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32)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32화(132/150)
“…….”
힘없이 감기는 푸른 눈이 모든 것을 훑었다. 주검이 되어 흐트러진 다섯의 병사, 바닥에 넘어진 숲지기와 부하의 멱살을 틀어잡은 카에드까지. 여자는 한참이나 그를 멀거니 응시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의중을 알 수 없는 시선이 오갔다.
그 순간이 어째서 영겁처럼 느껴졌는지, 뺨을 스치는 눈발과 귀곡성 같은 바람 소리보다 어째서 그 시선 하나가 매섭게 와닿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켜 달아나기 시작했다. 두어 번 넘어지면서도 미친 듯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 나갔다.
로이는 불안한 눈으로 남자의 허둥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 카에드를 보았다.
“…….”
쫓으면 얼마든지 잡아서 죽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를 잡는 것보다 더 긴급하게 대처할 일이 있었다.
“우리의 존재는 이미 윗선에 전달되었을 테지.”
검집에 칼을 넣은 카에드가 로이를 바라보았다.
“조사차 파견한 위병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쪽으로 병사를 보낼 거다. 우리가 무얼 계획하고 있었는지 저들이 알아차리는 것도 시간문제야.”
“…….”
“군량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지금 당장 호크와 합류해서 반절의 군량이라도 전소시켜야 해.”
“알았어요.”
카에드의 말에 로이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낭패감이 어린 얼굴로 여자를 응시했다.
“저 사람은….”
카에드 또한 시선을 옮겨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헛간에 붙들어 놓았던 여자. 이미 다른 이들에게 들킨 마당에 그녀를 데리고 이동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를 헛간에 내버려 두면 동료를 찾아 이곳으로 온 위병들이 그녀를 발견할 것이다. 도주 중인 데다 헐벗은 여자를 보고만 있을 리가 없다.
십중팔구 이 자리에서 해코지하거나, 여자의 남편에게 돌려보내거나. 행운이 따라 준다면 위병과 마주치기 전에 추위로 목숨을 잃고, 더러운 꼴을 보지 않아도 될 텐데.
아니면 카에드가 자비를 베풀어 지금 그녀의 목을 그어 줄 수도 있었다.
여자의 창백한 얼굴 위로 눈발이 들이쳤다. 그녀의 운명은 온전히 카에드가 내리는 결정에 달려 있었다.
“이곳에 내버려 둘 순 없겠지.”
길지 않은 공백 끝에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고 나서 합류할 테니까, 네가 호크에게 먼저 가서 상황을 전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로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작전은 저희 선에서 끝내 보겠습니다. 두목은 동행이 생겼으니, 근처에서 기다려 주시면 저희가 일을 마치고 나서 합류할게요.”
“…….”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몸도 사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군량 전부를 태우든, 절반을 태우든 어차피 우리는 장벽을 넘어서 전쟁을 치러야 하잖아요.”
로이의 말대로였다. 공작 군의 후방으로 돌아와 보급선을 끊는 작전은 승전을 위한 첫 단추일 뿐, 전쟁은 불가피했다. 북부 야인 군대를 통솔하는 사령관의 존재는 더없이 중요했다.
부하의 제안에 카에드는 턱을 가벼이 끄덕였다.
“파수병의 교대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빈틈을 노리면 좋겠지만, 주둔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무리해서라도 작전을 감행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겨 놓을 테니까 일이 끝나면 지체하지 말고 뒤따라와. 할 수 있겠지?”
“맡겨 주세요.”
로이는 손등으로 제 얼굴의 피를 쓱 닦았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짤막한 인사를 마친 로이가 말에 올라타서 빠른 속도로 눈밭을 달려 나갔다.
걸음을 돌린 카에드가 헛간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여자를 안아 들었다. 그녀는 두려운 기색도 없이 고분고분 그의 품에 안겼다.
말 위에 여자를 올리고 훌쩍 올라탔다. 흑마는 투레질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로이가 갔던 곳과 반대 방향을 향해 질주했다.
카에드는 추적당할 것을 고려하여 대로가 아닌 숲 안쪽에 있는 길로 말을 이끌었다. 머릿속은 복잡한 상념으로 엉켜 있었다.
여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도주 중인 여자가 당장 갈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있을까.
동전이라도 쥐여 주어서 남부로 향하는 삯마차를 태우는 편이 최선일 텐데, 그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장막을 두른 듯 어두운 밤하늘에서 눈이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내렸다. 맞닿은 작은 몸에서는 상처 입은 소동물이 낼 법한 아슬아슬한 호흡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시선을 내리자 푸른 눈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줄 알았더니 줄곧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확히는, 갈피를 잡지 못한 그의 속내를.
“…….”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지척에서 눈을 맞대는데 높은 온도의 물을 왈칵 엎지른 것처럼 가슴께가 달아올랐다. 그곳에서부터 전해진 열이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듯한 터무니없는 느낌까지 일었다.
카에드는 문득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뿌연 구름에 가려진 달이 며칠 전보다 좀 더 둥근 모양을 갖춘 채 반짝였다.
불티처럼 자그마한 감정도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만월의 밤. 그들을 짐승으로 낙인찍을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북쪽으로 향할수록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쳤다.
평범한 인간의 시야로는 사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점차 떨어지는 기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정면에서 눈바람을 맞던 여자가 힘겹게 쌕쌕거렸다. 한없이 약해지는 여자를 데리고 눈길을 이동하는 일은 더 이상 무리였다.
짧게나마 몸을 누이고 체온을 올릴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부하들과의 합류를 고려해서도 너무 멀리 이동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멀찍이 마을에서 희부연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농가 몇 개가 모여 이룬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흐으….”
품 안에 안은 여자의 잇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카에드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마을로 향했다.
칼스비크의 변두리에 있는 이런 작은 농가의 사정이 좋을 리 없지만, 여차하면 여자가 입을 겨울옷이나 신발 정도는 강탈할 수 있을 터였다. 삯으로 쓸 금품은 어렵더라도….
“…….”
문득 자신이 왜 이런 기행을 떠올리고 있는 건지 허탈한 자각이 몰려왔다. 안 하던 짓을 하니 실성이라도 해 버린 걸까.
아니, 아마도 여자를 어서 떼어 내야 하기 때문이겠지. 그것 말고는 이 기이한 행동을 해석할 길이 없었다.
농가와 약간 동떨어진 곳에 2층짜리 건조물이 하나 보였다. 공용 헛간으로 보이는 그것은 낡았지만 당장 눈보라를 피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말에서 내린 카에드는 여자를 안아 들고 헛간으로 향했다. 망토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가느다란 팔이 힘없이 덜렁거렸다.
헛간은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아 곳곳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그러나 앞서 여자를 가둬 두었던 곳보다 훨씬 넓고 따뜻한 곳이었다.
말이나 소 따위가 있어야 할 1층은 텅 빈 상태였다. 식량이 극히 부족한 혹한기였으니 가축은 일찌감치 잡아먹혔을 테고, 쓰임을 잃은 헛간도 자연스레 인적이 끊겼을 것이다. 몸을 숨겨야 하는 그들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카에드는 건초가 어지러이 흩어진 1층에 말을 매어 놓고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이따금 관리인이 지낸 공간이었던지 모포가 하나 깔려 있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데다 낡아빠진 모포였으나 제법 두꺼워 보였다.
놀랍게도 벽 한쪽에는 불을 피울 수 있는 작은 화로와 마른 장작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버려진 헛간에서 불을 피워 괜한 인기척을 내는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 모포만이 지금 상황에서 부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였다.
카에드는 먼지를 대강 털어 낸 뒤 망토에 둘러싸인 여자를 눕혔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발치에 앉아 1층을 내려다보는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자취를 감추어야 하는 상황에서 뜻밖의 실책으로 적군에 발각되고 말았다. 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한 달 가까이 세운 작전은 성공해 봤자 기존 계획보다 반절밖에 안 되는 결과를 거둘 것이다.
심지어 귀찮은 여자까지 달고 있다. 춥고 배고파해서 손도 많이 가는 데다, 갈 곳이 없어 처치 곤란인 여자. 옷과 신발이라도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골치는 아니었을 텐데. 아니, 애초에 없애 버렸으면 쉬웠을 일이었다.
얼굴을 거칠게 쓸어 만지던 손이 절로 연초를 찾았다. 그러나 콜록대는 기침 소리가 들려오자 손짓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으으….”
가느다랗게 앓는 신음이 뒤따랐다. 카에드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응시했다. 검은 망토 아래에 깔린 작은 몸이 쉴 새 없이 후들거리고 있었다. 모포도 깔려 있고, 방한 효과도 있는 망토를 둘러 주었더니 왜 자꾸 새끼 동물처럼 끙끙거리는지.
몸을 일으킨 그는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상태를 살펴보았다.
“…….”
그녀의 드레스 앞섶이 흠뻑 젖어 있었다. 눈보라가 치는 와중에 빠른 속도로 말을 타고 오면서 망토를 제대로 여미지 못한 탓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너울너울 그려졌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주제에, 사냥개까지 풀어 자신을 쫓는 남편에게서 몇 번이고 도망치면서까지 살고자 했던 여자의 얼굴에 어둠이 지고 있었다.
힘없이 올려 뜬 여자의 눈이 카에드를 향했다. 이쯤 되면 기절할 만도 한데,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발악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의식을 잃었다간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으니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는 거겠지.
그녀를 잠시간 내려다보던 카에드는 성큼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에 있는 자그마한 화로를 향해서였다. 장작을 모아 넣고 점화용 철편에 돌을 긁어 익숙하게 불을 피웠다.
머지않아 장작에 불길이 조금씩 솟아올랐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로에서부터 따뜻한 온기가 번져 나왔다.
카에드는 여자가 깔고 누운 모포를 한 손으로 끌어 화로 가까이 데리고 왔다. 그녀의 팔 아래로 손을 넣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여자 입장에서는 경계할 만한 손짓이었는데도 반항은 전해져 오지 않았다.
카에드는 젖은 옷감이 축축하게 달라붙어 굴곡을 드러낸 여자의 몸을 잠시 응시하다, 허리께로 손을 뻗었다.
“……!”
그녀는 제 몸 가까이 다가오는 손을 멍한 눈으로 보다가 숨을 헉 들이켰다. 카에드가 조심스럽지 못한 손길로 드레스를 벗기려 하고 있었다.
“하지 마…!”
어찌나 급했는지 꼬박꼬박 존대를 쓰던 여자가 그의 손을 움켜잡고 외쳤다. 그래 봤자 그에겐 약간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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