려고 해서…. 오기 싫었지만 어쩌면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화장실을 가는 척하면서 무도회장에서 벗어났어요.”
이 날씨에 가슴이 다 드러나도록 차려입은 옷차림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몸을 양옆으로 불안정하게 흔들던 여자가 딸꾹질을 했다.
“머리가 아파요.”
“거기 든 건 물이니까 마셔요.”
카에드가 가져온 물통을 턱짓했다. 관자놀이를 짚던 여자가 물통을 집어 들고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퍼런 핏줄이 돋은 가녀린 목이 유달리 신경에 거슬렸다.
“겁도 없이 혼자 어디를 가겠다는 건지. 지금 북부 전체가 전시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까?”
“알아요….”
말꼬리를 흐린 여자가 겁에 질린 눈으로 카에드를 응시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초면이고 이름도 알려 준 적 없는데, 그녀는 카에드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듯한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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