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26)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26화(26/150)
“잠시만요…. 지금 얼떨떨함이 제 입을 막고 있어요.”
몸소 증명했지만 세라엘은 매우 잘 자고 잘 챙겨 먹었다,
끼니 중간에 간식도 먹고, 산책도 하면서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차 종류도 골라 마셨다.
식사도 대충 하고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다는 광기 어린 말을 하는 남자와 반대로 건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지금 카에드는 그런 그녀와 무엇이든 같이 하겠노라 제안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할 텐데 무리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나지막한 음성이 세라엘을 구슬리듯 속삭였다.
사실 그와 멀리 떨어져 생활하면서 답답한 점도 많았다.
서신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 것과 그를 보러 갈 때마다 마차를 타야 하는 점은 앞으로도 특히 번거로울 것이다.
좀 더 내밀한 심정으로는 카에드가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했고, 나아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같은 공간에서 살게 된다면 모두 자연스레 사라질 불만이었다.
하지만 완연한 성인 남자와 침실을 공유하는 건 아주 복잡미묘한 문제였다.
세라엘은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식사도 해 보고 수면도 취해 보겠다는데 냅다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그녀 본인도 그건 싫지 않았으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세라엘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평소대로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면 되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흠흠.”
짤막한 헛기침으로 흐린 말꼬리를 되잡은 그녀가 목소리를 이었다.
“대공님과 같은 침실을 쓴다는 게 사실 좀, 그래요.”
“무슨 뜻입니까?”
“아니, 조금 그렇잖아요. 대공님은 워낙에 완벽하신 분이라 잘 모르시겠지만 전 다른걸요.”
후작저에서 북부로 떠나던 날, 이른 새벽에 봤던 카에드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멀끔한 상태였다.
부드러운 흑발엔 삐져나온 머리칼 하나 없었고, 잠겨 있지 않은 목소리는 그저 감미로웠다.
반면 세라엘은 어떤가.
눈도 꾸벅꾸벅 감기고 가느다란 머리칼은 마구 엉켜서는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걷는다.
“잠에 취해 망가진 모습을 보여 줄 준비는 안 됐어요.”
막 기상했을 때의 몰골도 문제였다.
그중 제일 신경 쓰이는 점은.
“특히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자면 옷자락이 턱밑까지 올라가 있을 때가 있거든요. 아침 댓바람부터 그런 꼴을 보여 줄 수는 없는걸요.”
여유롭게 경청하고 있던 카에드는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서 서서히 경직했다.
아차 싶어 세라엘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제가 너무 솔직했어요. 못 들은 거로 해 주세요.”
그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제 눈을 가렸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양옆으로 시원하게 벌어진 입술이 낮은 웃음소리를 흩뜨렸다.
세라엘은 영문을 몰라 눈꺼풀을 깜빡였다.
“세라엘 양, 인제 보니 나를 오해하는 경향이 있군요.”
“무슨 뜻이세요?”
“아니면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게 습관인가.”
독언한 카에드는 웃음기가 다분히 묻어나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침실을 공유하자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내는 본성으로 오라는 뜻이었어요. 3층에 햇빛이 잘 드는 방이 하나 있는데 세라엘 양이 지내기에 나쁘지 않아 제안한 겁니다.”
“아….”
“후작저에서 초야 운운할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내가 세라엘 양과 동침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습니까?”
안달 난 사람 맞고 반응도 일부러 끌어냈으면서 카에드는 내색 하나 비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문 세라엘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
“대공님. 대공님이야말로 저를 오해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신 것 같네요.”
오해했다는 부끄러움과 억울함이 전의에 불을 지폈다.
“침실을 여기로 옮길 거냐고 물으시면, ‘여기’가 가리키는 게 본성인지 대공님 침실인지 제가 어떻게 알죠? 정황으로 맞춰 볼 수밖에 없는데 분명 후자처럼 들렸는걸요.”
잊고 있던 흑역사까지 끄집어내다니.
조금 흥분한 탓에 귀족 영애가 갖추어선 안 될 말본새가 장착되었다.
“그때 초야 어쩌구 했던 건 대공님께서 제 방을 향해 힘차게 걷고 계셔서 오해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일리 있네요. 미안합니다.”
“게다가… 어?”
불만을 이어 가려던 세라엘은 빠른 사과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줄이야.
“…용서해 드릴게요. 저도 이런 얘길 하려던 의도는 없었어요.”
물 흐르듯 진행된 대화였는데 어째서 잘 짜인 미궁 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이 드는 걸까?
어쨌든 유치하게 성을 낸 것 같아 멋쩍어진 세라엘이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처음부터 그 방으로 안내해 주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전 대공님이랑 멀리 떨어져서 지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추를 단 듯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온점을 찍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뱉은 말이 사랑 고백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는 걸 알아챘다.
다소 낯뜨겁긴 했으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기에 구태여 정정하지는 않았다.
오밀조밀한 세라엘의 얼굴을 말없이 주시하던 카에드는 더딘 속도로 손을 뻗었다.
유달리 길고 마디 곧은 그의 손이 조심스레 세라엘의 손등을 포갰다.
“그럼 거처를 옮겨도 괜찮겠습니까?”
“…네, 저도 본성에서 지내고 싶은걸요.”
고개를 끄덕이자 카에드는 입매를 미세하게 끌어 올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집사를 호출해 뭐라 지시를 내렸다.
아마 합가에 관한 서신을 베일리 부인에게 보내는 모양이었다.
미리 계획이라도 된 것처럼 세라엘의 이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별실에서 작은 공사가 진행 중인데 몇 주 내로 완공될 겁니다. 그때쯤 들어오시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카에드는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먹는 세라엘을 턱을 괸 채 지켜보았다.
“조만간 콜의 성인식이 있습니다. 큰 행사라 아이들이 세라엘 양의 참석을 기대하고 있어요.”
세라엘은 복숭아 조각을 입 안에 머금은 채 미소 지었다.
“성인식이라니 재미있겠는걸요. 데뷔탕트 같은 개념인가 봐요.”
“비슷합니다. 다만 발켄의 성인식에서는 치고받는 격투를 즐기는지라 피 튀기는 일이 빈번해서요. 불편할 것 같으면 참석하지 않아도 됩니다.”
“설마 누가 죽기야 하겠어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 꼭 참석할게요.”
“아직 사망자가 나온 적은 없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실제로 카에드가 수장이 된 이후로는 성인식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오래전 국경 너머에선 많은 남자가 발켄의 성인식을 치르다 죽었지만, 지금은 눈 한쪽이나 손가락 몇 개를 잃는 정도의 재미만 보고 있었다.
세라엘은 기대감이 어린 표정으로 포크를 매만졌다.
북부 영지에 와서 처음으로 보내는 행사나 다름없어 아무래도 콜의 성인식이 기다려지는 모양이었다.
때마침 카에드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선물도 그날 도착할 예정이었다.
세라엘뿐 아니라 막내인 렉터도 좋아할 선물이었다.
다가오는 선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과일 조각을 오물대는 그녀를 보자 카에드의 머릿속에서 음습한 욕심이 불쑥 비어져 나왔다.
보답할 줄 아는 그녀는 이번엔 또 무엇을 해 주려고 할까. 좀 더 욕심을 내서 원하는 걸 요구해 봐도 될까.
어디서 기원했는지 모를 괴이한 취향이 상상 속의 그녀를 꽉 붙들고 빈틈없이 옭아맸다.
카에드를 할퀴고, 때리고, 울며 소리 지른대도 아득한 한계 너머까지 몰아붙이고 싶은 도착적인 음욕.
오늘도 끝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너저분한 욕망을 그는 홀로 마음껏 음미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어느덧 콜의 성인식날이 다가왔다.
행사는 블카노프 소유인 실외 연무장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거리가 좀 있어 마차로 이동해야 했다.
저녁 느지막이 카에드는 세라엘이 머무는 첨탑 앞으로 찾아왔다. 합가 전이라 그녀를 직접 데리러 온 것이다.
모처럼의 행사라 세라엘은 화사하게 단장을 했다.
밝은 색감의 보닛과 푸른 기가 도는 회색 드레스의 조합은 화려하지 않아도 무척 우아했다.
칙칙한 북부에서 홀로 살랑거리는 봄꽃 같은 자태는 타인의 시선을 금세 사로잡았다.
지나가던 하녀가 예를 잊고 우뚝 멈춰서서 쳐다볼 정도였다.
마차에 기댄 채 성의 없이 발을 까딱거리고 있던 카에드는 그녀가 나오는 걸 보자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세라엘이 밝게 인사하는데도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선만 던졌다.
“왜 그렇게 봐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가까이 와 보십시오.”
요구대로 다가가자 카에드가 손을 뻗었다.
에스코트를 해 주려는 건가 싶어 세라엘도 혈색 짙은 손끝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은 그녀의 턱 부근이었다.
“……?”
뭘 하나 봤더니 그녀가 쓴 보닛의 레이스 끈을 풀어내고 있었다.
섬세한 손짓이 턱 아래 정갈하게 묶여 있던 리본을 풀어헤쳤고 모자는 곧 뒤로 휙 벗겨졌다.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걷히자 세라엘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님, 제 모자를 왜 벗기세요?”
“얼굴을 가려서 싫습니다.”
“저는 쓰고 싶은데요?”
“내가 없을 때나 마음껏 쓰시든가요.”
“아니,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오늘 일부러 옷이랑 어울리는 색깔로 골랐….”
부지불식간에 상체를 굽힌 그가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말랑한 촉감이 살짝 붙었다가 떼어지자 세라엘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카에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타십시오.”
예고도 없이 찾아든 접촉에 넋이 나간 그녀는 불평을 쏟아 내던 것도 잊었다.
요즘 부쩍 잦아진 스킨십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마치 연애 초의 어색함을 이겨낸 연인들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용인들이 다 보고 있는데!’
배웅하러 문 앞까지 나온 하녀들은 난데없는 애정 행각에 소리 없이 웅성거렸다.
“갑자기 뽀뽀하면 어떡해요…!”
“뭘 놀라고 그럽니까. 더한 것도 해 봤으면서. 타요, 얼른.”
등 뒤에서 하녀들이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정작 오해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말을 내놓은 카에드는 아무렇지 않게 승차를 종용했다.
세라엘은 그를 째려보면서도, 될 대로 되라 싶어 얌전히 품에 안겨 높은 마차에 올랐다.
“귀엽게 굴긴.”
조그마한 발톱을 세운 새침한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모습에 카에드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간 함께 지내면서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는 웃음이 정말 많은 편이었다.
카에드는 국경 너머에서 가장 큰 도적단을 거느렸던 수장답게 은연중에 위압적인 공기를 퍼뜨렸다.
하물며 그의 오랜 선조는 전쟁 영웅으로서 개국에 큰 공적을 세운 고위 귀족이다. 역사에서 지워지긴 했어도 선조 또한 발켄족 출신이었다.
카에드의 피에 흐르는 기백은 주변을 손쉽게 짓눌렀고, 세라엘 또한 특별한 이유 없이 흠칫 몸을 떨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허물없이 웃는 모습을 보면 매서웠던 기세는 사라지고 그저 순정적인 남자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잔혹한 살인이나 전쟁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상념이 이어지는 동안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