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3)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3화(13/150)
‘내가 방금 뭐라고 했더라…?’
새까만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올리며 카에드가 가까이 다가왔다.
‘대공님과 하나가 될 날을 한시도 기다릴 수 없다고 했던가?’
빙그르르 춤까지 췄다.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대공님과 내 사랑…이라고도 했나?’
수 초 전을 복기하자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세라엘의 두 뺨에 열이 올랐다.
대나무 숲에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쳤는데, 등 뒤에서 임금님이 떡하니 듣고 있었다면 이런 기분일까.
비유가 괴상하긴 했지만, 이 숙연하고도 망측한 상황을 묘사할 방법이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세라엘만을 가득 담은 카에드의 금색 눈동자가 은은하게 일렁였다.
“나와 북부로 떠나고 싶다니…. 진심입니까?”
카에드는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올려 그녀의 뺨을 닿을 듯 말 듯 살며시 쓸었다. 보송한 솜털이 손가락에 스치며 파르르 떨려 왔다. 지금 세라엘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나타샤를 포함해 보는 눈이 많다는 걸 깨달은 세라엘은 어정쩡한 자세를 바로잡았다.
‘굳게 결심했으니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선 안 돼.’
그녀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에요. 대공님과 결혼하고 싶어요.”
그러나 미처 가다듬지 못한 입꼬리는 미미하게 떨렸고,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볼은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여실히 나타냈다.
다행인지 아닌지 눈앞에 있는 카에드만 알아차린 듯했다.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카에드가 침묵을 깨뜨렸다.
“괜찮겠습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부부의 연을 맺는 일인데.”
은근히 조소가 묻은 목소리는 세라엘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의 구혼을 단박에 거절했다.
이유까지 당차게 읊어 주던 세라엘의 모습을 상기한 카에드가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난 세라엘 양처럼 번복할 생각이 없거든요.”
발 빼려면 지금이라도 빼라고, 마지막으로 도망갈 기회를 주는 듯한 어조였다.
‘괜찮아야만 해. 이것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으니까.’
거듭 되뇌면서 세라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 각오했답니다. 대공님 말대로 식부터 치르고 알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삼자의 눈으로 봤을 때 두 사람은 모로 봐도 애틋한 연인 같았다.
오가는 대화에 어폐가 좀 있는 것 같았지만 한창때인 연인이 장난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타샤는 크게 동요하여 입을 뻐끔거렸다.
‘저, 저, 저…! 저게 블카노프 대공님이랑 정말 그렇고 그런 관계란 말이야?’
사실 나타샤는 세라엘이 대공이 아닌 맥슨 백작에게 시집가기를 은연중에 원했다.
요구한 금전이나 여러 조건을 따져 봐도 대공과 맺어지는 편이 후작 부부에게도 압도적으로 좋긴 했다.
세라엘이 대공과 결혼할 사이라고 밝힌 날에는 그녀가 금덩이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막상 저 눈엣가시 같은 애가 어마어마한 권력자의 부인이 된다니까 배가 너무나 아프구나!’
어제부터 세라엘이 신랄하게 쏘아 댄 탓이었다. 저를 대공 비전하라 높여 부르게 되리라는 말도 타격이 컸다.
카에드는 공작가 일원을 몰살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뒷소문이 아니었다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남자였다.
저리도 완벽한 남자의 새신부가 얄미운 의붓딸이라니!
그때 타이밍 좋게 밀로즈 후작이 옷자락을 털면서 등장했다.
세라엘은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평생토록 보여 주지 않았던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공님과 결혼할 거예요. 지체하지 않고 준비가 되는 대로 함께 떠나고 싶어요.”
인사도 없이 던진 통보에 밀로즈 후작은 들어오던 동작 그대로 멈춰 섰다.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
후작은 부실 공사로 세워진 건물을 대공에게 터무니없는 금액에 넘기려 했다는 걸 입담으로 겨우 무마하고 오는 길이었다.
솔직히 무마되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너와 여기 계신 블카노프 대공님이 혼인하겠다는 거냐?”
“그뿐 아니라 대공님을 따라 곧장 저택을 떠날 예정이고요.”
당돌하게 출가까지 고집하는 세라엘을 후작이 망연히 쳐다보았다.
‘묘연해진 사업의 행방 때문에 귀갓길 내내 골머리가 아프던 차에 이 무슨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소식이란 말인가.’
방정맞게 달려온 나타샤가 후작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이제껏 보고 들은 것을 빠짐없이 전하는 낌새였다.
눈에 띄게 낯빛이 변한 밀로즈 후작이 떨리는 눈으로 카에드를 보았다.
“…이게 모두 사실인가요? 대공님도 제 여식과 같은 생각이신지요?”
“물론입니다.”
카에드는 세라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짧게 단언했다.
계획과는 다른 전개였지만 그가 순순히 응해 주자 세라엘은 긴 숨을 내쉬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 있던 밀로즈 후작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상당히 갑작스럽습니다만….”
후작은 모로 봐도 연인 같은 제 여식과 대공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연이 맺어진다면 저와도 옹서 간이 되겠군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대공님.”
그는 두 손을 비비면서 굽신거렸다.
“하오나 일 주 정도는 저와 못다 한 담론을 먼저 나누어보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제 딸아이와는 내주쯤에 귀택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그리 번거로울 필요가 있을까요?”
세라엘이 냉큼 끼어들었다.
‘대공에게서 어떻게든 뽑아 먹어 보려는 속셈 누가 모를 줄 알고.’
제 아비가 저를 물품처럼 두고 나불대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카에드 곁에 슬그머니 붙어섰다.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체온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대공님만 괜찮으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북부로 떠나고 싶어요. 하루라도 일찍 적응하면서 혼례 준비도 하고 싶답니다.”
“네 의사는 묻지 않았다. 버릇없이 남자들 담화에 끼어들지 말아라.”
“대공님께서도 하루빨리 칼스비크로 복귀하셔야 놓고 오신 영지 업무도 보시겠지요.”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세라엘을 차갑게 묵살해 버린 후작이 카에드를 응접실로 안내하며 다시 좀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대공님.”
꿈쩍도 하지 않고 세라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에드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는 줄곧 등 뒤에 대기하던 수하에게 눈짓했다.
“준비한 마차를 가져와. 동이 트기 전에 저택을 떠난다.”
“알겠습니다, 두목.”
내부에 있던 모두가 자신의 청력을 의심했다.
‘…두목? 잘못 들었겠지?’
영락없이 도적 차림을 한 사내들을 대동한 것도 의심스러운데, 그들이 제국의 대공작을 두목이라 부르다니?
분명 잘못 들은 거라 판단한 사용인들은 흐린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카에드가 북부 야인 무리 중 하나인 발켄족의 수장이라는 사실은 세라엘만 알고 있었다.
이제는 드높은 작위를 소유한 그였지만, 발켄족 남자들은 지금도 그를 두목이라 부르는 게 편한 듯했다.
문득 세라엘의 한쪽 어깨에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가 보면 나와 결혼하고 싶어 몸이 달은 줄 알겠군요.”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상체를 기울인 카에드가 조소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 없는 혼인은 싫다던 분이 어쩐 일이십니까?”
세라엘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호호. 이쪽도 사정이 좀 생겨서요.”
“어떤 사정이길래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꾸셨는지.”
“보는 눈이 많으니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그녀의 어깨뼈와 살짝 맞붙은 그의 가슴에서 심장 박동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심장이 바삐 고동치지 않을 무감각한 남자일 줄 알았는데, 의아하게도 속도가 약간 빨랐다.
조금 흥분이라도 한 것처럼….
세라엘이 마른침을 삼키자 카에드는 만족감이 밴 얼굴로 몸을 물렸다.
그 잘난 얼굴은 곧 밀로즈 후작을 향했다.
“앞서 언질 주지 못하여 미안하게 됐습니다. 밀로즈 영애와 혼약을 맺었으니 결과적으로는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갈무리되었군요.”
“예예, 대공님. 그야 물론….”
“차일피일 지체하기보다 후작께서도 이편을 더 선호하리라 믿습니다. 세라엘 양의 말대로 명일 새벽에 대공령으로 복귀하지요.”
후작은 얼떨떨해 보였지만 대공의 말이라 감히 반문하지 못했다.
단지 머리 위에 ‘돈 얘기는 대체 언제 하지?’라는 말풍선이 띄워져 있을 듯한 난감한 표정이었다.
‘원하는 돈 얘기는 내가 꺼내 주지.’
일이 거침없이 흘러가는 지금 세라엘은 짚고 넘어갈 게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대공님께 드릴 지참금은요?”
“…지참금?”
후작이 미간을 찌푸리고 되묻자 세라엘이 태연히 미소 지었다.
“이제 제 예비 남편이 되실 분이잖아요. 결혼식이야 훗날 칼스비크에서 진행할 터이니 지참금은 그전에 주셔야지요.”
세라엘이 사는 로페른 제국에는 여자가 결혼하면 식을 올리기 전에 신랑에게 지참금을 딸려 보내는 제도가 있었다.
금액의 규모에 따라 신부 집안의 품위와 명예를 알 수 있었으니 사교계에서는 늘 화두에 오르는 가십거리였다.
결혼 시장에선 지참금 없는 여성은 혼인할 수 없다는 암묵적인 공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아버지와 계모는 돈을 받고 세라엘을 팔아 버릴 계략을 짜고 있었다니.
어지간히도 뻔뻔한 계략이었다.
세라엘이 제 두 손을 맞잡은 채 후작의 대답을 재촉했다.
“제 결혼을 은연중에 계획하고 계셨으니 지참금 정도는 준비해 놓으셨을 거 아니에요. 제국에서 마땅히 마련된 제도이니 따르시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요?”
“흠흠. 물론 네 말도 일리는 있건만….”
밀로즈 후작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세라엘과 건물 사업을 들먹이며 대공에게 여러 번 금전을 요구해 왔다.
그런데 대공이 도통 무슨 의중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던 차에 두 사람이 대뜸 혼인하겠다는 게 아닌가.
‘대공이 내 건물을 매입하겠다는 의사는 아직 표명한 바가 없는데. 이걸 어쩐담?’
후작이 슬그머니 세라엘을 흘겨보았다.
‘누굴 닮았는지 약삭빠르기 짝이 없군. 콕 집어 지참금을 요구하면 어떡하냔 말인가! 가뜩이나 빚더미에 올라 있는데 대공에게서 돈을 뜯어내기도 전에 주게 생겼구먼.’
게다가 빼도 박도 못하게 카에드까지 세라엘의 요구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의외로군요. 내게 지참금까지 베풀 계획이었습니까?”
“하하…. 그렇게 되었습니다.”
“흔쾌히 받아들이지요. 이 혼담에 그리 깊은 의의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제국에서 새신랑에게 지참금을 주는 일은 당연했으니, 지금 카에드가 하는 말은 비웃음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에잇, 젠장. 투자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지.’
느닷없이 닥친 상황이지만 사업이라 놓고 보면 쉬울 것이다.
여식은 출가외인이 되겠지만, 부호인 블카노프가 제 사위가 될 터이니 이제 돈 나올 구멍은 보장받은 셈이다.
“결혼 지참금이라면 물론 준비해 두었다.”
고민을 끝낸 밀로즈 후작이 나타샤에게 손짓했다.
“위층에 가서 당신 보석 좀 가져오시오.”
그동안 나타샤가 사치 부리는 걸 괜히 눈감아 준 게 아니다.
사업가들이 하는 돈세탁의 수법 중 하나로 현금 대신 여인네의 보석을 맞바꾸는 일도 잦았으니까.
그러나 나타샤는 남들 다 들리게 후작 귀에 속삭였다.
“불에 타 버려서… 없어요. 단 한 개도!”
밀로즈 후작이 이맛살을 구겼다.
그도 목소리를 낮춘답시고 낮췄으나 귀를 기울이면 들릴 정도의 크기로 호통쳤다.
“무슨 소리야? 대체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그걸 태워 먹어! 애당초 저택에 불이 난 이유가 뭐야!”
“그 불도 사실 세라엘이…. 아이참! 이걸 어쩜 좋아.”
발을 동동거리는 모습을 보고 세라엘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보석이 없긴 왜 없어요.”
곱다란 손으로 나타샤를 가리켰다.
“지금 어머니가 착용한 것만 집 한 채 값인데. 그거라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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