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23)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23화(23/150)
세라엘은 간식이 담긴 피크닉 바구니를 든 채 마차에서 내렸다.
목전엔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새카만 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1구역이 본성이라더니 세라엘이 지내는 첨탑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넓었다. 만찬 때 와 봤는데도 참 적응 안 되게 드넓은 내부였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수 세기의 역사가 스민 성안을 이리저리 훑었다.
그러곤 카에드의 집무실이 있을 2층을 향해 층계에 한층 한층 올라섰다.
벽에는 커다란 액자들이 오랜 시간 걸려 있었던 듯 네모나게 빛바랜 곳이 많았다. 아마 이전까지 역대 블카노프 가주의 초상화를 걸어 둔 듯싶었다.
‘카에드가 모두 치워 버렸나 봐.’
오래전 모략으로 황가 핏줄이 블카노프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적통인 카에드가 영주가 된 지금 말끔히 치워 버리는 게 지당했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텅 비어 버린 광활한 벽을 보던 세라엘이 무거운 바구니를 고쳐 들었다.
바구니 안엔 그녀가 후작저에서부터 챙겨 왔던 초콜릿도 들어 있었다. 카에드에게 먹여 보고 싶었던 바로 그 초콜릿이었다.
‘근데 집무실이 어디지?’
2층으로 올라오긴 했는데 기나긴 복도에 문이 하도 많아 세라엘은 잠시 당황했다.
몇 걸음 끝에 나온 또 다른 복도는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다.
본성은 내부 구조가 복잡하므로 동행해 주겠다던 베일리 부인을 한사코 거절했던 게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집무실로 향하는 길을 듣긴 했다만 지금 맞게 가고 있는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근처에 대기 중인 사용인이 없어 물어볼 수도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응?”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멀찍이 어둑한 복도 끝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세라엘은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려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개?”
아니, 개가 아니라 늑대였다.
집채만 한 늑대가 콧잔등을 잔뜩 찌푸린 채, 공격 직전의 태세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놀란 숨을 집어삼킨 세라엘이 후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오, 오지 마.”
저 무시무시한 짐승은 그녀를 침입자로 인식한 게 틀림없었다.
“어? 잠깐만.”
어떠한 접점을 발견한 세라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늑대, 누구 머리카락처럼 털도 시꺼멓고 눈도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게 혹시….
“대공님이세요?”
그녀는 검은 늑대를 향해 가냘픈 목소리로 외쳐 보았다.
늑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좁혀 왔다.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카에드가 동물로 변했을 리는 없다.
발켄족은 늑대의 피가 섞인 이종족일 뿐, 늑대로 변신할 수 있는 수인은 아니었다.
고작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온 늑대는 뾰족한 이빨을 내보이며 매섭게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러지 마. 난 네 주인님의 여자 친구야.”
사람 허벅지만 한 늑대의 앞발이 바닥을 마구 긁었다.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아니. 여자 친구는 아니고 예비 부인이긴 한데.”
공포에 질려 말이 헛나오고 있었다.
불현듯 요동치는 세라엘의 시야에 피크닉 바구니가 들어왔다. 그녀는 천천히 바구니 안으로 손을 뻗어 소시지 하나를 꺼냈다.
“먹을래?”
우뚝 멈춰 선 늑대가 반질반질한 검은 코를 킁킁거렸다.
“맛있겠지? 이거 너 줄게.”
소시지를 바닥에 대고 늑대를 향해 미끄러뜨렸다.
짐승은 잠시 흉포한 기세를 거두고 소시지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조금은 순해진 눈으로 세라엘을 응시했다.
“하나 더 줄까?”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번엔 크루아상을 건넸다.
다음엔 샌드위치, 블루베리 쿠키, 머핀 순이었다. 그렇게 바구니 속의 간식들이 하나하나 동나고 있었다.
어느새 초콜릿만 남은 바닥을 보며 세라엘은 아연실색했다.
한 뼘 거리까지 다가온 검은 늑대는 더 달라는 듯 바구니를 킁킁 냄새 맡았다.
“이제 초콜릿밖에 안 남아서 줄 게 없어…. 이건 대공님 줄 거란 말이야. 게다가 강아지는 초콜릿 먹으면 안 되잖아.”
음, 근데 얘는 강아지도 아니고 개도 아니네. 어쨌든 갯과니까 초콜릿은 먹으면 안 되었다.
세라엘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날 물지는 않을 거지?”
대번에 늑대의 콧잔등이 구겨지며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다 뺏어 먹어 놓고 화내면 어떡해!”
자기도 모르는 새에 구석에 내몰린 세라엘이 울상을 지었다.
‘북부까지 시집와서 허무하게 동물한테 물려 죽을 순 없어.’
주변을 곁눈질하자, 뒤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육중한 목제 문이 보였다.
‘나를 덮치기 전에 서둘러 저 문을 열고 도망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내달린 세라엘이 문고리를 잡았는데.
그보다 먼저 안쪽에서 미는 힘으로 인해 문이 활짝 열렸다.
“꺄악!”
반동으로 세라엘의 몸이 볼썽사납게 뒤흔들렸다.
문을 열어젖히고 나온 남자는 그녀가 꽈당 고꾸라지기 직전에 재빨리 몸으로 받쳐 안았다.
“세라엘?”
의외라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남자는 카에드였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초면엔 짐승 우두머리만큼이나 험악하게 보였던 남자가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뜻밖의 구원자를 발견한 세라엘은 황급히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개…! 아니, 늑대가 절 공격하려고 해요!”
다행히 저 검은 늑대는 카에드가 변신한 게 아니었다.
아닌 걸 알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의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참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접촉에 흠칫하던 카에드는 그녀의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아.”
살기 형형하던 늑대는 카에드를 보자 금세 충직한 멍멍이가 되어 꼬리를 흔들었다. 송아지만큼 우람한 야수가 이젠 벌러덩 누워 애교까지 부렸다.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그가 세라엘을 진정시켰다.
“사육장에서 키우는 늑대인데, 공격할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제 눈엔 공격할 태세로 보였는걸요. 너무 무서웠어요.”
카에드는 제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숨어 있는 세라엘을 보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러고선 그녀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
“괜찮아요. 물지 않을 겁니다.”
“앗…!”
삽시에 온순해진 늑대는 귀엽게 멍! 짖어 보였다.
그런데 울음소리가 너무나 우렁차고 잠깐 보인 이빨도 옹골차서 마냥 귀엽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른 늑대에 비해 영리한 놈이라 침입자 정도는 구분할 텐데, 아마 주변에 새끼가 있어 예민했나 보네요.”
“늑대 새끼요? 아니, 새끼 늑대?”
세라엘은 허리를 숙여 짐승의 배 아래를 확인했다.
이내 미궁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수컷인데요?”
“늑대는 부성애가 강한 짐승입니다. 특히 발켄의 늑대는 가정에 충실하여 육아나 사냥을 도맡아 하는 영물입니다.”
“제 간식을 몽땅 빼앗겼는데 혹시….”
“아마 새끼에게 돌아가 토해 내서 줄 계획이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겉모습과 달리 일평생 단 하나의 암컷만 보고 살아가는 조신한 짐승이기도 합니다.”
“음….”
늑대 칭찬을 하는 건데, 어째서 자기 자신을 어필하는 느낌이 드는 걸까?
“이 늑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없습니다. 방목하여 기르는 놈까지 합하면 수백인지라 일일이 이름 짓지는 않아요.”
카에드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부터 네 주인이 되실 분이다. 말썽 피우지 말고 어딜 가든 목숨을 바쳐 지켜 드려라.”
“멍!”
힘차게 대답한 늑대는 충성심을 약조하듯 세라엘의 무릎에 까슬까슬한 이마를 비볐다.
그러더니 새침하게 몸을 휙 돌려 어딘가로 뛰어갔다.
아마 새끼에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와요.”
카에드는 세라엘의 손을 잡아 내부로 안내했다.
우연히 닿은 목제 문 너머가 그의 집무실이었다니. 세라엘이 마냥 길을 헤맨 건 아닌 듯했다.
집무실은 무척 넓었으나 전체적으로 어둡고 딱딱한 느낌을 주었다.
양쪽 벽에 자리한 진갈색 책장은 세라엘이 손을 힘껏 뻗는대도 닿지 않을 만큼 높았고, 그 안엔 셀 수 없이 많은 서적이 들어차 있었다.
문 근처에는 접객용 소파와 마호가니 커피 테이블이 놓여 있었지만,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은 듯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대한 창문을 등진 책상은 카에드가 업무를 보는 장소임이 분명했다.
“뭐라도 대접해야 하는데 방문객이 드물어 구비된 게 없군요. 집사를 불러 준비하라 명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집무실을 이리저리 훑던 세라엘이 제지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해놓고 제가 늦잠을 잤잖아요. 그래서 간식을 좀 가져왔…는데 늑대한테 다 줘 버렸구나. 빈손으로 놀러 온 셈이 되었네요.”
멋쩍게 웃은 그녀는 카에드를 지나쳐 책상으로 다가갔다.
각종 책과 서류, 서신이 어지러이 놓여 있는 것만 봐도 일정이 바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흥미롭게 구경하다 말고 그녀가 몸을 빙글 돌렸다.
“혹여 업무가 있으시면 제 거처로 돌아가 볼게요. 약속이 신경 쓰여 찾아온 건데 바빠 보이셔서요.”
“아니. 마침 잘되었습니다.”
카에드가 서류 더미를 헤집었다.
“주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그는 작달막하고 네모난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뭐예요?”
종이와 비슷한 재질이긴 했으나 쉽게 구부려지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물건이었다.
가운데엔 블카노프의 상징인 늑대 문양이 세심히 음각되어 찬란한 황금으로 빛나고 있었다.
‘카드 같기도 한데?’
세라엘이 갸웃거리자 그가 쓰임을 일러주었다.
“상점에서 현금 대신 쓸 수 있는 신용 증표입니다. 대금은 후급으로 청구되니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한도는 없습니다.”
“와아….”
과연 신용 카드 같은 개념의 물건이었다. 그것도 한도 따위는 없는!
세라엘의 벽안은 막대한 부의 상징인 증표에서 떠나갈 줄을 몰랐다.
“이걸 저 주시는 거예요?”
“세라엘 양이 아니면 누구한테 주겠습니까.”
은근히 달래는 어투로 카에드가 말을 이었다.
“성안에만 있어 답답했다는 거 알아요. 이제 외출 시엔 호위를 대동해 줄 테니 내게 일언만 하시면 됩니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아요.”
“고마워요, 대공님. 다행히 저도 보답으로 드릴 게 있어요.”
세라엘은 텅 비다시피 한 바구니를 주섬주섬 뒤져 초콜릿을 꺼냈다.
“단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후작저에서 챙겨 온 건데 대공님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
카에드는 대꾸 없이 초콜릿을 받아 들었다.
잘 조각된 듯한 미형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입맛 따위 없는 그가 단 것이라면 질색하는 사실을 세라엘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리도 신경 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대공님이 주신 것에 비하면 하찮지만, 줄곧 전해 드리고 싶었어요.”
”천만에요. 그따위 종잇조각보다 훨씬 가치 있습니다.“
한도 없는 신용 증표를 한낱 종이 쪼가리에 비유한 그였다.
“그건 그렇고, 숙취는 좀 어떻습니까?”
“막 일어났을 땐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어요. 그래도 베일리 부인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기운 차리는 약까지 먹었거든요.”
“그리 과음했으니 고역을 치를 거란 예상은 했습니다. 나아졌다니 다행이군요.”
타박하는 말투에 겸연쩍어진 세라엘은 입을 앙다물었다.
만찬의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마음이 붕붕 들떠서 끝 모르고 술을 들이마신 게 창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댄 카에드가 그녀의 얼굴을 가늠하듯 천천히 훑었다.
“어젯밤 기억은 나고?”
그가 넌지시 던진 물음엔 어떠한 의도가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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