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49)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49화(149/150)
“제 의견도 들어 주세요. 제가 알아야 할 게 있다면 알고 싶어요.”
세라엘이 움직이지 않으려 버티자 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순간적으로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러나 노기를 억누르듯 숨을 크게 내리쉰 카에드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황녀를 추대하는 움직임에는 힘을 보탤 겁니다. 하지만 필립을 재판에 회부한다 해도 이건 불가피한 전쟁이에요.”
“불가피하다니요? 전쟁이라면 어떻게든 막아 봐야 하잖아요.”
“피를 보는 게 필립의 소원이라면 기꺼이 응할 생각입니다.”
그에게서 뜻을 굽히려는 의지가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세라엘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꺼이 응하겠다구요…?”
“애초에 필립이 당신을 납치해서 타국으로 보내려 했던 이유는 내가 없는 틈을 타서 칼스비크를 칠 속셈이었기 때문이에요. 그게 실패했음에도 어떻게든 전쟁을 밀어붙이려는 걸 보면 놈은 단단히 각오한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어떤 아내가 남편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리라 믿고 선뜻 전쟁터에 보내겠어요.”
“지난 생에서처럼 죽지 못해 수백 번이고 반복할 전쟁이 아니에요, 세라엘. 단 한 번으로 끝날 것이고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이 될 거라고 약속할게요.”
카에드는 미열이 오른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내가 당신과 우리의 아이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줘요.”
세라엘은 흐려지는 시야로 카에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서러운 감정이 북받치며 조금씩 목이 메었다.
“두 번 다시 저랑 떨어져 있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도 지키고 싶어요. 그러려면 이 싸움을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던 세라엘은 두 팔을 뻗어 단단한 몸을 끌어안았다. 포근한 체향을 지닌 품에 뺨을 묻자 검은 셔츠가 젖어 들어갔다. 카에드는 세라엘을 끌어안고 동그란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었다.
“울지 말고.”
그는 고개를 숙여 눈물로 젖은 세라엘의 입술에 가벼이 입을 맞췄다. 앙증맞은 소리가 떨어져 나가며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보기 싫으면 울리지 말아요.”
“보기 싫은 건 아닌데 슬퍼서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카에드는 다시 세라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리 와요.”
세라엘은 잠자코 그를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부부 침실이었다.
오늘 밤은 그녀 곁에서 업무를 보겠다던 카에드는 테이블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로 세라엘의 드레스를 벗겨, 보드라운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카에드는 사용인을 불러 안정 효과가 있는 차를 가져오라 명령했다. 노곤하게 정신이 풀리는 달콤한 차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신 세라엘은 재차 그의 손에 이끌려 침대로 갔다.
거위 깃털로 가득 찬 베개를 베고 눕자 카에드가 턱 밑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과한 보살핌을 받는 아기 새가 된 기분이었지만 그게 썩 나쁘지는 않았다.
카에드는 마치 동화책을 읽어 주는 부모처럼 의자를 끌어 그녀가 누운 침대 가까이에 앉았다. 정말로 그의 손엔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웬 책이에요?”
세라엘이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그러자 카에드는 그답지 않게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장난스레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독서 태교가 좋다는 말을 들어서요. 당신과 아이한테 읽어 주고 싶었던 책이기도 하고.”
“정말요? 당신이요?”
마디가 툭 불거진 큼직한 손이 앙증맞은 책을 들고 있는 모습에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카에드는 목덜미를 쓸어 만지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목이 뭐예요?”
카에드는 대답 대신 책의 표지를 내보였다. 보라색 표지를 본 세라엘은 머지않아 빛바랜 기억 속에 새겨진 제목을 기억해 냈다.
“요정 호수 이야기….”
바로 어릴 적 세라엘의 모친이 읽어 주었던 책이었다.
“와아…. 그 책 정말 오랜만이에요.”
“나도 궁금했거든요. 세라엘 기억 속에 남았던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
소원을 들어주는 호수에 대한 설화는 비극에 빠져 허덕이던 세라엘이 무너지지 않게끔 지탱해 주었던 희망이었다. 카에드에게도 온전히 전해진 그녀의 희망은 지금 삶에서 운명처럼 두 사람을 다시 이어 주었다.
“어서 읽어 줘요. 아이한테도 들려주고 싶어요.”
카에드는 자그마한 책을 펼쳐 들었다.
“요정 호수 이야기.”
그러고는 고저 없는 음성으로 제목을 읊었다. 세라엘은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첫 장을 넘긴 카에드는 그녀와 한번 눈을 맞춘 뒤, 느린 속도로 동화를 읽어 나갔다. 그는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 주는 일이 익숙해 보이지 않았지만, 감미로운 저음은 동화와 놀라우리만큼 잘 어울렸다.
세라엘은 달빛을 내리받은 채 책을 읽어 주는 그의 모습을 응시하다가 눈을 내리감았다. 흐릿해져 가는 머릿속에 찬란한 불빛으로 반짝이는 호수가 떠올랐다. 수천 마리의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그 호수를 이미 다녀와 보았기에 어렵지 않게 그려 낼 수 있었다.
카에드는 그녀가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결재 서류를 집어 들었다. 쌕쌕대는 소중한 숨소리를 들으며 그는 뒤늦게 밀린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
로잘린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날 이후 닷새가 되는 아침이었다.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누군가 속닥거리는 음성이 잠결에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영주님께서 마님을 깨우지 말라고 명령하셨잖아.”
곤히 잠들어 있던 세라엘은 슬며시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시야 너머로 루시와 릴리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졸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를 깨울지 말지 망설이던 하녀들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루시가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조금 전에 황녀 전하께서 성을 방문하셨어요.”
“로잘린이 왔어?”
세라엘은 졸린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겁먹은 얼굴로 연신 뒤를 돌아보고 있는 릴리를 보니 카에드의 명을 어기고 세라엘을 깨우는 게 썩 내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들 어디 있는데?”
“1층 응접실에 모여 계셔요.”
세라엘은 루시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서찰에 정확히 몇 시쯤 도착하겠다는 말은 적혀 있지 않았으니, 종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건가 싶었던 걱정을 덜어 주는 방문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루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후작님께서도 지금 성에 와 계세요.”
“후작…? 설마 아버지가?”
흐린 머릿속을 단번에 일깨우는 소식이었다.
“아버지가 여길 왜? 혹시 카에드 님과 마찰이 있었니?”
“그렇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영주님께서 황녀 전하께 화가 나신 것 같았어요. 후작님을 동행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매섭게 물으시는 걸 들었어요.”
“로잘린이 아버지를 데리고 왔다는 거야?”
“그건 아니었어요. 대공성으로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 동행한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영주님께선 후작님께 당장 떠나라고 축객령을 내리셨어요. 영주님과 황녀 전하는 응접실에 가셨고, 후작님은 아직 1층 홀에 계실 거예요.”
“나도 내려가 봐야겠어.”
“세숫물을 준비해 드릴게요.”
이불을 밀치고 일어나자 하녀들이 서둘러 아침 단장을 준비했다. 세라엘은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은 뒤 급히 1층으로 내려갔다.
루시의 말대로 너른 홀에는 밀로즈 후작이 콜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후작의 어깨를 틀어잡은 콜은 곤란한 표정이었고, 악셀은 아니꼬운 눈으로 그를 흘겨보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이렇게 뻗대면 단테만 힘들다니까요.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나가요.”
“아직도 내 이름을 막 부르는구먼! 내가 자네 친구야? 이 무식하게 힘만 센… 아니, 이게 누구냐!”
막 계단에서 내려온 세라엘을 발견한 밀로즈 후작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굳어지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에게로 걸어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버지?”
밀로즈 후작은 흐트러진 옷을 갈무리하며 허둥지둥 다가왔다. 세라엘은 카에드와 황녀가 있을 응접실을 향해 힐긋 시선을 보냈다.
“대공 전하께도 말씀드렸다만 들으려 하시질 않는구나. 수도에 있는 친우에게서 이상한 소식을 하나 들었다.”
세라엘이 감흥 없는 얼굴로 응시하는데도,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급히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가 별세했다는 기밀이 온 제국에 퍼졌어. 그 버르장머리없는 흰머리 놈이 황위를 이을 거라는 소식도 함께였지. 문제는 황위도 계승하지 않은 놈이 장례나 대관식 따위를 집어치우고 황명으로 수도의 모든 병역 의무자를 소환했다더구나. 아주 강도 높은 훈련에 들어갔다고 들었어. 내가 이리저리 수소문해 보았더니 그게 모두….”
“칼스비크를 침공하기 위해서겠죠.”
세라엘이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황제가 사거했으리란 예상도 맞아떨어졌다. 밀로즈 후작이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었느냐?”
“네. 카에드 님도 알고 계시고요.”
뜨끔한 표정을 한 콜이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며칠 전 전서구를 보내다 그녀를 마주친 일을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세라엘은 다시 부친을 마주 보았다.
“아버지께선 저와 카에드 님께 경고하러 오신 거군요.”
“그, 그런 셈이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정보였으니 용건은 끝나셨네요. 이제 돌아가실 건가요?”
조용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후작은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데 피신하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피신이요?”
“대공 전하의 전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만, 전세가 어찌 될지 모르니까 말이다.”
“이상하네요….”
세라엘은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가만히 중얼거렸다.
“언제나 제 안전은 관심도 없으셨던 분이 걱정하는 투를 사용하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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