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17)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17화(17/150)
덜커덩.
차체가 오르면서 세라엘이 눈을 떴다.
차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이 제법 따가웠다. 느낌으로 보건대 마차는 아직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벌써 아침이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어?’
세라엘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베개에 문질렀다.
열흘은 넘게 걸리는 여정이었으니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을 것이다.
장거리 이동이 마냥 유쾌하지는 않아서인지 차라리 어서 북부에 도착했으면 싶었다.
‘모든 일이 꿈만 같아.’
아버지의 빚 때문에 정신 나간 노인네에게 팔아넘겨질 뻔한 사실에 열 받아, 그길로 카에드와 북부로 떠났다.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는데 하루아침에 생면부지 남자의 부인이 되어 버렸다.
생면부지라 하기엔 어폐가 좀 있긴 해도, 어떠한 감정 교류도 없었던 남자와 고작 며칠 만에 결혼하게 되다니.
세라엘은 베개에 도리도리 얼굴을 비볐다.
‘아냐. 내 인생 내가 아니면 누가 책임져. 어떻게든 씩씩하고 알차게 살아 봐야지.’
최악에서 벗어나고자 제 의지가 단행한 일이기도 했으니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도 지난밤은 베개의 감촉이 좋아서 편히 잘 잔 것 같아.’
몸을 감싼 보드라운 모포도 숙면에 도움이 되었다.
달리는 마차 안이라 침대처럼 편하지는 않았으나 베개와 이불, 몸 누일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다시금 감기려던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베개 같은 걸 베고 잤었나?’
그러고 보니 지금 세라엘은 단단한 베개에 뺨을 묻은 채 옆으로 누워 있는 상태였다.
눈앞엔 마차의 벽만 보일 뿐, 카에드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과연 어디에…?
‘이 순간 내가 뭘 베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다.’
세라엘은 삐걱대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혔다.
“어… 어머!”
세라엘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가느다란 머리칼이 엉망으로 엉켜 있겠지만 손질할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코를 골았거나, 잠꼬대라도 하다 깼으면 덜 창피했을 텐데. 하필이면 남자의 허벅지를 벤 상태로 기상하다니!
‘이렇게 남사스러울 수가.’
정적 속에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쌍코피 터뜨린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딱히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이따위 추태를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세라엘은 뒤늦게 제 머리칼을 가다듬으며 스리슬쩍 카에드를 곁눈질했다. 그는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선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는 아침 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최대한 곰살맞게.
“좋은 아침이에요, 대공님. 잘 잤어요?”
“잘 잤겠습니까.”
곧장 따라붙은 대답에 나무라는 투가 그득 묻어 있었다.
“밤새도록 꼼지락거리는데 도대체 잠을 청할 수가 있어야지.”
카에드가 차창 너머를 응시하며 뇌까렸다.
그 모습이 어딘가 초연하면서도 아득한 느낌을 주었다. 지난밤 동안 인고와 고뇌의 시간을 견딘 모습이었다.
‘어떡해!’
세라엘은 기함하여 입을 틀어막았다.
본의 아니게 카에드의 밤을 지새우게 해서 너무나 미안했으나, 그보다 부끄러움이 먼저 피어올랐다.
‘꼼지락거렸대…. 제발, 예민한 곳만은 건드리지 않았기를.’
그녀는 붉은 입술을 깨물며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스스로 제법 냉철한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앞에선 예고 없이 떨리고 콩닥거리기 일쑤였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세라엘과는 달리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왼쪽 허벅지여서 망정이지, 오른쪽이었다면….
해탈한 수도승이 된 기분으로 카에드는 허공에 풀린 시선을 던졌다.
“대공님을 베개 삼을 의도는 결코 없었어요. 저 때문에 잠을 설쳤다면 미안해요.”
“미안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가 딱 잘라 단언했다.
“그래도 정말 미안한걸요. 잠자리가 익숙지 않았나 봐요. 잠을 별로 못 자서 피곤하기도 했고요.”
“됐으니까 변명 안 해도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카에드는 어딘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목 언저리의 셔츠 단추 두어 개를 풀어 내렸다.
무안한 마음에 세라엘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대공님도 불편하시죠? 저도 어서 빨리 북부 영지에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언제쯤이면 도착할까요?”
“앞으로 9일. 9일만 참으면 됩니다.”
어금니를 깨문 채 그가 내뱉듯 중얼거렸다.
세라엘에게 말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건지 알 수 없는 어감이었다.
허벅지 위에 놓인 그의 주먹이 퍼런 핏줄을 곤두세운 채 꽉 쥐어져 있었다.
“흠흠.”
괜히 헛기침하며 세라엘은 그를 곁눈질했다.
그러고 보니 자연광이 환히 비추는 곳에서 카에드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 남자 허벅지를 베고 잔 건 차치하더라도, 자꾸 두근거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아.’
매끄러운 흑발은 햇살을 내리받자 오묘한 밤빛을 띠었고, 내리깐 속눈썹 아래 눈동자는 황홀한 금색으로 반짝였다.
어두운 곳에서는 야성적인 분위기를 위협적으로 퍼뜨리는 맹수 같은 이미지가 강했는데, 인제 보니 마냥 날카로워 보였던 얼굴선도 햇빛을 역광으로 받은 덕분인지 몹시도 미려하고 섬세해 보였다.
밤사이 잠을 못 잔 탓인지 카에드의 안색은 창백했고, 눈가엔 푸른 기운이 조금 서려 있었다.
그게 또 우수에 찬 느낌도 나면서 여자의 심금을 세차게 울렸다.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마음속 감탄을 들키고 싶지 않아 세라엘은 창밖으로 눈길을 옮겼다.
곧장 마주한 눈앞의 풍경이 감탄을 자아냈다.
우거진 숲을 배경으로 드넓은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차가 계속해서 움직이는데도 푸른 호수는 끝없이 펼쳐졌다.
맑은 물이 일출하는 햇빛에 부서지면서 오묘한 주황색을 띠는데 참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북쪽을 향해 멀리 나와 본 적 없으니 후작령 위쪽에 이렇게 예쁜 호수가 있는지도 몰랐어.’
그녀는 차창 턱을 잡고 경치를 정신없이 구경했다.
그 모습을 줄곧 지켜보던 카에드가 입을 열었다.
“배는 안 고프십니까?”
창밖에서 눈을 뗀 세라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괜찮아요.”
주전부리를 좀 먹은 덕분에 허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반대로 카에드는 여태 뭔가를 먹거나 씹은 적이 없었다.
“대공님은요?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식사라는 걸 하긴 하시는 건가요?”
“이상한 질문이군요. 나도 사람이니 필요한 열량 정도는 섭취합니다.”
세라엘은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그렇지만 끼니를 제대로 챙기시는 걸 못 봤어요. 배고프진 않으신가요?”
“난 식욕을 잘 못 느낍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맛을 잘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카에드가 덧붙였다. 세라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가렸다.
‘그래서 첫 만남에서도 포도주만 마셨나? 우리 주방장 스테이크 육즙 안 빠지게 진짜 요리 잘하는데 어쩐지 손도 안 대더라.’
그녀가 오래전부터 경험해 왔던 수많은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들. 육즙이 흘러내리는 고기 요리도 좋지만, 상큼한 과일샐러드도 맛있다.
후식으로 즐기는 다디단 젤라토나 층층이 쌓인 허니 케이크는 또 얼마나 맛있는데. 떠올리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다.
‘그 즐거움을 모르다니 너무 안됐어.’
평소엔 뭘 먹고 사려나…?
호기심이 번지는 걸 느끼며 세라엘이 말문을 뗐다.
“대공님은 주로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딱히 없습니다.”
카에드는 고민도 없이 일축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녀가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한 스무 가지쯤은 막힘없이 댈 수 있었다.
“그럼 평소에 어떤 음식을 드시나요?”
어째 소개팅이라도 하는 기분을 느끼면서 재차 물었다. 그러자 카에드는 대답 대신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세라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베이지색 물체를 가만히 관찰했다.
“…이게 뭐예요, 대공님? 나무껍질?”
“단백질입니다. 이동 중에 섭취하기 쉽도록 제작했습니다.”
음식에 웬 제작이에요. 이런 거나 드시니 맛을 못 느낀다고 착각한 게 아닐까요?
차마 내보내지 못한 말이 세라엘의 혀끝에 걸렸다.
사실 보자마자 헝겊이냐고 물을 뻔했는데 얼른 예의를 차려 그나마 나무껍질로 바꾼 거다.
‘여태 이런 것만 먹고살았나?’
먹는 즐거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라엘은 식욕도 입맛도 없다는 그가 다소 안타까웠다.
“세라엘 양은 뭘 좋아합니까?”
마침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숨을 들이마신 그녀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기 시작했다.
“미디엄으로 익힌 스테이크, 라구 파스타, 구운 연어랑 자두 샐러드, 레몬 버터를 뿌린 새우요리, 디저트는 타르트, 산딸기 마카롱, 에클레어, 바닐라 푸딩 정도요. 더 궁금하세요?”
“됐습니다. 후일 지면에 표기해서 주시면 대공성의 요리사에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의외로, 아니… 예상대로 친절하시군요.”
뜻밖의 호의에 그녀는 사뭇 감격했다.
그에게 뭔가 줄 게 없나, 생각하던 순간 휴대용 짐 주머니 안에 있던 간식이 떠올랐다.
“참,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주섬주섬 짐을 뒤진 세라엘이 그가 했던 것처럼 간식을 손바닥에 내보였다.
수도에 사는 루시의 친구가 보내 주었다던 레몬 사탕이었다.
무더운 남부 지방에서만 생산하는 사탕이라는데 새콤달콤해서 어찌나 중독적이던지.
가운데 소량 담긴 레몬 맛 시럽도 아주 맛있었다. 시럽이라기보다 제형이 좀 탱글탱글한 편이어서 젤리에 가까웠다.
신맛+단맛에 사탕+젤리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 아닌가?’
몇 개 안 남은 걸 루시가 모두 챙겨 줘서 가지고 오게 되었다.
아껴 먹으려고 했건만 미각이 고장 났다는 남자에게 먹여 주고 싶었다. 없는 입맛을 확 살리기에도 좋을 것 같았고.
세라엘이 앙증맞은 크기의 사탕을 쓰윽 내밀었다.
“하나 드셔 보실래요?”
“이게 뭡니까.”
“레몬 사탕이에요. 안에 젤리도 들어 있어서 식감이 괜찮거든요.”
단박에 카에드의 안색이 굳었다.
신맛에 단맛. 거기다 젤리.
정말 싫은 것 세 가지가 공존하는 동그란 사탕을 그는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노란 색깔만 봐도 꺼려지는 물체였다.
하지만 세라엘이 건넨 호의였다. 곁에서 푸른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기에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카에드는 사탕을 집어 들어 성의 없이 입 안으로 넣었다.
불쾌한 맛에 짙은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끔찍하고도 사악한 물체를 당장 뱉어 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맛이 어떠세요?”
세라엘은 은근한 기대감이 어린 표정으로 머리를 까딱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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