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6)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6화(16/150)
‘쑥스러운가? 내가 너무 솔직했나?’
조금은 의아했다.
남녀 간 속궁합 이야기가 나왔을 때나 자신의 몸이 흥분했다는 투의 말을 했을 땐 전혀 부끄럽지 않아 보였는데.
하지만 장신에 다부진 체격의 미남이 얼굴을 붉히고 눈까지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세라엘은 살풋 미소 짓고 말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제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옷을 먼저 갈아입었다. 이후 몇몇 옷가지와 크고 작은 물품 등 필요한 짐을 여행 가방에 챙겨 넣었다.
‘20여 년을 이곳에서 살았는데 금세 모든 짐이 들어찼네.’
어쩐지 허망한 기분이었다.
“아가씨가 영영 떠나시다니…. 이제야 실감이 되어요.”
세라엘은 서운함에 축 처진 루시의 어깨를 붙들었다.
“함께 가자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아가씨를 따라가고 싶어요.”
“칼스비크는 야인들이 사는 국경과 가깝잖아. 위험한 곳이라 루시를 데려가는 게 마음에 쓰여.”
나타샤는 세라엘을 가족처럼 살뜰히 챙겨 주던 루시를 언제나 눈꼴사나워했다. 세라엘이 북부로 떠나고 나면 혼자 남은 루시를 온갖 유치한 술수로 괴롭힐지도 몰랐다.
세라엘 역시 누구보다도 아끼는 하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욕심으로 동행을 요구할 순 없어.’
중부의 따스한 전원 지역에서 나고 자란 루시가 황폐한 북쪽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국경 너머에는 야인뿐 아니라 기묘한 마물이 산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장소로 떠나면서 루시의 동행을 바라서는 안 되었다.
애초에 후작이 부리기 좋은 하녀를 애정도 없는 여식에게 붙여 줄 리도 없었다.
“나는 절벽 끝에 몰려서 내린 결단이라 떠나야만 해.”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행복으로 채워졌던 공간을 영영 떠나야 하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
하지만 인생의 전환점이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쁜 일만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 렉터와 콜을 보니 대공님의 측근도 보기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 같지?”
귓불을 물들인 카에드나, 남동생처럼 느껴지는 그의 수행원을 생각해 보면 처참한 미래가 그려지진 않았다.
“자주 편지하자. 잘 지내고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네, 아가씨….”
루시는 짐가방을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은 익숙한 복도를 지나쳐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세라엘의 말대로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카에드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대로 에스코트 받으며 대문 밖으로 함께 걸었다.
활짝 열린 철문 근처엔 후작 부부와 집사, 몇몇 사용인이 이미 나와 있었다.
지참금을 구실로 보석을 뺏겨서인지 나타샤의 심기는 아직도 불쾌해 보였다.
밀로즈 후작이 가까이 다가왔다.
“너는 이제 대공비가 되겠지만, 북부에 가서도 네가 밀로즈의 사람이란 걸 잊지 말아라.”
“…….”
“늘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얌전하게 행동하거라. 알아들었느냐? 아무쪼록 잘 지내고 예식 때 보자꾸나.”
카에드를 의식해서 건넨 쓸데없는 설교였다.
‘아버지와 평생 나눴던 대화보다 방금 한 대화가 더 긴 것 같네.’
세라엘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깊이 새겨들을게요. 이제까지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존재한 적 없는 부성애, 의붓어머니의 천대, 노인네에게 팔아넘기려 했던 짓까지 모조리.
그녀는 뒷말을 삼키며 마차로 향했다.
문 앞에는 세라엘이 타고 다니던 후작저의 갈색 마차가 아니라 몹시도 거대하고 검은 다인승 마차가 놓여 있었다.
무려 다섯 대가 줄지어 있어 흡사 북부로 쳐들어가는 전차 부대 같았다.
“처음 보는 마차네요?”
세라엘이 의아함을 표하며 카에드를 올려다봤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차 문을 열었다.
“샀습니다.”
“아, 네….”
마차의 문턱은 세라엘의 허리께에 있을 정도로 높았다.
얼른 오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카에드가 옆에 다가섰다. 곧 그의 단단한 팔이 그녀를 가뿐히 안아 들어 차내에 내려놓았다.
짧은 접촉에서 느낀 남자의 체취는 향기로우면서도 묵직했다.
‘와중에 냄새도 참 좋다. 향수를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끙 소리를 내면서 세라엘은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댔다. 자리를 잡자 카에드가 곁에 앉고 문이 닫혔다.
곧 바퀴가 구르면서 차체가 흔들렸다.
안온한 인생을 소원하며 살아온 저택이 멀어져 갔다. 20여 년을 보낸 영지 곳곳에는 나름대로 추억이 묻어 있었다. 이따금 어머니와 방문했던 과수원을 지나치자 세라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음울한 회상에 더 젖어 들려던 찰나였다. 비좁은 곳에 나란히 앉은 탓에 자꾸만 남자 특유의 벌어진 어깨 끝이 스쳐 왔다.
몸을 슬쩍 떼 보아도 한 뼘 거리에 떡하니 차지한 위압적인 존재 때문에 떨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마주 보고 앉았으면 차라리 나았으려나.’
좋은 마차라 그런지, 좌석 앞 캐비닛에는 충격 방지용 쿠션이 들어 있어 앉을 곳은 여기뿐이었다.
‘단둘이 이 공간에서 꼬박 며칠을 지내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어색하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세라엘은 슬며시 푸른 눈동자를 굴려 카에드를 훔쳐보았다.
옆에서 보는 그의 턱선은 잘 세공된 조각처럼 날카롭게 각이 져 있었다. 무슨 심중인지 읽어낼 수 없는 눈동자는 살짝 내리뜬 채 앞만 향하고 있었고.
참다못한 세라엘이 불쑥 서두를 뗐다.
“마차가 참 좋네요. …으앗.”
자기가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다.
서먹한 분위기에 못 견뎌 내놓은 말이 ‘날씨가 참 좋네요.’ 같은 진부한 말이었다.
카에드는 묘한 미소를 입술 끝에 새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겸연쩍어진 세라엘은 황급히 변명과도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사실 이렇게 좋은 마차는 처음 타 봐서요. 집에 하나 있는 외제 마차는 아버지 전용이고, 저는 멀리 외출하는 일이 없어 작은 것만 타고 다녔거든요.”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군요. 후작령에 오기 전에 미리 서면으로 구매한 마차입니다.”
“아, 힌델에서 사 오셨으리라 예상은 했어요.”
“칼스비크까지 밤낮 쉬지 않고 달려도 열흘은 걸릴 텐데 세라엘 양을 편히 모셔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온전히 그녀를 위해 좋은 마차를 갖춰 주어서 참 자상하긴 했지만,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 정도로 고급이라면 분명 수도의 외제 마차 판매점에서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곳은 신분 확인도 까다롭고 철저한 예약제로 운영된다. 돈이 있다고 해서 하루 이틀 만에 최고급 마차 다섯 대를 살 수는 없었다.
‘아버지도 외제 마차 하나를 사기 위해 1년을 기다렸다고 했어.’
물론 카에드는 격이 다른 신분이니 그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았겠지만.
‘그러고 보니 카에드가 부하들에게 준비한 마차를 가져오라는 말도 했었지. 정확히 언제부터 마차를 준비한 걸까?’
언제가 되었든, 세라엘이 의사 번복을 알리기 전이 분명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뭔가 지나갔다.
“마치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계셨던 것 같네요.”
“…….”
“대공님. 설마 절 납치하려고 하셨나요?”
카에드는 한쪽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납치라니. 단어 선택이 부적절하군요.”
“그러면요?”
“합의된 동행 정도는 어떻습니까. 세라엘 양의 의사쯤은 묻고 데려올 계획이었으니까요.”
납치를 위해 최고급 마차도 준비하고 의사까지 물어봐 줄 계획이었다니.
그것참 친절한 납치가 따로 없었다. 마치 따뜻한 아이스크림을 접한 느낌이었다.
뭐라 응해야 할지 몰라 세라엘은 멀거니 앉아만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나랑 결혼해서 얻는 게 대체 뭐라고….’
젊은 나이에 작위와 막대한 부를 소유한 남자가 일면식도 없는 세라엘을 욕심내는 이유가 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세라엘이 착잡한 눈으로 허공에 시선을 던지자, 카에드가 다시 운을 뗐다.
“나와 연을 맺게 되어 불쾌하십니까?”
그녀는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아요. 어찌 되었든 제가 선택한 일이었는걸요.”
거지 같은 집에서 빠져나올 동아줄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이렇게 된 마당에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다.
“실은 아버지와 의붓어머니가 저를 이상한 노인네에게 팔… 흠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거든요.”
카에드는 말없이 세라엘을 바라보았다.
‘대머리 할아버지한테 시집갈 뻔했다고는 말 못 해. 너무 수치스러워.’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돈 몇 푼에 행하려 한 부모를 갖고 있다는 것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세라엘은 제게 꽂히는 시선을 피하며 뺨을 쓸었다.
“나 또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일을 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그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더럽게 끝날 수도 있는 일이라 예견했었는데 누구도 다치지 않았잖아요. 모두 세라엘 양 덕분입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크게 해할 수도 있었다는 말을 그는 무척 담담하게 내뱉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문 채 토끼 눈을 뜨자 카에드가 피식 웃어 보였다.
“솔직한 남자를 선호하시니 숨김없이 말하는 겁니다.”
평생을 보낸 저택에서 나오게 되어 가뜩이나 머릿속이 뒤숭숭했다.
그런데 종잡을 수 없는 이 남자 때문에 세라엘의 마음은 더욱 널을 뛰었다.
“혹시 거짓말하는 남편은 곤란하다고 했던 제 말이 신경 쓰이셨나요?”
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지.
나쁜 인상을 심을 수도 있으니 얼버무리거나 거짓말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 술술 말해 주나 싶었다.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카에드가 혼잣말처럼 뱉은 말엔 자조적인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당신에게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한결같이 정직한 남편이 되겠다고.”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귓불이 또다시 붉어져 있었다.
‘사랑해서 한 결혼도 아닌데 왜 그런 대사를 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거야.’
어색함을 누그러뜨리려 꺼낸 진부한 말이 어쩌다 이런 수줍은 상황을 자초한 걸까?
‘난 몰라.’
덩달아 붉어진 두 뺨을 가리려 세라엘은 고개를 숙였다.
몹시도 숨 막히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 뒤로 얼마나 오래 길을 달렸는지 모르겠다. 마차는 어떤 도시에도 들르지 않고 빠른 속력으로 중부를 빠져나갔다.
해가 저물고 나서야, 세라엘의 긴장이 풀리면서 시나브로 졸음이 몰려왔다. 정신이 아득해질 찰나에 나직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대공성까지 길이 멉니다. 눈이라도 좀 붙이십시오.”
한번 잡아 보고 싶다고 느꼈던 큼지막한 손이 천장을 스치더니 차내의 전등을 꺼 주었다.
남몰래 졸고 있었는데 어찌 눈치챈 건지.
감지 능력까지 동물처럼 기민한 남자였다.
몸 위로 모포가 덮이는 것을 느끼며, 세라엘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
카에드는 제 품에 안겨 잠든 세라엘을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참 기묘한 여자였다.
바짝 경계할 때는 언제고, 건장한 남성과 폐쇄된 공간에 남게 되었는데도 머리를 앞뒤로 마구 흔들면서 졸다니.
그러다 목이 잘못 꺾였는지 신음을 내면서도 세라엘은 쿨쿨 잘도 졸았다.
편히 자라고 좌석 아래 받침대를 당겨 간이침대를 만들어 줄까 싶었지만, 머리를 하도 흔들어대고 있어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대신 카에드는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끌어 제 어깨에 살짝 기대게 해 주었다.
“으음….”
그랬더니 앓는 소리를 내며 카에드의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게 아닌가.
부드러운 접촉에 단전이 바짝 긴장했으나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달빛을 내리받은 여자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작은 몸을 바스러지게 안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억눌러야 할 욕정이었다.
‘겁도 없군. 안기라고 이런 건 아니었는데.’
싫은 건 아니었지만 의식 없는 여자를 건든 몹쓸 놈은 되고 싶지 않았다.
문득 그녀가 사용인에게 남긴 전언이 떠올랐다.
“나는 절벽 끝에 몰려서 내린 결단이라 떠나야만 해.”
저택에서부터 줄곧 곤두세워진 청각은 위층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단번에 잡아냈다.
“절벽 끝에 몰려서 내린 결단이라….”
시궁창 같은 인생에서 벗어날 돌파구를 선사해 준 여자가 자신과의 결혼을 그리 칭하다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
그래도 그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미친 듯 솟구치는 걸 막을 도리는 없었다.
“세라엘.”
오르내리는 제 가슴에 뺨을 대고 곤히 잠든 여자를 보며 그녀의 이름을 친근하게 입에 담아 보았다. 짙은 만족감이 밴 미소가 카에드의 입술에 번졌다.
그녀의 기억 속에 그가 존재하지 않더래도 이젠 상관없었다. 앞으로 함께 할 기나긴 시간 동안 빈틈없이 채워 줄 자신이 있었다.
세라엘의 머리칼을 살며시 그러쥔 카에드가 낮은 바람을 흩뜨리며 웃었다.
이 순간만큼은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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