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50)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50화(150/150)
언제나 기회주의적인 부친이 그녀의 안전만을 위해 칼스비크로 왔을 리가 없다. 무언가 깨달은 세라엘이 헛숨을 터트렸다.
“칼스비크가 잘못되면 아버지의 입지도 곤란해질 테니 이리도 수선이신 건가요?”
밀로즈 후작은 차마 아니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다소 억울하다는 빛이 묻어 있었다.
“그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곳에 여식이 떡하니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으란 거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우리는 한 번도 가족이었던 적이 없잖아요.”
후작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듣다 못한 악셀이 짜증이 난 표정으로 나섰다.
“대화할 가치도 없어요. 저희가 쫓아낼 테니까 누나는 침실로 다시 올라가세요.”
“아니, 카에드 님한테 가 봐야겠어.”
세라엘은 부친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후작이 허겁지겁 그녀를 따라왔다. 악셀이 팔을 뻗어 그를 막아섰다.
“전쟁이니 뭐니 두목이 어련히 알아서 할 테니까 조용히 떠나세요. 홑몸도 아닌 사람을 자꾸 들쑤시지 말란 말이에요.”
“…홑몸이 아니라고?”
망연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세라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후작을 응시했다.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던지 그는 멍하니 벌린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에 밀로즈 후작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옅은 숨을 뱉었다. 무언가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얼굴이었다.
“저 안에서 몹시 중요한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걸 안다. 나도 그 자리에 참여하게 해 다오.”
“…….”
“부탁한다.”
세라엘은 그를 응시하며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였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부친의 속내를 구태여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가족은 카에드뿐이었고,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를 위태로운 정세에서 그녀가 신경 쓰고 싶은 사람도 역시 그뿐이었다.
세라엘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카에드 님의 환대를 바라지는 마세요.”
“물론. 대화가 끝나면 내 당장 성을 떠나겠다고 약속하마.”
밀로즈 후작이 냉큼 대답했다. 세라엘은 말없이 걸음을 돌려 홀을 걸었다.
응접실로 통하는 거대한 목제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어쩐지 높아진 언성이 안에서 들려왔다. 세라엘은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황제가 추잡한 병환을 앓았으니 언제든 사거하리란 예감은 했습니다만, 필립의 행보를 전해 들으니 병사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짐작이 맞습니까?”
카에드의 것임이 틀림없는 가라앉은 음성이 말했다. 그러자 로잘린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래요. 폐하께서 눈을 감기 직전까지 오라버니가 곁을 지키고 있었죠. 나는 침실 문밖에서 모든 것을 들었어요. 대공의 말대로 병사가 아니었습니다.”
“존속살인이라. 황녀 본인이 증인으로서 진술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나 보죠.”
“내게도 계승권이 있으니 모함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 부디 세라엘의 증언을 허락….”
대화 소리가 잘린 것처럼 뚝 끊겼다. 세라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문 앞에서 대기하던 하인을 보았다. 하인이 문을 열어 주었고, 그녀는 안으로 발을 디뎠다.
응접실 가운데 자리한 길쭉한 테이블에는 카에드와 로잘린이 앉아 있었다. 황녀의 옆에는 처음 보는 노인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들을 훑었다.
일찌감치 세라엘의 존재를 알아챈 카에드는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곧 그의 시선은 세라엘을 따라 들어오던 밀로즈 후작에게로 날아들었다.
“…….”
카에드는 서늘하게 얼어붙은 눈으로 후작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후작이 이곳에 들어선 건 세라엘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어떤 불만도 표하는 않았다.
세라엘은 말없이 카에드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가 앉을 의자를 빼 주고는 무릎 위에 두꺼운 털 담요를 올려 주었다.
“식사는요.”
“아직이에요.”
“간단히라도 들겠어요?”
“아뇨. 지금은 괜찮아요.”
카에드는 손마디로 그녀의 뺨을 훑었다. 날이 선 그의 시선이 밀로즈 후작에게 날아들었다.
“후작이 이곳에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세라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사용인이 가져다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불미스러운 일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황녀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착잡한 마음 때문인지 마냥 반갑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서찰은 잘 받았어요. 칼스비크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로잘린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천만에요. 아무리 급했다지만 너무 지나친 부탁이 아니었나 싶어 보내기 전에도 한참 고민했어요. 몸은 좀 어떤가요?”
“저는… 괜찮아요. 로잘린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괜찮지 않습니다.”
말을 끝맺자마자 카에드가 싸늘한 음성으로 맞받아쳤다. 그는 적대감이 어린 눈으로 황녀를 노려보았다.
“세라엘은 지금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충격을 받는 일이 없도록 신중히 생각하고 입을 열어 주십시오.”
매정한 일갈에 로잘린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금 세라엘을 향한 녹안에는 결연한 빛이 어려 있었다.
“나는 오라버니를 재판에 회부할 계획이에요. 황녀궁 안에서 벌어진 사건부터, 세라엘을 납치해서 해코지하려 했던 모든 일을 좌시하고 넘어갈 생각은 없어요.”
세라엘은 불안한 눈으로 카에드를 곁눈질했다. 일찍이 그와 말을 나누어 보았기에, 필립을 재판에 세우는 일에 대해 그가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모든 귀족이 황실 재판소로 모일 수 있도록 일찌감치 서간을 보내 두었어요. 세라엘에게는 직접 만나서 말을 전하고 싶었고요.”
“누가 납치를 당했었다고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밀로즈 후작이 불쑥 끼어들었다. 로잘린은 차분한 낯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직 전해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황녀궁에서 벌어진 강도 사건은 모두 오라버니가 꾸민 일이었고, 그것도 모자라 세라엘까지 납치하여 해를 입히려 했어요. 대공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요.”
후작은 할 말을 잃고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불안함에 입술을 짓씹던 세라엘이 조급히 입을 열었다.
“제게 황궁으로 떠날 준비를 해 달라고 했던 이유가 증언 때문이었나요?”
“사건의 증인으로서 세라엘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귀족들에게 알려 주길 바라서였어요.”
황녀의 말에 카에드가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 집어치우십시오.”
그는 세라엘에게 내보였던 애정은 모조리 걷어낸 메마른 눈으로 황녀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보낸 초대장 때문에 끔찍한 일을 겪어야 했던 세라엘이 다시 그 더러운 뱀 굴로 내려오길 바라다니 어지간히도 염치가 없군요.”
“언사가 지나치시네요. 그 일에 대한 책임은 누구보다도 통감하고 있어요. 그러니 대공의 요구대로 칼스비크에 완전한 주권을 부여하고 독립국으로 인정하겠다는 거고요.”
“그럼 증언은 집어치우고 이 난세를 이용하십시오. 필립이 북진하는 동안 재판을 열라는 겁니다. 당신에게 있어 이 재판의 근본적인 목적은 필립의 만행을 퍼뜨리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마를 짚은 로잘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피고와 증인도 없이 재판을 집행하려면 쉽지 않을 테지만, 알겠어요. 어떻게든 진행해 볼게요.”
오가는 대화를 들은 세라엘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만요. 저는 전쟁을 막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거예요.”
세라엘은 로잘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재판을 연다기에 로잘린도 저와 같은 의견인 줄 알았어요. 황태자가 칼스비크를 침공하기 전에 서둘러 재판을 열고 접전을 막으려던 게 아니었나요?”
“같은 의견이었지만….”
로잘린은 곤혹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카에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잠시간 뜸을 들인 황녀가 신중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세라엘과 대공의 뜻대로 황위를 잇고자 해요. 하지만 서출에 여자인 내가 황제로서 지지를 받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겠지요. 물론 대공이 힘을 보태 준다면 귀족들의 지지를 받을 순 있겠지만, 온 제국민의 열렬한 지지까지 받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요…?”
세라엘의 물음에 카에드가 대신 답을 내놓았다.
“그렇기에 필립이 어떤 일을 꾸미려 했는지 모두에게 알리려는 겁니다. 제국의 초석인 칼스비크를 침략해서 나라를 위태롭게 한 중죄까지 포함해서요. 공신력과 정당성을 얻어야 황위에 안정적으로 오를 수 있을 테니까요.”
세라엘은 쿵쿵 울리는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창백해진 그녀를 본 황녀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오해하지 말아 줘요. 나 또한 분쟁을 원하지는 않아요. 나는 진심으로 칼스비크의 평화를 기원하고 세라엘이 안전하기를 빌어요. 다만 대공과 뜻이 맞지 않았기에….”
세라엘은 응접실로 오기 전, 카에드와 황녀 간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그제야 감이 잡혔다. 전쟁이 그들의 합의점이 된 것이다.
문득 커다란 손이 세라엘의 손등을 덮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카에드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교전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겁니다. 이 전쟁을 빌미로 칼스비크를 독립시키면 아무 이유 없이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보다 제국민의 반발이 적을 거라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에요.”
“카에드가 저를 지키려는 마음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격전지에서 황태자와 추종자를 끝장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도 알아요.”
단호하게 말한 세라엘이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어째서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전제로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전쟁을 막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세라엘의 손바닥에 땀이 배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카에드는 누구보다도 필립을 죽이고 싶어 하고, 로잘린은 안정적으로 황위에 오르고 싶어 한다.
교전을 피함과 동시에, 얼기설기 얽힌 이 두 사람의 이해관계에서도 벗어나지 않도록 설득할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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