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30)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30화(130/150)
“계획은 있어요?”
“네?”
“여기서 나가면 계획은 있냐고.”
카에드의 질문에 긴장했는지, 물을 한 모금 들이켠 여자가 흉터가 난 손등으로 제 입술을 훑었다.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나온 거라서요. 일단은 성공했으니 어떻게든….”
계획 따위 없다는 뜻이다. 저 꼴로 정처 없이 어디를 가겠다는 건지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성공은 무슨. 외간 남자와 헛간에 갇혀 술까지 취한 주제에, 본인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자각은 하는 건가.
“눈까지 내리는데 헐벗은 차림으로 대책도 없이 뛰쳐나왔다는 거네요.”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말끝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취한 와중에도 여자는 자신이 감내한 일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저 크게 심호흡한 뒤 화제를 돌릴 뿐이었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지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어디서든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 같은 귀부인이 무슨 최악의 환경에서 지냈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 여기서 태어나기 전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인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러고는 착잡한 듯 한숨을 내쉬며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가느다란 왼손 중지에는 은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급하면 반지라도 팔려고 했나 보죠.”
“아, 아뇨. 이건 소중한 물건이라서요.”
여자는 방어적으로 반지 낀 손을 감췄다. 뭣도 없이 약해 빠진 여자가 그나마 하나 가지고 있는, 돈 될 만한 건 팔 생각이 없단다. 들을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거라도 팔면 당장 길바닥을 전전할 필요는 없을 텐데. 삯마차를 빌리거나 운이 좋으면 여길 뜨는 선표를 구할 수도 있을 테고.”
취기에 젖은 여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건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에요. 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반지를 내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은 급한 상황 아닌가.”
높낮이가 없는 저음은 조소를 숨기지 못했다. 눈에 띄게 긴장한 여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카에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챙길 반지도 있고 상당히 여유 있네요.”
“제가 이해되지 않으시겠죠….”
당연한 소리를. 카에드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받아쳤다.
“난 의미를 부여할 물건이 없어서 이해 못 합니다.”
그런데 단정 짓는 어조가 생각할수록 거슬렸다. 카에드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험악하게 뇌까렸다.
“내가 이 자리에서 그 반지를 내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주지 않으면… 저, 저를 죽일 건가요?”
자꾸 죽일 거냐고 묻는데 약간 짜증이 났다. 카에드가 수틀리면 당장 칼을 휘두를 사람처럼 보였는지, 동그랗게 부릅뜬 눈이 자꾸만 그의 허리춤에 자리한 검집으로 향했다.
“내가 죽이기도 전에 죽을 것 같은 몰골인데.”
카에드는 헛웃음을 쳤다. 노골적인 조소에 여자는 입을 앙다물었다. 입술을 깨문 여자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살고 싶어요.”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나.”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잖아요…. 저는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 보고 싶은 곳도 많아요.”
“특이하네. 나는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아득바득 살고 싶지는 않아서.”
던지듯 내뱉은 말에 여자가 둥근 눈망울로 카에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눈꺼풀이 몇 번 깜박이더니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까지 나는데 영 심상치 않았다.
“…….”
카에드는 묘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왜 우는지는 몰라도, 자그맣고 약한 여자를 울렸다는 자각이 들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사과를 할 수도, 손을 뻗어 어깨를 토닥여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그가 떠올릴 수 없는 선택지였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머지않아 눈자위를 문지른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른 눈동자에는 채 닦아 내지 못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저를 내보내 주세요. 여기 있어 봤자 폐만 끼칠….”
그때, 헛간 문이 열리면서 여자의 말이 잘렸다. 열린 문틈으로 렉터가 고개를 내밀었다.
“두목!”
그 호칭을 들은 여자가 한층 불안한 눈으로 카에드를 곁눈질했다.
“로이 형이 돌아왔어요. 교대 전에 의논할 게 있다고 해서요.”
“지금 가지.”
“아, 그리고….”
렉터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여자를 응시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가까이 다가온 소년이 거대한 잎사귀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붉은 산딸기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별것 아니지만 좀 먹어요. 덤불에 열려 있길래 따왔어요.”
조심스럽게 잎사귀를 받아든 여자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푸른 눈동자가 카에드를 바라봤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의연한 빛이 어린 눈이었다.
“저를 보내 줄 생각은 있는 건가요?”
“봐서요.”
자리에서 일어난 카에드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녀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보던 렉터가 한마디 얹었다.
“나쁜 뜻이 있어서 가둔 게 아니에요. 우리 일만 끝나면 무사히 놓아드릴게요.”
“일이요…?”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요. 며칠 내로 끝날 테니 조금만 버텨줘요.”
여자의 눈은 자그맣게 뚫린 헛간 창문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곳에 한동안 시선을 고정하다, 다시 카에드를 올려다보았다.
헛기침을 한 렉터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런, 복장으로 여자 혼자 돌아다녔다간 좋을 것도 없잖아요. 당분간 여기서 지내는 편이 그 쪽에게도 나을 거예요. 도처에 병사들이 널려있거든요.”
“어쩌면 더러운 야만인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곁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카에드가 조용히 뇌까렸다. 여자는 입을 꾹 다물고 물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미안해요. 일을 끝마치면 보내 주기로 약속할게요.”
렉터가 두 손을 내보이며 그녀를 달랬다. 카에드는 여자를 뒤로한 채 앞장서 헛간을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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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조가 돌아가면서 지키는 곳은 총 네 군데예요.”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로이는 목제 테이블 위에 종이를 펼친 뒤 작은 흑연을 꺼냈다.
그는 흑연으로 주둔지를 가리키듯 커다란 사각형을 그리고, 각각의 꼭짓점에 네 개의 원을 그렸다.
“군량을 모아 둔 곳이 분명해요. 바보는 아닌지 한곳에 둘 계획은 아니었나 봐요. 우리한테는 조금 번거로운 일이 되겠어요.”
“마침 이쪽도 네 명이니 잘되었군그래.”
호크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로이는 꼭짓점에 표시된 두 개의 원을 가리켰다.
“경비가 유독 삼엄한 곳은 두 군데뿐이에요. 우리가 아는 대로 군량이 절반만 도착한 상태라 그런 거겠죠.”
카에드는 테이블에 기댄 채 다시 연초를 빼물고 불을 붙였다. 시선은 창밖 너머의 헛간을 향한 채, 허연 기체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나지막한 저음이 나온 건 그다음이었다.
“파수병의 교대 시간은?”
“확인했어요. 자정에 일괄로 교대하는데 그때 짧게나마 빈틈이 생겨요.”
“미리 계획했던 대로 근방에서 대기하다가 군량이 모두 모일 때 잠입하면 되겠군.”
“혹시 변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정찰은 계속하는 게 좋을 거예요.”
로이의 말에 호크는 기지개를 펴면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좋아. 오늘 정찰은 나와 렉터가 하겠어. 가자, 꼬맹아!”
우렁차게 소리친 호크는 렉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참, 여자는 어떻게 할 겁니까?”
카에드의 눈은 여전히 헛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헛간에 뚫린 자그마한 창문을 향해서였다.
좁은 창틈으로 불쑥 여자의 머리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팔 두 짝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창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탈출을 감행하던 여자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제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창틈의 너비가 생각보다 좁았던지 몸이 꼼짝없이 끼어 버린 듯했다.
여자는 쏟아지는 눈을 맞으면서 몸을 빼내려 마구 버둥거렸다. 필사적인 몸부림이 무색하게도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그 처량한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던 카에드가 뒤늦게 대답했다.
“작전이 끝나면 보내 줘야지.”
별다른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카에드는 오두막집을 나와 헛간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 바깥으로 난 작은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괴롭게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안 빠지는 거야…!”
카에드는 창문 사이에 몸 절반이 껴서 버둥거리는 여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두막집에서부터 시선을 빼앗더니만, 가까이서 보니 가관이었다. 꽉 끼어서 나오지 않는 엉덩이를 어떻게든 빼내려고 몸부림치는 여자를, 그는 대체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말을 잃고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카에드와 눈이 마주치자 사색이 되어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시선을 피하며 몸을 축 내려뜨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뭐 합니까?”
“…….”
대답 대신 여자는 뺨을 붉히고 입술을 깨물었다. 와중에 렉터가 준 산딸기는 다 해치웠는지 달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도망이라도 가시게?”
“그게 그러니까….”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시선을 배회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다 맹랑하게 치켜뜬 눈이 카에드에게 향했다.
“절 내보낼 생각이 없어 보여서요.”
“누가요.”
“그쪽이요.”
“그래서?”
“그, 그래서… 저 혼자서 어떻게든 나가 보려고 했을 뿐이에요. 여기 있으면 폐만 끼칠 게 분명해요.”
본인 처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 건가. 카에드는 대롱대롱 매달린 여자를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우리 일만 끝나면 얌전히 보내 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쪽 부하가 말한 거지, 그쪽이 약속한 게 아니잖아요.”
창틈에 엉덩이나 낀 주제에 당돌하게 대꾸도 할 줄 알고. 카에드는 팔짱을 낀 채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럼 어디 한번 가 봐요.”
반항기를 머금었던 여자의 낯에 그제야 당혹감이 스쳤다.
“가 보라고.”
거듭 종용하자 여자는 카에드를 원망스레 올려다보았다. 곧 의기 어린 얼굴로 창틀을 부여잡더니,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빼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금세 기운을 잃은 여자는 팔을 길게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여자는 슬픈 눈으로 카에드를 올려다보았다.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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