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21)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21화(21/150)
남자들과 즐겁게 떠들며 웃을 때마다 옆에서 예사롭지 않은 시선이 칼날처럼 던져졌다.
맨정신이라면 흠칫하여 조금이나마 자중했겠지만.
‘아까는 눈을 피하더니 지금은 왜 노려보는 걸까?’
세라엘은 해롱해롱 풀린 눈으로 와인을 들이켰다.
“누님. 건배사를 하시는 건 어때요?”
달콤한 포도 주스에 취한 렉터가 신이 나서 제안했다.
덩달아 들뜬 악셀이 거들었다.
“오! 나도 듣고 싶어요. 남부 귀족은 식기로 샴페인 잔을 깨뜨려서 건배사를 한다면서요?”
“이 바보야, 애꿎은 잔을 왜 깨뜨리냐! 주목받으려고 소리만 내는 거지.”
“엥? 그럼 그냥 깨뜨리는 게 더 낫지 않냐?”
예법 따위 알 리 없는 두 사람의 대화는 딱 그 나이대 소년처럼 우습고 귀여웠다.
세라엘은 입술을 가린 채 다소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그녀를 향한 카에드의 눈이 살벌하게 번득였다.
‘몰라, 난. 취했어.’
세라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투박한 맥주잔을 들어 올려 은식기로 우아하게 두드려 보였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이 집중하자,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서두를 뗐다.
“대공님께서 절 위해 열어 주신 정찬이니 한마디 올려도 될까요?”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싸늘한 저음이 단칼에 제지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카에드였다.
‘그냥 감사의 말을 표현하려는 건데 왜 말리는 거지.’
세라엘은 개의치 않았다.
“칼스비크에 온 지도 벌써 몇 주나 지났네요. 아직 식을 올리기 전이지만, 다들 어찌나 환대해 주는지 편하게 잘 지냈어요. 이 자리를 빌려 베일리 부인께도 감사를 보내요.”
“세라엘. 그만하고 앉아요.”
“근데 솔직히 저와 대공님이 식을 올리긴 하는 건가 싶어요….”
맨정신일 때보다 한참은 흐려진 감각으로도 알아차릴 만큼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마 상석에 앉은 남자의 기류 때문이겠지.
그러니 인제 그만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은데, 끊임없이 들이켠 알코올이 세라엘을 가만 놓아주지 않았다.
“이 넓은 성에서 대공님과 떨어져 지내면서 어떠한 교류도 없었거든요. 뭐가 진행되긴 하는 건지 알 수도 없고.”
그녀의 붉은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동안 대공님께서는 저를 첨탑에 가둬 놓으시고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좀 답답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대공님 생각도 나고…. 특히 밤에요.”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차 싶어 서둘러 정정했다.
“아니, 밤엔 생각이 많아지잖아요. 북부가 위험한 건 알겠지만, 대공님이 왕래도 하지 않으시니 의중이 궁금해져서요. 제가 뭐 한방을 쓰자는 것도 아닌데….”
순간 의자가 바닥을 세게 긁는 소리가 났다.
그게 카에드가 앉아 있던 의자란 걸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어렴풋해진 세라엘의 시야에 몹시도 출중한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취하셨습니다.”
남자 특유의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어어…. 대공님?”
카에드는 말없이 그녀의 한쪽 팔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켰다.
“아까 제가 고맙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왜 무시하셨어요?”
세라엘이 뭉개진 혀로 헛소리를 하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일어나요. 거처까지 바래다줄 테니까.”
남자의 부축을 받아 걸었다.
몇 번 발을 헛디디자 그가 세라엘을 반쯤 들쳐 업다시피 부축해 주었다.
마차에 몸을 실은 이후 기억이 잘려 나간 듯 없는 걸 보면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떠 보니 벽 조명만 켜진 어두운 복도에서 카에드의 품에 안긴 채로 이동 중이었다.
그녀를 꼭 안은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술김에도 남자와 몸을 맞붙이고 있다는 게 낯설어서 세라엘이 한번 꿈틀거렸다.
그 바람에 그녀가 두르고 있던 겉옷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카에드. 케이프가 떨어지고 있어요.”
세라엘이 그의 너른 어깨를 안은 손을 황망히 뻗었다.
“내버려 둬요. 어차피 벗을 건데.”
카에드가 툭 뱉은 대꾸는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그러다 또 세라엘의 눈이 감겼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포근한 제 침대 위에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희끄무레한 시야에 잘생긴 형체가 그려졌다.
카에드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은하게 일렁이는 불빛을 내리받은 날카로운 옆얼굴은 왜인지 우수에 차 있어 보였다.
세라엘의 눈길이 좀 더 아래로 향했다. 남자의 흰 셔츠 위로 두툼한 흉근이 터질 듯 부풀어서는 느린 호흡에 맞춰 오르내리고 있었다.
고요히 장작 타는 소리에 세라엘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더해졌다.
“대공님.”
야릇한 느낌을 참을 수 없어 몸을 일으킨 세라엘이 먼저 그를 불렀다.
카에드는 앞으로 느슨히 기울였던 자세를 바로 세우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좀 듭니까?”
“네. 아까보단 나아졌어요….”
말꼬리를 흐리는 세라엘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그가 벽난로를 눈짓했다.
“눕혀만 놓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저게 꺼져 있어서.”
아, 그래서 난로 앞인 침대 발치에 앉아 있었나 보다. 밤새 추위에 떨 그녀를 배려해서 불을 지펴 준 것이다.
세라엘은 너울거리는 장작불을 보던 눈길을 카에드에게 돌렸다.
“…고마워요. 콜록!”
그녀가 대뜸 잔기침을 쿨럭였다.
카에드는 탁자 위에 놓인 유리병에서 물을 따라 잔을 건네주었다. 얌전히 받아 든 세라엘이 꼴깍꼴깍 찬물을 마시자, 그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웬만하면 음주는 자제하십시오. 당신 주사가 영 신경 쓰여 안 되겠습니다.”
물을 들이켜니 갈증도 풀리면서 훨씬 나아졌다. 세라엘은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점이 신경 쓰이셨어요?”
“일일이 말해 줘야 압니까?”
시큰둥하게 반문한 카에드가 목 아래 크라바트를 당겨 늘어뜨렸다.
그러더니 돌연 헛웃음을 쳤다.
“왜 웃으세요?”
“…경각심이 너무 없어 보여서.”
나무라는 말투에 세라엘은 그제야 자신의 옷매무새가 단정치 못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헝클어진 옷자락 아래로 하얀 다리가 노출되어 있었다. 케이프에 가려졌던 육감적인 드레스는 가슴 언저리의 뽀얀 피부를 과감히 드러냈다.
기분이 이상했다.
흐트러진 옷자락과 몽롱한 머릿속. 그리고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침실과 침대에 자리 잡은 두 남녀.
초야를 보낼 준비가 완벽하게 조성된 분위기에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담요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세라엘이 제 팔을 쓰다듬으며 요청했다. 인제 와서 이불이나 베개로 드러난 몸을 가리기엔 괜히 부자연스럽고 어색할 것 같아서였다.
카에드는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담요는 칼스비크에 처음 도착하던 날, 그가 세라엘에게 손수 둘러 주었던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카에드가 침상에 앉자 부드러운 향기가 감돌았다. 묵직하면서도 청량한 남자의 내음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군요.”
그때처럼 그녀의 몸에 담요를 덮어 주며 카에드는 피실 웃었다. 그에 전염되듯 세라엘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도록 마주하고 있던 시선이 순간 진득하게 얽혀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카에드의 셔츠 아래 가슴이 좀 더 빠르게 오르내렸다.
금빛을 띠는 그의 눈동자는 원초적인 욕망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세라엘이 눈을 깜박이자, 서늘한 온도를 가진 무언가가 그녀의 왼손에 느껴졌다.
카에드는 그녀의 손끝부터 조심스레 건드리며 느릿느릿 깍지를 끼워 잡았다.
한번 잡아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던 큼지막한 손을 맞잡자 두 개의 맥박이 맞물렸다.
그가 눈을 잠깐 내리깔았다가 바짝 들어 올렸다.
빽빽이 들어찬 남자의 속눈썹은 짐승 같은 사내들을 호령하는 수장의 것답지 않게 무척이나 섬세했다.
홀린 듯 카에드를 관찰하자 마주 잡은 손에 미약한 악력이 느껴졌다.
세라엘은 불안정한 숨을 내리 쉬었다.
“대공님.”
“이름.”
“……?”
“아까처럼 이름으로 불러봐요.”
‘내가 이름으로 부른 적이 있던가…?’
아까라면 취기에 더욱 절어 있던 상태라 돌이켜봐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카에드.”
세라엘은 생각을 밀어 놓고 그의 요구대로 응했다.
처음 입술에 담은 남자의 이름은 보송한 깃털처럼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그러나 낯선 느낌에 얼떨떨할 겨를이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마주한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그가 세라엘의 뺨에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살갗이 부드럽게 붙었다 떨어지는 마찰음이 유달리 노골적이었다. 조바심이 날 정도로 아주 짧은 순간 행해진 접촉이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
숨결이 닿을 만큼 더욱 가까워진 그가 이번엔 입술을 겹쳐 왔다. 긴장 풀라는 것처럼 혀로 아랫입술을 핥더니 슬며시 입술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는 입 안을 깊숙이 휘저으면서 한 손으로 세라엘의 등허리를 껴안았다.
그녀의 체구 위에 위압적으로 큰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여자 힘으로는 절대 밀어낼 수 없는 완력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입맞춤은 부드럽고 애틋하기만 했다. 빈틈없이 맞물린 채 녹녹하게 마찰하는 느낌이 좋아서 세라엘은 두 팔로 카에드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가 둘러 주었던 담요가 침상 아래로 툭 떨어지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타액이 느릿느릿 질척이는 소리에 가슴속 어딘가가 몹시 가려웠다.
조금 감질나다 싶을 즈음, 그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툭 튀어나온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파도쳤다.
불현듯 드레스 자락이 무방비로 흐트러진 채 그와 가슴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이 와닿으면서 세라엘은 덜컥 긴장했다.
달뜬 숨을 내뱉자 카에드는 한층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려운가요?”
주어가 없어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자신이 두렵냐는 건지, 춥고 삭막한 북부를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그와 관계를 앞둔 듯한 이 순간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조금요.”
세라엘 역시 모호한 답을 건네며 목소리를 이었다.
“상상했을 땐 이 정도로 떨리지는 않았어요.”
그녀의 가느다랗고 고운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달래듯 힘주어 깊이 깍지를 낀 카에드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추워서 그런 건 아닙니까? 예식 전이라도 남자랑 잘 수 있을 것처럼 호기롭게 말할 때는 언제고.”
…역시 후자를 의미하는 게 맞았나 보다.
세라엘은 붉은 입술에 호를 그리며 미소 지었다.
“북부의 추위는 제법 익숙해졌는걸요. 아마 술이 덜 깨서 그런가 봐요.”
아마 그때였던 것 같다.
카에드의 눈동자에 검질기게 묻어났던 갈망이 잘게 흔들렸던 순간이.
“취기가 아직 있는 겁니까?”
“으음. 머리가 좀 어지럽기도 하고, 알딸딸하면서 손이 떨리긴 해요.”
“…하아.”
알 수 없는 한숨을 내뱉은 그가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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