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36)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36화(136/150)
그녀는 그리움을 머금은 눈으로 아롱거리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사실 처음 들었을 땐 별 감흥 없는 이야기였어요. 요정이니 소원이니 다 애들이나 믿을 법한 이야기잖아요.”
“본인도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라면서 왜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는 겁니까?”
카에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녀는 실언한 것처럼 뜨끔한 얼굴로 재빨리 말문을 돌렸다.
“아무튼 한 시간이 넘도록 그 호수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말해 주시는데, 되레 어머니가 즐거워 보이셔서 그냥 들어 드렸던 기억이 나요.”
“어떤 호수라던가요?”
“음…. 끝모르게 펼쳐진 물결 위로 반짝이는 요정 수천 마리나 날아다니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수면이 거울처럼 빛을 반사한 덕분에 반짝임이 배가 된다는 거예요. 호숫가 앞에 앉아 있으면 마치 은하수에 둘러싸인 기분이래요. 언젠가 꼭 한번 가 보고 싶어요.”
그녀는 꿈꾸듯 기억을 늘어놓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지 않아 카에드는 자신이 여자가 묘사하는 그 호수에 가 본 적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소년 시절 블카노프성을 몰래 빠져나와 근방 숲속 깊은 곳을 거닐다가 발견한 멜리 호수였던 것이다.
카에드는 그녀에게 여기 칼스비크 어딘가에 그 호수가 있다고 말해 주려다가 관두었다. 상당히 기대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의 입으로 여자가 듣고 싶은 바를 전달해 주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그의 눈엔 그저 꽁무니에서 빛내는 벌레가 날아다니는 장소였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적에 함께 보냈던 시간이 요즘에서야 하나둘 떠오르는 거 있죠. 좋았던 기억에 의지하고 싶었나 봐요.”
겹친 팔 위에 얼굴을 기댄 여자가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 카에드는 오랜 기억을 회상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자리한 얼굴 위로 화로에서 번진 불빛이 느릿하게 물결쳤다. 동글동글한 이마와 혈색이 도는 코끝, 타액을 조금 머금은 선홍색 입술 위로도.
“어머니는 원래 불임 판정을 받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찾아온 거래요. 지금 생각해 보면 환생이랑 관계가 있는… 아니, 아니지. 아무튼.”
그녀는 허둥지둥 말을 끝맺었다. 그러고는 카에드를 향해 호기심을 내비쳤다.
“그쪽은 가 보고 싶은 곳 있어요?”
“없습니다.”
“아, 음…. 한 군데도요?”
“없어요.”
“네….”
딱 잘라 말하자 그녀가 무안한 듯 시선을 떨구었다.
“그래도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잘 생각해 보면….”
바로 그때, 카에드는 미간을 좁히며 아래층에 있는 헛간 문을 응시했다. 바짝 경계하는 그를 향해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카에드는 검지를 제 입술 위로 조용히 갖다 대었다. 눈바람이 몰아치는 밖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덩달아 심상치 않은 기류를 알아차린 그녀는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밖에 누가 있는 거예요?”
“아마도요. 내 일행일 수도 있겠죠.”
카에드는 다른 가능성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두엇이 넘는 발소리 틈에 네발짐승의 기척까지 끼어 있던 탓이었다.
늑대를 길들일 줄 아는 발켄족 부하들이 길에서 만난 야생 늑대를 데리고 온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늦어도 작전은 자정에 감행되었을 테고, 자신을 찾아올 수 있도록 표식까지 남겨 두었으니 슬슬 모습을 드러낼 때도 되었다.
반면 사냥개를 동반하고서 여자를 쫓아온 자들일 가능성도 다분했다. 카에드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일단 내려오지 말고 여기 있어요.”
“잠깐만요…!”
갑자기 손을 뻗은 그녀가 카에드의 손을 붙들었다. 눈길이 중력에 이끌리듯 맞잡은 손으로 향했다. 카에드는 다시 눈동자를 들어 올려 그녀를 응시했다.
바로 그 순간, 헛간 밖에서 낯선 사내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맥슨 백작 부인!”
동시에 몸피가 거대한 개로 추정되는 짐승이 매섭게 울부짖었다. 사색이 된 그녀가 입을 틀어막았다.
“이곳에 계시는 거 다 압니다! 순순히 밖으로 나오십시오!”
공포에 질린 그녀가 카에드를 올려다보았다. 외침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백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돌아오시면 모두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거 다 거짓말이에요!”
여자가 마구 도리질 치며 속삭였다. 그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문짝을 응시했다. 인적이 드문 마을이라지만, 소란이 더 이어지기 전에 저들을 처리하는 게 현명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어요. 절대 속으면 안 돼요. 저를 내보내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카에드는 공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여자의 어깨를 힘 있게 움켜잡았다.
“알았으니까 걱정 말고 이 손 놔요.”
“어, 어떻게 하려고요?”
“죽여야죠.”
짧게 일축한 그가 그녀의 손을 놓고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별다른 수가 없었다. 피워 둔 화롯불이 근방에 있는 이의 주의를 끄리라는 건 일찌감치 예상한 바였다.
카에드는 망설임 없이 헛간 문을 열어젖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깥에는 갑주를 착용한 기사 셋과 이빨을 드러낸 사냥개가 서 있었다. 그들은 무감한 낯으로 다가오는 카에드를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뭐야? 너는 누구냐?”
카에드는 칼을 빼 들면서 저벅저벅 간격을 좁혔다. 당황한 기사들 또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다가오지 마! 죽고 싶지 않으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너희가 찾는 여자는 여기 없어.”
조용히 중얼거린 카에드는 나란히 선 기사 둘의 목을 한 번에 그었다. 그대로 칼을 역수로 고쳐 쥐고 남은 한 명의 미간을 향해 내던졌다.
몇 초도 되지 않아 주검이 된 그들을 내려다보며 카에드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나무 뒤에 숨은 사냥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채가 어린 금안을 마주한 짐승은 끼잉 소리를 내더니 다리 사이로 꼬리를 말았다.
개를 가만 주시하던 카에드는 칼을 칼집에 넣었다. 눈치를 보던 개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더니 어딘가를 향해 총총 사라졌다.
카에드는 시신의 발목을 잡고 근처 덤불 속으로 던져 숨겼다. 펑펑 쏟아지는 눈이 덤불 위로 소복이 쌓였다. 파헤쳐 보지 않는 이상 그들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시 사냥개를 동반하고 찾아오는 이가 있다면 모를 일이지만, 그것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카에드는 기사의 은 갑옷에 새겨진 물고기 문양을 응시하다, 가볍게 손을 털고 헛간으로 들어왔다. 곧장 여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앗…!”
어느 틈에 1층으로 내려온 그녀가 기다란 갈퀴를 든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어찌나 필사적인 표정을 하고 있던지 자신을 공격하려던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녀를 빤히 응시하던 카에드는 갈퀴를 향해 가벼이 고갯짓했다.
“그거로 날 찌를 겁니까?”
“아, 아니에요….”
“아니면 내려놔요.”
“그 사람들 어떻게 됐어요?”
“이제 없어요.”
카에드는 그녀가 대단한 무기처럼 감아쥔 갈퀴를 홱 빼앗아 들었다.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쨍그랑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움찔하면서도 꿋꿋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 노백작도 같이 있었나요?”
“늙은이는 안 보이던데요.”
나지막이 답한 카에드는 시선을 내려뜨려 그녀를 훑었다. 후들대는 모양새가 영 별로였다.
그는 여자의 무릎 뒤에 팔을 둘러 번쩍 둘러멨다. 발버둥을 치며 저항하는 동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2층으로 올라왔다.
“사, 사람을 또 왜 짐짝처럼 들어요?”
당혹감에 어린 목소리가 그를 질책했다. 카에드는 불가 근처에 그녀를 내려놓고 앉았다.
“하던 얘기나 마저 해 봐요.”
“네… 네?”
“듣고 싶어서요. 마저 해요.”
“아니, 저….”
그녀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금대며 놀란 눈으로 카에드를 쳐다봤다. 무엇 때문에 저리 곤혹스러워하는 걸까.
“저기, 괜찮은 거예요?”
“내가 다친 것 같습니까?”
“그게 아니라 당신, 방금 사람을 죽….”
말꼬리가 연기처럼 흐려졌다. 카에드를 응시하던 여자의 눈이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갔다.
옅은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린 그녀가 카에드의 목 언저리로 손을 뻗었다. 아주 느린 속도였으나 그는 여자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각이 진 귀밑 턱 아래에 자그마한 온기가 닿았다. 떨리는 손끝이 무언가를 닦는 것처럼 조심스레 문질렀다. 살갗을 더듬거리는 여자의 지문이 여실히 느껴지면서 목에 핏줄이 바짝 돋아났다.
“피가….”
“…….”
“피가 묻어서요.”
망연하게 중얼거린 여자가 천천히 손을 물렸다.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입술이 무언가를 더 말할 것처럼 달싹이는데 이상하리만큼 애가 탔다.
…보기 좋게? 왜 그런 감상이 들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누구에게나 달린 입술일 뿐인데 보기 좋을 게 따로 있나.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완연한 보름달이 뜨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고, 하다못해 지금은 달이 뜬 한밤중도 아닌데. 어째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야릇한 감각에 휩싸이는 건지 모를 일이다. 머릿속에 허연 물감을 왈칵 엎지른 것처럼 백치가 된 기분이었다.
카에드는 꼼지락거리던 여자의 손을 붙들었다. 그를 만지작거린 지문에 선혈이 촘촘히 배어 있었다.
“더러운 걸 왜 만져요.”
카에드는 모포 위에 놓인 수건을 집어 그녀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저를 멀거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눈을 맞추지는 않았다.
불현듯 수건을 내던지고 이 작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빨고 싶다는 충동이 고개를 쳐들었다. 혀를 내밀어 손가락 사이에 자리한 부드러운 살도 핥고 싶었다.
선홍빛을 띠는 손톱과 도드라진 마디 없이 올곧게 뻗은 손가락. 여기에 그녀의 것과 반대로 마디가 불거진 제 큼지막한 것을 깍지 끼워 넣으면 어떤 모양일지 궁금했다.
카에드는 어디서 기인했는지 모를 그 불온한 욕망을 내리누르며 그녀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뒤늦게 인지했을 때 그는 여자의 손을 느릿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피는 깨끗하게 닦인 지 오래였고, 수건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래로 미끄러진 시선은 푸른 핏줄이 투명하게 비치는 손등을 훑었다. 그 위로 자리 잡은 붉은 흉터까지.
그것은 여자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눈앞의 여자가 지닐 만한 것이 아니었다.
눈동자만 바짝 들어 올린 카에드가 여자의 얼굴을 면밀히 훑었다. 바닷물을 머금은 듯한 동그란 눈망울, 보기 좋게 벌어진 입술. 보기 좋게….
시선을 인지한 여자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럼에도 카에드는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척이나 무거운 정적이 그들 사이를 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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