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22)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22화(22/150)
“그 정도로 마셔 댔으니 술이 벌써 깼을 리가 없지.”
독백하듯 읊조린 카에드는 곧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언가를 강하게 참아 내는 표정이 얼핏 스친 것 같았다.
“밤이 깊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얼떨떨해진 세라엘이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제 목덜미를 매만지며 슬쩍 시선을 피했던 카에드가 다시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당신을 감금하려던 의도는 없었습니다. 사정이 있어 잠깐 떼어 놓으려던 것뿐이에요.”
“일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네요. 이번엔 무슨 사정이셨나요?”
세라엘이 묻자 그의 얼굴에 묘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모르는 게 좋을 텐데.”
“그럼 내일 제가 맨정신일 때 알려 주세요.”
“맨정신이면 더 안 되겠는데요.”
“그러면 저랑 차나 한잔해요. 다른 수행원들 없이 둘이서, 갑갑한 실내 말고 밖에서요. 정오쯤에 시간 어떠세요?”
뜬금없는 데이트 신청에 카에드는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양 피식 웃어 보였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 안 할 것처럼 생겼으면서, 알면 알수록 웃음이 잦은 남자였다.
“차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다시금 거리를 좁혀온 카에드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거부하기 어려운 청이군요.”
약한 완력에 밀린 세라엘이 얌전히 베개를 베고 누웠다.
카에드는 발치의 이불을 끌어서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내일 봐요, 그럼.”
뒤돌아 걷는 남자의 기다란 인영이 장작불을 따라 너울거리다 사라졌다.
세라엘은 입술에 남겨진 열기를 새삼스럽게 문질렀다.
그리고 취기가 불러온 잠에 조금씩 잠식되어 갔다.
***
숙취를 한두 번 겪어 본 건 아니었다.
“…머리야.”
그렇지만 이 정도 수준의 숙취는 난생처음이었다.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세라엘이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걸걸한 해적이나 용병이 마실 법한 거대한 맥주잔에 와인을 콸콸 부어 몇 잔이고 마셨으니 몸이 멀쩡한 게 이상했다.
어젯밤 기억이 뜨문뜨문 남아 있긴 해도 일일이 복기해 볼 정도의 기력은 없었다.
“지금이 몇 시지?”
창문 밖은 시각을 가늠할 수 없게 그저 밝기만 했다.
그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실을 허락하자 쟁반을 든 베일리 부인이 들어섰다.
“기침하셨군요. 정신이 좀 드셨을까요?”
“네에. 좋은 아침이에요, 부인.”
세라엘은 뒤엉킨 머리칼을 가다듬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침대맡에 다가온 베일리 부인은 수프 그릇이 담긴 쟁반을 건넸다.
“아침이라니요, 아가씨.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고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거예요.”
“어머. 제가 늦잠을 잤다는 말씀이신가요? 시간이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곯아떨어졌어요.”
“행여나 아프신 건 아닌지 두어 번 들어왔었는데 곤히 주무시더라고요. 아가씨께서 간밤에 무리를 꽤… 하셨나 봐요.”
“무리를 엄청나게 하긴 했죠. 온몸이 쑤시기까지 할 줄이야. 당분간은 자제해야겠어요.”
부인은 조심스럽게 세라엘의 얼굴빛을 살폈다.
양송이 수프를 호호 불어 떠먹던 세라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동작을 멈췄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닙니다. 식사를 마친 후 이것도 잊지 말고 챙겨 드세요.”
쟁반 위엔 파란색 액체가 담긴 작은 병도 하나 있었다.
“기운을 충전해 주는 물약이랍니다.”
“기운이 다 빠진 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 저한테 딱 필요한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살갑게 웃은 세라엘이 물약 병을 한번 집어 들어 보였다.
“…….”
“……?”
근데 뭔가 좀 이상하다.
‘내 말끝마다 베일리 부인이 얼굴을 붉히는 것 같은데, 잘못 봤나?’
베일리 부인은 유리창을 반쯤 가린 커튼을 완전히 걷고 창문을 열어, 실내로 환한 빛과 상쾌한 공기가 들어왔다.
뜨거운 식사로 속을 달래는 세라엘에게 시녀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정오 즈음에 영주님께서 다녀가셨어요.”
스푼을 쥔 손이 멈추었다.
“대공님께서요?”
“네. 아가씨가 아직 취침 중이라고 말씀드리자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 길게 표는 내지 않으시고 다시 1구역으로 돌아가셨지만요.”
“아, 설마.”
흐린 기억을 되짚어 보니 어젯밤, 카에드에게 차나 한잔하자고 데이트를 신청했었다.
그래 놓고 쿨쿨 늦잠이나 자고 있었다니.
세라엘은 자괴감에 이마를 짚었다.
“오늘 제가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거든요. 정오쯤 야외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는데… 늦잠을 자 버렸어요.”
그 말에 베일리 부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영주님도 참. 차도 안 좋아하시는 분이 상냥하기도 하셔라.”
“상냥…? 그럴 수도 있겠네요….”
“영주님의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본성으로 서신을 한번 보내 볼게요. 일이 없으시다면 바로 답장하실 거예요.”
또 서신이라니.
제아무리 대공성이 넓다지만, 아무렴 같은 공간인데 소식을 나눌 때마다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익숙해지질 않았다.
어차피 만날 거라면 직접 찾아가는 게 나았다.
“아뇨. 제가 간식을 챙겨서 대공님께 한번 가 보는 게 좋겠어요. 설마, 이것도 외출이라고 대공님의 허락을 묻는 서신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이러다간 서신의 늪에 빠질 것 같았다.
카에드 허락 없인 첨탑 밖으로 자유로이 나가지 못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감금이라 칭하기엔 너무도 풍족한 생활이었지만.
베일리 부인은 인자한 표정으로 도리질 쳤다.
“이제 아가씨가 원하시는 대로 구역 내 이동을 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정말요?”
“다만 이동 시엔 반드시 사용인을 대동하시는 조건이고, 대공성 밖으로 나가는 외출은 여전히 허락을 받으셔야 하지만요.”
“전에 비하면 자유도가 많이 올랐네요. 역시 어제 이후로 대공님과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그 말에 또 베일리 부인이 쑥스러워하며 헛기침을 했다. 대관절 뭐가 저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가만히 수프를 먹고 있자니 지난밤 일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렉터와 악셀, 콜과 떠들면서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셨었어.’
세 명의 청소년은 와인 대신 포도 주스를 마셨지만 세라엘 못지않게 들떠 보였다.
중간에 악셀이 몰래 술을 빼돌리려고 했으나 시프에게 걸리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던 것도 기억이 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배사를 해 달라는 채근에 벌떡 일어나 뭐라 읊조렸는데, 다행히 그 부분은 좀 희미했다.
‘그리고 카에드가 날 안아서….’
침실까지 고이 데려다주었지.
“꺄악!”
차례차례 기억을 더듬던 세라엘은 곧 야릇한 입맞춤을 상기해 냈다.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쩌면 좋아.’
게다가 밀려드는 키스에 화답하듯 그의 목을 꼬옥 껴안기까지 했다.
하얀 도화지에 수채 물감이 스며들 듯 세라엘의 뽀얀 얼굴은 금세 복숭아색으로 물들었다.
베일리 부인이 걱정스레 턱을 기울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괜, 괜찮아요. 부끄러운 게 생각이 나서….”
뺨에 어린 홍조를 가라앉히려 세라엘이 물잔을 들이켰다. 그렇다 해도 간밤에 카에드가 남긴 자취는 쉬이 없어질 것 같지 않았다.
“어젯밤 일로 생각이 많으신가 봐요.”
온화하게 미소 지은 시녀가 비워진 물잔을 채워 주었다.
“식사를 다 하시면 설렁줄을 당겨 저를 불러 주세요. 아가씨의 외출 채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고마워요, 부인.”
“물약을 드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재차 강조하며 베일리 부인은 조심스레 침실 문을 닫고 나왔다.
‘후후. 아가씨도 참 귀여우셔. 힘겹지만 흐뭇한 밤을 보내셨나 봐.’
그런데 복도 끝에서 어린 하녀들이 소곤거리고 있었다. 딱 그 나이대 여학생처럼 옹기종기 모여 들뜬 표정이었다.
“너도 보았지? 어젯밤 영주님께서 분명 아가씨의 침실에서 나오셨어.”
“맞아.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하셨던 분이 분명 붉게 상기되어 있으셨잖아.”
“세상에. 그러면 역시 두 분…?”
“결혼식을 앞둔 커플이니까 크게 잘못된 건 없지. 지켜보는 사람들만 외로워지는 거지, 뭐.”
하녀들은 까르르 웃으면서 즐거워했다. 원래 남의 연애사가 더 재미있는 법이다.
더구나 그 주체는 연정은커녕 감정이란 게 없어 보이는 냉랭한 그들의 주인이었다.
언제나 서릿발처럼 싸늘했던 그가 어느 날 출타하여 예비 신부를 데려온 후, 분위기는 봄날의 산들바람같이 바뀌었다.
세라엘과 카에드가 동거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두 사람 간 접촉도 첫날부터 고작 두 번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다들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대공성에 세라엘이 도착하던 날, 카에드가 그녀에게 다정히 담요를 둘러 주는 모습을 모든 사용인이 목격했다.
창문으로 지켜보던 하녀 하나가 놀라서 손수건을 떨어뜨릴 정도였다.
카에드는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이따금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세라엘이 있는 첨탑을 응시했고, 표정도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심지어 지난밤.
본성에서 함께 식사하다 세라엘이 만취하자 직접 들쳐 안아 거처까지 바래다주더니만, 그렇고 그랬을 게 뻔한… 시간을 오래도록 보내지 않았던가!
이후 카에드답지 않게 붉어진 얼굴로 세라엘의 침실에서 나왔으니 이건 말 다 한 거다.
심지어 그는 침실 문 앞에서 뭔가 아쉬운 사람처럼 쉬이 걸음을 떼지 못하고 마른세수를 하다가 조급하게 탑을 빠져나갔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모습의 주인을 되새기며 들썩이는 하녀들에게 베일리 부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허리에 두 손을 올려 보였다.
“다들 사담은 그만하거라.”
“앗!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영주님이나 아가씨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러니? 두 분의 사생활을 입에 쉽게 담으면 안 돼. 어서 각자 위치로 돌아가렴.”
급히 고개 숙인 하녀들은 재빨리 해산하여 제 위치로 향했다.
엄하게 핀잔을 주긴 했지만, 사실 베일리 부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에드가 양자로 들어오기 전부터 대공성에서 일하던 그녀였다.
어렸던 그는 선대 가주와 심술맞기 짝이 없는 후계자들에게 어찌나 혹독히 괴롭힘을 당하던지 보는 이가 다 괴로울 정도였다.
처음 왔을 때부터 웃는 법이 없었던 카에드는 아마 그들 때문에 영영 웃음을 잃어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이 멸문당하는 끔찍한 사건 후 카에드가 주인이 되었으나, 베일리 부인은 차라리 이 전개가 한결 낫다는 생각을 했다.
죽은 가문원은 태생이 음침하고 비열하여 사용인에게도 지독하게 굴었으니까. 역사를 장식한 영웅의 핏줄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블카노프의 이름에 걸맞은 기품을 가진 자는 양자인 카에드였다. 블카노프의 오랜 종신 가문이었던 베일리 출신인 부인은 혹시 그가 진짜 적통은 아닐는지 의심하곤 했었다.
‘어찌 되었든, 영주님의 마음을 곱게 물들여 준 분이 계셔서 참 다행이야.’
지난밤 두 분이 아주 격하게 사랑을, 흠흠, 나눌 정도였으니까.
‘오늘은 데이트를 즐기실 모양인데 어서 다과를 준비해 드려야지.’
이 나이 되고도 참 주책맞은 자신이라 생각하며 시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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