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34)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34화(134/150)
그녀의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밭은 숨소리가 길고 곧은 결을 띠었다. 콩닥거리던 박동 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카에드는 그녀가 제 품에서 완전히 곯아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짝 경계심을 세울 땐 언제고, 낯선 남자 품에서 홀딱 벗은 채 고롱고롱 잘도 잤다.
“하아….”
미처 소리 내지 못한 기나긴 한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종전을 판가름하는 전투를 앞둔 그가 여기서 계획에도 없던 여자 뒤치다꺼리를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날이 밝으면 마을에서 여자가 껴입을 만한 옷가지와 신발을 가져다 입히고, 체력을 회복하는 대로 제게서 떨어뜨릴 계획이었다. 삯으로 낼 금품이 없으니 반지라도 빼앗아서 강제로 마차를 태워 버려야겠지.
그래야 부하들이 작전을 마치고 복귀했을 때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장벽 너머로 향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고 나면….
불현듯 짙은 피로가 몰려왔다. 죽고 죽이는 일은 4년 내내 일상처럼 겪은 것인데도, 뇌리에 담기가 무섭게 버거운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다시 끝모르는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가기 전에 까무룩 잠들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마음 놓고 잠을 청하는 법을 모르는 카에드는 그저 눈을 내리뜬 채 무의미한 호흡만 반복했다. 언제쯤이면 이 아득한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끝을 볼 수 있을지 가늠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때, 여자가 몸을 더 둥글게 말고 카에드의 품 깊숙이 들어왔다. 무의식중에도 자꾸만 온기를 찾아 파고드는 모양새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여자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려고 이리 발버둥을 치는 걸까. 갈 곳도, 가진 것도 하나 없이 맹목적으로 달아나기만 하면서. 카에드는 무겁게 침잠한 눈으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타인의 의중을 헤아리는 일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카에드는 그저 자신을 헝클어뜨리는 이 밤이 어서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제게 닿기 위해 꿈틀거리는 여자를 마주 안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폭풍우처럼 맹렬하게 몰아치는 눈보라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그 탓에 바깥은 지금도 한밤과 다를 바 없이 어두컴컴했다.
카에드는 잠에 빠져든 여자를 놓고 몸을 일으켰다. 피딱지가 엉겨 붙은 여자의 발바닥이 또 망토 밖으로 삐죽 나와 있기에 옷을 당겨 덮어 주었다. 저 상처 입은 발에 대충 붕대라도 둘러 놓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는 헐벗은 상체에 윗옷을 꿰입고 헛간 1층으로 내려왔다. 문을 열어젖히자 귀곡성 같은 설풍이 틈으로 파고들었다.
“어디 가요…?”
2층 난간 너머에서 졸음을 지우지 못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를 올려다보자 난간 틈으로 얼굴을 내민 그녀가 눈을 비비며 카에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네? 잠깐만요…!”
다급해진 음성이 그를 붙잡았으나 카에드는 열린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카에… 저, 저기요!”
쿵, 헛간 문이 닫힘과 동시에 그는 미간을 좁히며 뒤를 돌아보았다. 잘못 들은 건가. 여자에게 제 이름을 알려 준 적은 없는데.
“…….”
굳게 닫힌 문을 응시하던 그는 상념을 밀어두고 두툼하게 쌓인 눈밭을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누군가 헛간 주변을 돌아다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부하들의 자취 또한 찾을 수 없었다. 그 혼자였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적군의 주둔지를 찾아가 보았을 테지만….
아니, 여자는 둘째 치고 일단 합류를 위해 근처에 있기로 약속해 두었으니 자리를 비우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짤막한 한숨을 내리 쉰 카에드는 헛간에서 떨어진 마을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눈발을 뚫고 근처 농가에 다다른 카에드는 창문을 열고 가볍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기척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난로 속 불길은 꺼진 지 오래였고, 작은 공간에는 지독한 적막이 흘렀다.
카에드는 밤사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 부부에게 힐긋 시선을 던졌다. 식량이 변변치 않은 곳이니 아사했을 수도 있겠지.
시선을 뗀 그는 옷장을 열어 여자가 입을 만한 두툼한 겨울옷 몇 개와 털 신발을 꺼냈다. 흰 수건도 두어 개 집어 들었다.
부엌으로 들어와 성의 없이 열어본 수납장에는 말라비틀어진 도토리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더 뒤져 볼 필요도 없었다. 집 밖으로 나와 걷던 도중, 근방 덤불에서 여자가 먹을 산딸기를 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헛간으로 돌아오던 카에드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굳게 닫아 놓았던 문이 한 뼘 정도 열려 있었다. 누군가 들어왔거나, 아니면 여자가 나갔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지막이 욕설을 지껄인 그는 빠른 걸음으로 헛간을 향해 다가갔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마자 문 근처에 서 있던 여자와 곧장 마주쳤다.
“악!”
여자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카에드를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젯밤처럼 카에드의 검은 망토를 꽁꽁 두른 차림이었다. 그 하찮은 꼬락서니를 내려다보던 카에드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옅은 조소를 터트렸다.
“그 꼴로 또 어딜 가려고.”
열린 문틈으로 바람이 몰아치자, 옷자락 사이로 나온 여자의 하얀 종아리가 발발 떨렸다. 카에드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다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장난해요?”
“아니요….”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는데.”
“저기, 도망치려던 게 아니에요.”
여자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쪽이 저를 두고 가 버린 줄 알았어요. 일행을 찾으러 간 게 아닌가 싶어서….”
“금방 돌아올 테니까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바람 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안 들렸는걸요. 쫓아가려고 내려와서 문을 열었는데, 그때 저 말을 보게 되어서요.”
말꼬리를 흐린 여자가 1층 구석에 매어 둔 카에드의 흑마를 가리켰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흑마가 조그맣게 투레질하며 발을 한번 굴렸다.
“그래서 떠난 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말을 두고 멀리 갈 수는 없으니까.”
카에드는 진의를 파악하듯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어제보다 혈색을 띠는 얼굴에 조금 억울하다는 기색이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흑마를 발견하고서 1층에서 우왕좌왕하던 도중에 돌아온 카에드를 마주친 모양이었다. 카에드는 아직도 넘어진 자세로 앉아 있는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성가시게 하지 마요.”
“죄송… 앗!”
그대로 홱 낚아채서 제 어깨 위로 올렸다. 당황하여 허우적대던 그녀가 축 몸을 늘어뜨렸다.
“왜 사람을 짐짝처럼 들고 그래요….”
카에드는 구시렁대는 소리를 무시하며 헛간의 2층으로 올라왔다. 여자를 모포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발 보여 줘 봐요.”
그리 말하면서 여자가 미처 움직일 새도 없이 발목을 붙들었다. 망토 사이로 감추어진 다리가 드러나자 그녀는 옷자락을 꾹 움켜쥐고 저항했다. 그러다 카에드가 무엇을 할지 깨닫고는 두 다리에 힘을 뺐다.
카에드는 품에서 술이 든 통을 꺼내 그녀의 발 위에 쏟았다. 따끔한지 흠칫하는 기색이 돌아왔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건을 집어 들어 발을 감쌌다.
“상처가 심하지는 않네요. 아파요?”
“아뇨…. 걸을 수 있어요.”
“도주 중이면서 걷는 정도로 회복해서야 되겠어요?”
질책을 던진 그는 늘 휴대하던 붕대를 꺼내 자그마한 발에 꽁꽁 둘렀다.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마주 보지는 않았다.
“달릴 수도 있는걸요.”
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카에드는 내친김에 농가에서 가져왔던 털 신발까지 신겨 주었다. 다행히 그녀에게 딱 맞는 치수였다.
그는 겨울 외투를 포함한 옷가지들을 집어 그녀 앞에 툭 떨어뜨렸다. 밤사이 빳빳하게 마른 드레스도 일단 건넸다.
“입어요.”
뭐라 말하려던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제 앞에 수북이 쌓인 옷가지를 응시했다. 그러다 슬쩍 눈망울만 들어 올려 카에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눈에는 막연한 두려움과 어째서 제게 이런 후의를 베푸는지에 대한 의아함이 묻어 있었다. 카에드는 속내를 훤히 내보이는 저 푸른 눈이 불편했다.
“뭘 멀뚱히 보고만 있어요.”
“…….”
“내가 입혀 줘요?”
“아뇨!”
기겁을 한 그녀는 망토 사이로 팔만 빼내서 주섬주섬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카에드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잠깐 뒤로 돌아 주세요.”
맹랑한 요구가 어처구니없었다. 지난밤 그에게는 저 옷감 안에 숨겨진 나신을 볼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단순히 볼 기회뿐이었겠는가.
생각과는 달리 카에드는 여자의 요구대로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사부작거리며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어젯밤 느꼈던 감각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몸 군데군데를 스쳤다. 목덜미에 열이 오르면서 단전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다 입었어요?”
“아직이요!”
“얼른 입어요.”
괜히 그녀를 재촉하자 허둥지둥 속도가 붙는 게 느껴졌다. 카에드는 좀 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다. 쓸데없이 예민한 청각은 여자가 자그맣게 숨을 뱉는 소리까지 모조리 잡아냈다. 그는 조용히 헛숨을 흘리며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 만졌다.
“이제 다 됐어요.”
여자가 옷자락을 쓸어내리며 한결 차분해진 말투로 말했다. 카에드는 부러 뜸을 들이며 화로 안에 장작을 던져 넣은 뒤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이제껏 보았던 표정 중에서 가장 의연한 낯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습지도 않았다. 목 끝까지 덮는 겨울옷을 입고 있으니, 대단한 갑옷이라도 착용한 양 그를 마주할 용기가 생긴 모양이지.
“고마워요. 훨씬 따뜻해요.”
“먹어요.”
카에드는 그녀의 인사를 넘겨들으며 덤불에서 따온 붉은 과일을 건넸다.
그녀는 보기만 해도 새큼한 과일을 냉큼 받아 들고 조금씩 씹어먹었다. 산딸기에서 나온 즙액 때문인지, 밤사이 체력을 회복해서인지 오동통한 입술에 새붉은 혈색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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