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40)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40화(140/150)
눈을 깜박이던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황태자 필립과 블카노프 공자였던 민튼이 지나치게 닮았다고 생각해 본 적 있지 않아요?”
그녀의 물음에 카에드는 쌍둥이라 해도 믿을 만큼 쏙 빼닮은 두 사람을 떠올렸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똑같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피처럼 붉은 눈동자와 백발에 가까운 은발이었다.
블카노프의 다른 가문원 중에서도 은발이나 적안을 지닌 이가 있었지만, 두 조합을 한꺼번에 지닌 데다 황가의 인물과 쏙 빼닮기까지 한 이는 공자가 유일무이했다.
“같은 핏줄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에요.”
카에드는 미간에 옅은 주름을 새겼다. 아주 오랜 기억을 반추하듯 그녀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초대 블카노프 공작은 역사에 길이 남을 공신이자 영웅이라 신처럼 숭배되었어요. 오랫동안 영웅의 그림자 밑에서 살아왔던 비아테 황실이 그를 달가워할 리가 없었죠. 그래서 그의 후손을 은밀히 멸족시키고 황실 사생아를 블카노프 가문에 심어 둔 거예요. 영웅의 가문을 집어삼키기 위해서요.”
“황실이 역사를 날조했다는 겁니까?”
“더불어 온 제국민을 속여 온 거예요. 하지만… 멸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어요.”
뜸을 들이면서 카에드를 응시하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 이유를 카에드는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미지의 영역에서 남부 문명과 동떨어져 살던 블카노프 공작 직계의 혈통이었어요. 황실 측에선 그 사람의 존재까지는 몰랐으니 뿌리를 뽑는 데 실패한 거예요.”
“…….”
“5세기가 지나서 그 사람의 피를 타고 내려온 후손이, 바로 당신이에요.”
선뜻 믿기 어려운 말에 카에드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녀는 역사를 뒤흔들 이 비밀을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수하들의 죽음을 예견하듯 상세히 알려 주었으니 이 또한 거짓은 아닐 터였다.
다만 몇백 년 전의 과거까지도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전지적인 시점에서 말하는 모습이 무척 이질적이었다. 마치 이 모든 비극이 그녀만이 아는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녀를 빤히 응시하던 카에드가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문원들로부터 근본도 없는 천출, 칼스비크에 기어들어 온 기생충이라고 불리며 멸시받았습니다.”
“…….”
“그런데 이 광활한 영지가 한때 내 조상이 소유했던 것으로, 내가 물려받아야만 했던 유산이라는 겁니까?”
카에드의 물음에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블카노프도 몸에 늑대의 피가 흐르는 발켄족이었어요.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은 카에드 당신이 상속해야 마땅한 일이에요.”
카에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공작에 의해 입양된 것도 결국 귀소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렇게 된 마당에 모두 의미 없는 사실일 뿐이었다. 증거 하나 없는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존재할 리 만무했고, 카에드는 이미 공자 살해 혐의를 입고서 칼스비크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었다.
허탈하게 조소한 카에드가 다른 물음을 던졌다.
“이 전쟁에 끝은 있습니까?”
“…있어요.”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용히 긍정을 표했다. 카에드는 눈을 내리뜨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군요. 어느 한쪽은 죽을 테니 당연히 언젠가는 끝날 전쟁이겠죠.”
“…….”
“승전을 거두는 사람은 내 양아버지인가요?”
“…아뇨. 당신의 승리예요.”
“듣던 중 다행이네요.”
그녀는 침묵을 유지하며 가늘게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카에드는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나른하게 뒤로 젖혔다.
이따금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기적이 있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곤 했다.
공자 민튼이 어깨에 화살을 박았던 밤, 놈의 목을 비틀지 않았다면 이 판국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테니까. 10년 가까이 개만도 못한 취급을 감내해 놓고 고작 그까짓 것을 참지 못했을까.
하지만 설령 그런 기적이 존재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애초 삶의 의지가 없는 그가 과거로 돌아가 무얼 할 수 있을지 생각하다 보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슬슬 일어나야겠군요.”
몸을 성큼 일으킨 카에드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걸음을 돌리려는데 저항이 느껴졌다. 그녀가 카에드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고마워요. 전부 다.”
자그마한 손은 더없이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멈칫한 카에드는 빈틈없이 마주 잡은 손을 보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물기가 고인 눈에 제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인사는 됐어요.”
눈길을 돌린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며 다시 걸음을 돌렸다.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가는 아주 위험한 욕심이 피어오를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맞잡은 손에서 연이어 저항감이 느껴졌다.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에드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손바닥에 머무르던 온기가 떨어져 나갔다. 부지불식간에 두 팔을 뻗은 그녀가 카에드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카에드는 시선 아래 놓인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너른 품에 뺨을 묻고 숨을 쌕쌕 내리쉬었다. 맞닿은 가슴에서 쉴 새 없이 두근거리는 박동이 와닿았다.
“장벽을 넘지 말아요.”
떨리는 목소리가 애원했다. 열망으로 흐려지던 정신을 번쩍 일깨우는 발언이었다.
“저랑 같이 가요. 남부로요.”
“…….”
“혼자 가기 무서워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저는 당신이….”
말끝을 흐린 그녀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더욱 깊이 껴안았다. 어떤 심정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카에드 또한 이름을 모르는 희미한 마음을 소리 내어 전달할 수 없었다.
그는 손을 올려 제게 안긴 여자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난생처음 타인을 달래기 위해 움직이는 손짓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자초한 전쟁입니다. 나만 살겠다고 도망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불행해질 거예요.”
“여기서 더 불행해질 것도 없습니다.”
카에드는 그녀의 양어깨를 틀어잡고 뒤로 슬쩍 밀어냈다.
“시간을 더 지체하면 안 돼요. 아까 내가 했던 말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겠죠.”
그녀는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울기 직전의 얼굴로 끄덕거렸다.
“기억하고 있어요.”
“…가요, 그럼.”
불쑥 고개를 쳐든 욕심을 끝끝내 짓밟으며 카에드는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걸음을 돌렸다.
창고 문을 열고 다시 골목길을 내달렸다. 호크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는 사람 하나를 겨우 태울 수 있는 작은 마차가 서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호크가 뒤를 돌아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서둘러야 해요. 저기 모퉁이 너머에 순찰병이 있어요.”
카에드는 호크가 가리킨 방향으로 힐긋 시선을 보냈다. 그들이 마차 앞에 선 모습을 들킨다면 그녀의 신변 또한 안전하지 못했다.
“어서 타요.”
그리 말하면서 카에드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손을 빼낸 그녀가 다급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재차 끌어안았다.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뜨인 카에드의 두 손이 그녀의 등을 마주 안았다. 그칠 줄 모르는 눈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펑펑 쏟아져 내렸다.
순박하게 생긴 마부가 안타까운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남편에게서 도망치는 여자와 그녀를 떠나보내야 하는 애인을 지켜보는 듯한 눈이었다.
“죽지 말아요.”
귓가에 물기 어린 목소리가 번졌다. 카에드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나직이 말했다.
“승기를 거머쥘 이가 나라면 죽을 일은 없겠죠.”
“죽으면 안 돼요.”
“가요.”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마차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유리창 너머로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찌 저리도 절박한 표정을 하는 걸까.
“꼭 살아야 해요.”
입 모양으로 말하는 그녀의 상기된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카에드는 닦아 줄 수 없는 눈물을 향해 홀린 듯 손을 내밀었다. 지문 끝에 닿은 건 온기가 아닌 차디찬 유리창이었다.
어여쁜 입술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죽지 말고 반드시 살아달라고. 선뜻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헤아릴 새도 없이 마부가 세차게 고삐를 휘둘렀다. 카에드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응시하며 짤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아.”
이름이라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두목!”
호크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카에드는 남부를 향해 내달리는 마차를 지켜보다, 무거운 걸음을 옮겨 말 위로 올라탔다. 그대로 마차가 갔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달려 나갔다.
카에드는 그녀 말대로 국경이 폐쇄되기 직전에 장벽 너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 밀입국했을 때 만들어 놓았던, 사람 하나가 드나들 수 있을 크기의 틈이 막히지 않은 덕분이었다.
그러나 군량 전소 작전은 완벽하게 실패했고, 북부로 복귀하자마자 시작된 전쟁은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군용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황실이 타국 상단에서 사채까지 가져다 쓴 탓이었다.
매일 밤을 불면에 시달리고, 산처럼 쌓인 시체 옆에서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단말마의 비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사고 회로를 망가뜨리지 않는 이상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참혹한 세계였다.
좋았던 기억으로 고난을 버텼다는 그녀를 떠올렸다. 카에드 또한 강한 색채를 지녔던 그 짧은 기억에 매달리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면 이어지는 교전을 감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위험을 무릅쓰고 그 혼자 다시 칼스비크로 내려왔던 적도 있었다. 붉은 간판을 내건 주점으로 돌아가, 호크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당시 레지스로 데려다주었던 여자의 행방을 물었다.
바다가 있는 곳에 무사히 도착했는지, 브로커를 통해 신분패는 만들었는지, 안정적으로 정착해서 잘 살아가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겨우내 눈보라가 쳤던 그 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주인 부부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을 때 불안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칼스비크를 벗어나기도 전에 사고를 당했던 걸로 기억해요. 마차가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우리가 고용한 마부도 생사를 알 수가 없게 되었거든요.”
신분패에 새긴 새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진짜 이름도 알고 싶었는데. 더는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을 삼키며 걸음을 돌렸다.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거대한 탈력감이 몰려왔다.
카에드는 해를 넘길 때마다 바닷가 마을에서 새 삶을 시작했을 여자를 그리며 결코 거머쥘 수 없는 희망을 품곤 했다. 이젠 그마저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말해 주었던 대로 전쟁 또한 카에드의 승리로 끝났다. 공작이 처음 전쟁을 선포했던 해로부터 17년이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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