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43)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43화(143/150)
필립은 카에드가 공작위를 물려받은 이래로 모든 게 불만이었다.
‘근본도 없는 천출이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을 거머쥔 것도 모자라, 북부의 자치권까지 차지하게 되었다니 터무니없는 일이다.’
심지어 그 권리도 제 앞에 누운 부황이 친히 넘겨준 것이다. 제국에 단 하나뿐인 대공이라는 작위에 봉함으로써.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황제 헤스턴은 뿌옇게 혼탁해진 눈으로 필립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놈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하고 싶어서 대공작에 봉했다고 생각하느냐?”
“…예?”
“너, 황실에서 블카노프 가문에 꾸준히 지원금을 조달했다는 건 몰랐겠지.”
“지원금이라니요?”
필립이 이맛살을 구기며 되물었다. 그러자 버석하게 마른 황제의 흰 입술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나왔다.
“비밀리에 행한 지원이라 해도 전혀 몰랐던 모양이구나. 황실의 출납 기록을 조금이라도 눈여겨보았으면 알아챘을 것을.”
황제는 무지몽매한 이를 보듯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정보에 필립은 눈초리를 가늘게 치켜세웠다.
“지원금이라니요. 대체 언제부터입니까?”
“까마득하게 오래전부터 이어진 관행이다. 크게 영지 관리 비용부터 블카노프 가문원의 품위 유지비까지 지원했지.”
“갑자기 웬 말도 안 되는 소리랍니까?”
울컥한 필립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 땅덩어리 하나 관리도 못 할 만큼 무능력한 선대 공작도 문제이건만 황실에서 금전까지 원조해 주다니요. 우리가 블카노프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건 사실이오나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 아닙니까?”
“말이 길어질 듯하니 일단 입 다물고 얌전히 들어라.”
아비의 일갈에 필립은 우뚝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만면에는 조금 전보다 더 강한 노기가 어려 있었다. 황제는 쉰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문제는 난데없이 작위를 물려받은 양자에게까지 지원금을 줄 순 없었다는 거야. 그리하여 일단은 공을 치하하는 시늉을 하면서 자치권을 부여한 것이다. 황실의 지원 없이 놈 스스로 칼스비크를 관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애당초 실권만 맡기시면 될 문제 아니었습니까? 굳이 대공으로 격상시켜 북부를 자립할 염려를 키울 필요가 있었습니까?”
“제국에 공작위를 가진 자가 일곱이다. 갓 공작이 된 어린놈에게만 영지의 자치권을 갖게 하면 나머지 공작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날 사태를 염려한 것이다. 그 때문에 놈이 성공적으로 이룩한 원정을 구실로 더 높은 작위를 하사한 게지. 황위를 계승할 자가 어찌한 치 앞도 모르고 입만 나불대느냐?”
필립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결과적으로 부황 폐하의 실책 아니었습니까?”
“그래, 내 실책이었지. 칼스비크는 본래 거대하기만 한 동토가 아니더냐. 수 세기 동안 발전하지 못했던 땅이 단기간에 그리 크게 번영할 줄 누가 알았겠어.”
가래가 낀 목소리로 으르렁거린 황제가 두어 번 기침을 해 댔다.
“대공작으로 승격시킨 뒤에 나는 놈을 로잘린과 이어 주려고 했지. 네가 칼스비크로 갔던 이유가 내 전언 때문이지 않았느냐?”
“기억합니다. 블카노프 가문에는 언제나 비아테의 피가 흘러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서출이라지만 내 혈통을 탄 로잘린이 놈의 씨를 수태했다면 뜻대로 되었을 텐데 말이지. 미련한 놈, 그것 하나 성공을 못 해서는.”
말끝을 흐린 황제는 연거푸 마른기침을 터트렸다. 불현듯 필립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물병을 부황의 얼굴에 쏟아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통수권은 일임해 줄 수 없다. 그 역사적인 땅을 망가뜨려서는 안 돼. 우리 선조들이 블카노프의 명예를 빼앗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연이어 이어진 알 수 없는 소리에 참다못한 필립이 언성을 높였다. 황제는 침실 문을 향해 힐끗 시선을 보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듣는 귀는 없겠지.”
“저 혼자입니다.”
“좋아.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극비니까 잘 들어라.”
위엄을 잃고 병들어 누운 부황을 묘한 눈으로 응시하던 필립의 눈에 점차 충격이 어렸다. 황제가 혼탁한 음성으로 늘어놓은 이야기 때문이다.
“개국 초기부터 블카노프의 권위와 위신은 버젓이 존재하는 황실을 보란 듯이 뛰어넘었다. 위기감을 느낀 우리 선조는 그 가문을 깡그리 몰살하고 칼스비크의 군주 자리에 사생아를 앉혀 놓았지.”
“비아테의 사생아를요…?”
“그래. 그의 피를 타고 내려온 자가 네가 익히 알던 선대 블카노프 공작이다. 너와 호형호제하던 공자도 마찬가지야. 모두 블카노프라 불릴 자격은 없었지.”
자신과 쌍둥이처럼 빼닮았던 공자 민튼을 떠올린 필립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이게 무슨…. 그럼 블카노프의 혈통은 모조리 죽고 없단 뜻입니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말을 이었다.
“본래 블카노프에겐 더러운 짐승 피가 섞여 있었다. 추종자도 다를 바가 없었는데, 그들은 일찌감치 국경 밖으로 추방했다고 하더군.”
짐승의 피라…. 스치듯 지나가는 어떠한 생각에 필립은 마른침을 삼켰다.
“전쟁 영웅을 시기하여 역사를 비튼 황가라니…. 염려스러운 이야기군요. 애초에 황실 직계 가문으로 날조했다면 더 낫지 않았겠습니까?”
“수백 년 전에나 살아 숨 쉬던 조상의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느냐. 단순히 비아테의 꼭두각시로 이용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가주 자리에 앉혀 놓은 사생아가 정실 혈통은 아니었으니 직계라 주장하기엔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겠지.”
필립은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었다. 순수 혈통의 중요성은 적자인 황태자가 누구보다도 명료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래전부터 그들을 지원해 온 이유는….”
“칼스비크는 제국을 떠받치는 초석이나 다름없고, 그곳의 주인이 된 자는 비아테의 맥을 이었다. 황실은 북부의 쇠망을 바라지 않아.”
결국 카에드의 손에 모조리 파멸했으니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껏 들은 정보가 필립의 뇌리에 퍼즐처럼 끼워 맞추어지면서 무척이나 불쾌한 예감이 싹을 피웠다.
만일 블카노프의 적법한 후계가 어딘가에 살아 있었다면? 이 모든 진실을 알고 제 것을 되찾기 위해 오래도록 계획해 왔다면….
‘그놈이….’
아니, 놈은 이미 뜻을 이루었다. 필립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게 뒤늦게야 이 말씀을 해 주시는 이유는 뭡니까?”
“대대로 블카노프 공작과 황제, 제국에서 단둘만이 지켜온 극비로 지위를 물려줄 때가 오면 후계자에게 남기는 전언이다.”
“폐하의 건강이 악화하였으니… 알려 주시는 겁니까?”
“네가 칼스비크를 치겠다기에 알려 주는 것이지. 난 연명 치료에 어떻게든 매달려 가능한 한 오래도록 생을 지속할 테다.”
“…공작가가 멸족되었으니 이제 부황 폐하와 저, 둘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거군요.”
필립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증거는 있습니까?”
“황실 직속 서기관이 대대로 기록해 온 로페른의 실록에 표기되어 있다.”
“서기관이라…. 증인이 한 명 더 있다는 뜻이겠군요.”
이리도 허술하고 어리석을 수가. 이래서야 극비도 아니지 않은가.
“저는 통수권이 필요합니다, 폐하.”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만약 제게 군사를 통솔할 권한을 주지 못하시겠다면….”
조용히 중얼거린 필립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일련의 행위를 보면서도 황제는 아들의 목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타계하시는 편이 좋겠군요.”
예상치 못한 발언에 황제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입을 벌렸다. 동시에 필립은 그의 얼굴을 베개로 덮치며 꽉 짓눌렀다.
격렬한 저항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중병에 걸린 늙은이의 발악을 제압하는 건 어린애 팔 비틀기보다도 쉬웠다. 필립은 허우적대는 황제의 한쪽 팔을 무릎으로 깔아뭉개며 베개를 내리눌렀다.
필립의 이마에서 떨어진 땀이 베개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몸부림은 차츰 잦아지면서 베개를 붙든 손에 힘을 빼도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는 꿈틀거리지 않는 황제를 내려다보며 필립은 희열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의 앞길을 막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노망난 늙은이. 진작 이렇게 해야 했는데.”
필립은 베개를 휙 집어 던지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전에… 증거 인멸은 확실히 해야겠지.”
노래하듯 뇌까린 필립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침소 바깥에서는 로잘린이 안색을 파리하게 질린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
침대에 누워 있던 세라엘은 창밖 너머로 귀퉁이가 이지러진 달을 올려다보았다.
여관을 떠나 열흘 넘게 마차를 타서 마침내 칼스비크로 돌아왔다. 다사다난했던 여정을 마치고 포근한 집에서 보내는 첫날이니 밤이 되자마자 곯아떨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세라엘은 말똥말똥하게 뜨인 눈을 연신 깜박였다.
태어나 평생 지금처럼 강한 욕구를 느낀 적이 없었다. 바로 달콤하고 아삭아삭한 청포도를 먹고 싶은 마음이었다.
몇 시간 전, 대공 부부의 귀성을 기리며 마련된 정찬에서 속이 영 좋지 않아 후식을 물린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뒤늦게 과일이 먹고 싶어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동그란 모양도 갖추지 못한 달을 보자 포도 생각이 나서 애가 탈 지경이었다.
“…….”
세라엘은 그녀를 꼭 껴안은 채 잠이든 카에드를 흘깃 응시했다. 내리감은 눈과 규칙적인 숨소리로 하여금 그가 깊은 잠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에드는 좀처럼 수면을 취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칼스비크로 돌아오는 여정에도 세라엘을 보살피느라 단 한 번도 잠들지 않았던 그가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느지막한 밤이라 사용인 또한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터였다. 세라엘은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요?”
등 뒤에서 느른한 저음이 그녀를 붙들었다. 깜짝 놀란 세라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기절한 것처럼 자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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