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44)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44화(144/150)
“그게….”
차마 포도가 먹고 싶어서 식료품 저장고에 살금살금 다녀오려 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답이 늦어지자 나른하게 풀려 있던 카에드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세라엘은 그가 오해를 하기 전에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지금….”
“…….”
“포도가 너무 먹고 싶어요.”
스스로 내뱉고도 너무 어린애 같았나 싶어 세라엘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카에드는 눈을 반쯤 내리감은 얼굴로 상체를 성큼 일으켜 앉았다. 그러고는 하루의 첫 일과를 시작하듯 버릇처럼 세라엘의 볼에 입술을 붙였다. 그에게선 그녀와 같은 비누 향이 나고 있었다.
“어떤 포도요.”
카에드가 잠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포도가 먹고 싶어요. 아까 후식으로 물렸던 게 자꾸 생각이 나요.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잠깐 기다려요.”
무안해서 변명처럼 늘어놓는데 그가 헐벗은 상체에 셔츠를 대강 껴입었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침실을 걸어 나갔다. 덩달아 일어난 세라엘은 소파에 가 앉아 열없는 얼굴로 그를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카에드가 커다란 은쟁반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안에는 대략 다섯 송이는 될 법한 커다란 청포도와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 망고와 복숭아가 고이 담긴 유리그릇까지 놓여 있었다.
“와아.”
멋쩍어하던 게 무색하게도 세라엘은 반색하여 두 손바닥을 맞대었다. 카에드는 낮은 커피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그녀 옆에 앉았다.
포도는 알알이 뽀득뽀득하게 씻겨져 있었고, 다른 과일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상태였다. 한밤중에 그가 주방에 들러 사용인이 할 법한 번거로운 일을 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흡족한 웃음이 나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지금 저한테 가장 필요한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부족하지는 않아요?”
“전혀요. 완벽해요.”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알려 줘요.”
카에드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번쩍 안아 들어서 제 허벅다리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녀가 포도를 오물대는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세라엘은 과일을 먹다 말고 그를 응시했다.
“피곤할 텐데 먼저 가서 자요. 새벽에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먹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요.”
대수롭지 않게 답한 그가 두 팔로 그녀를 껴안으며 등에 뺨을 기댔다. 서로에게 각인한 뒤로, 카에드는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절대로 떨어져 있지 않으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 것 같았다.
“평소보다 열이 조금 높네요. 심박수도 빠르고.”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세라엘은 통통한 포도알을 집어 먹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요? 아픈 곳은 없는걸요.”
“날이 밝으면 곧바로 주치의를 만나는 게 좋겠어요. 성에 돌아오면 진찰을 받기로 약속했죠.”
“그렇게 할게요.”
세라엘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잇달아 과일을 먹었다. 평소 먹는 양보다 몇 배나 많은데도, 달콤한 과즙이 이상하리만큼 중독적이라 계속해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어디 보자…. 요즘 편찮은 곳은 없으시고요?”
주치의인 다튼 부인이 진료 기록을 펼치며 세라엘에게 다정히 물었다. 침실 내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세라엘은 허브차를 홀짝이며 도리질을 쳤다.
“없어요.”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은 없으셨을까요? 무엇이든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알려 주세요.”
“글쎄요…. 크게 불편한 건 아니라서요.”
“잠이 조금 늘었다거나 이런 사소한 변화도 좋아요. 영주님께서 마님 몸에 이상은 없는지 면밀하게 진찰해 달라고 하셨어요.”
다튼 부인이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세라엘은 뜸을 들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잠이 부쩍 많아졌어요. 뭘 하든 체력이 금세 떨어지는 것 같구요.”
“또요?”
“이전보다 소화가 조금 느려졌고, 종종 손가락이 부어요. 그렇지만 그 정도예요. 생활이 불편할 만큼 아픈 덴 없어요.”
기록부를 뒤적이던 다튼 부인이 희미하게 웃음기를 거두었다.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지만, 수도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 이후부터 불편하신 건가요?”
“아뇨. 수도에 가기 전부터 그랬어요.”
“수도에 가기 전부터라면 꽤 되었네요. 후유증은 아니겠고….”
그녀의 말을 되짚은 의사가 기록부에 뭐라 끄적였다. 그러고는 더욱 신중해진 표정으로 세라엘을 응시했다.
“이유 없이 구역질이 난다거나, 새콤한 음식이 당긴 적은 없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말끝을 흐린 세라엘의 뇌리에 어떠한 생각이 스쳤다. 사소한 것으로 치부했던 모든 증상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감이 잡혔다. 그녀의 답을 기다리던 의사는 깃펜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마지막으로 달거리를 하신 게 언제쯤일까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세라엘은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2개월쯤 되었어요.”
“2개월이요….”
의사가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늘이자 세라엘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생활 환경이 바뀌면 불규칙해질 때도 있어서요.”
“정밀 검사를 해 보고 싶은데 침상에 편하게 누워 보시겠어요?”
“네에….”
얌전하게 대답한 세라엘이 찻잔을 내려놓고 침대에 가 누웠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전혀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얼떨떨하고 가슴이 이상하게 콩닥거렸다. 세라엘은 땀이 밴 손을 꼭 말아 쥐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어수선한 마음을 알아차린 의사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대공 전하를 불러드리는 편이 좋을까요?”
성에서 일하는 사용인이 공사다망한 주인을 호출하겠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다만 카에드가 얼마나 강박적으로 세라엘을 보살피는지 지켜봤기에 할 수 있는 말일 터였다.
의사의 제안에 세라엘이 턱을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뇨. 일단 확실한지 알고 싶어요.”
몇 시간 뒤, 침실 안을 서성이던 세라엘이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유리창을 통해 드리워진 오후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밝은 빛을 비추었다. 칼스비크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손이 납작한 배에 가닿았다.
“희미하지만 태맥이 잡히네요.”
“정말요?”
“확실해요. 마님 몸 안에 두 분의 아이가 있어요.”
다튼 부인이 밝은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마냥 웃지 못했다. 유산의 위험이 있는 회임 초기에 안정을 취하지 못할망정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무언가 잘못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의사는 몸 여기저기를 문질러 보다가 이상한 향이 나는 약초를 태워 냄새가 어떠한지 묻고, 괴상하게 생긴 꽃을 달여 먹여서 반응을 확인하는 등 여러 가지 시험을 했다. 다행히 이상 없는 결과가 나왔다며 세라엘을 안심시켰다.
의사는 안정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 주었다. 부부 관계는 피할 것을 두어 번 당부하는데 낯이 다 뜨거웠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아이가 갑자기 크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곁에 좋은 남편이 있으니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으리라는 용기가 피어올랐다.
‘게다가….’
힌델로 향하던 마차 안에서 꾸었던 꿈도 태몽이 틀림없었다. 검은 토끼가 커다란 늑대를 뒷발로 사정없이 차던 꿈이었다. 문득 떠오른 상상에 세라엘은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카에드를 들입다 발로 차는 용맹한 아기를 가져 버렸다. 내가 엄청난 걸 가져 버렸어!
당장 집무실을 찾아가서 그에게 소식을 전해 주고 싶었다. 내 배 속에 범상치 않은 생명이 있다고 말하면 카에드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래도 오늘은 일찍 들어오겠다고 했으니 느지막한 밤에 차분히 알리는 게 좋겠지. 아냐, 장난을 좀 쳐 보고 싶기도 하고….
어떤 방법으로든 직접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의사에게는 임신 사실을 함구해 달라 부탁했다. 세라엘은 입꼬리에 번지는 웃음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배를 쓰다듬었다.
그날 밤, 2층 집무실을 나와 침실로 돌아가던 카에드는 혼자 복도를 걷는 세라엘을 발견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침실로 돌아가는 중인 듯했다.
후식으로 좋아하는 과일을 오물댔을 입술을 떠올리자 피실 웃음이 나왔다. 카에드는 느릿느릿 걸으며 세라엘을 따라갔다.
흡족한 마음도 찰나였다. 연두색 드레스 자락을 살랑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에 그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세라엘의 동그란 뒤통수에 꽂힌 시선이 느리게 몸 선을 훑고 옷자락 아래로 언뜻언뜻 보이는 발목까지 내려왔다. 무척이나 불온한 눈길이었다.
답 없는 무뢰한이 된 기분도 이제는 익숙했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여 그녀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세라엘.”
이름을 불렀는데도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지척까지 다가간 카에드는 뒤에서 세라엘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아악!”
난데없이 허공에 몸이 뜨인 세라엘이 비명을 내질렀다. 어찌나 놀랐는지 얼결에 카에드의 머리칼을 잡아당길 정도였다. 그는 소리 내어 웃으며 세라엘을 안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놀랐잖아요!”
“왜 불러도 대답을 안 해요.”
“못 들었어요! 이런 장난치지 마요…!”
작은 주먹이 그의 어깻죽지를 팡팡 때렸다. 미안하다는 듯 등허리를 토닥여 주니 그제야 조금 잠잠해졌다.
침실 내로 들어선 카에드가 그녀를 안은 자세 그대로 털썩 침대에 앉았다. 머지않아 약간 상기된 뺨에 쉴 새 없이 입술이 부딪혔다.
“식사는 했어요?”
“네에…. 같이 먹지 왜 얼굴만 보고 가 버렸어요.”
“일찍 들어오고 싶어서 밀린 업무를 봤어요.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세라엘은 일부러 뜸을 들이며 그의 입맞춤을 받았다.
“오늘 하루요?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답니다.”
“어떻게 좋았는지 말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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