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31)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31화(31/150)
“대공님.”
세라엘은 머뭇거리는 손길로 그의 단단한 어깨를 짚었다.
불현듯 얇은 옷감 아래 자리한 흉터가 세라엘의 손가락에 스쳤다. 가늠하듯 손끝으로 훑으니 도톰하게 튀어나온 흉터의 부피감이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벗은 몸을 보는 바람에 놀라서 잊고 있었는데.’
그의 왼쪽 어깨에는 깊은 자상으로 말미암아 생긴 상흔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에서 기인했는지도 세라엘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이 어딜 만지고 있는지 눈치챈 카에드는 반듯한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볼래요?”
제 흉터를 발견한 게 무척 기쁜 눈치였다. 말없이 끄덕이자 카에드는 이어진 시선을 끊지 않은 채 툭, 툭 단추를 풀었다.
상흔을 보여 주기 위해 하는 단순한 행동이란 걸 알면서도 세라엘의 심장이 크게 달음박질쳤다.
두 번째로 눈에 담는 그의 헐벗은 상반신이었다.
오래전 날카로운 화살촉이 후벼팠을 살갗에는 흉한 자국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큰 문제 없이 회복되었음을 보여 주는 하얀 상흔이었다.
그러나 잘 벼려진 쇠촉이 박힘과 동시에 생긴 마음속 상처만은 복구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거, 많이 아팠어요?”
세라엘은 그의 흉터를 훑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팠다기보다 처음엔 화가 났던 것 같군요. 오랜 기억이라 희미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셔도…. 회복하는 데 오래 걸렸을 상처인데….”
“괜찮습니다. 내게 이 흔적을 남긴 자는 이미 죽고 없으니까.”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세라엘과는 달리 카에드는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그러고는 세라엘의 품에 뺨을 대고 느릿느릿 비볐다.
세라엘이 직접 목격한 건 아니었지만 끔찍한 광경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키득거리면서 카에드를 향해 사냥용 활을 겨눴을 공자. 왼쪽 눈을 노렸던 화살은 어깨를 빗맞혔고, 카에드는 그 자리에서 공자를 잔인하게 죽였다.
그걸 계기로 양아버지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던 그는 승전고를 울린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이게 세라엘이 알던 전개였다.
그러나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 그들은 어떤 전쟁도 치르지 않았다.
블카노프 공작과 공자, 계승권이 있는 모든 가문원은 그 뒤로 몇 년은 호의호식하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살해당했다.
목전에 앉은 남자는 같은 자리에 화살을 맞았지만, 자신이 소유해야 할 모든 걸 되찾은 채 세라엘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공님.”
세라엘이 고운 손으로 카에드의 턱선을 쓸었다.
그는 버릇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라엘의 지문이 닿는 얼굴에서는 분명한 온기가 느껴졌고, 그녀를 향한 눈동자에는 강렬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
“저는 제 인생이 더 행복하길 바라서 대공님을 선택한 거예요.”
찬연한 금안에는 세라엘만이 오롯이 투영되고 있었다.
“제겐 앞으로 살아갈 삶이 더 중요해요. 그건 대공님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어요. 지나간 일은 되새기지 않고 그냥 묻어 놓고 싶어요.”
불행했던 그의 과거를 캐묻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할까.
호기심을 앞세워서 그가 누굴 죽이고 뭘 어떻게 했는지 샅샅이 알아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복기하고 싶지 않은 지난 삶을 가진 세라엘은 앞으로의 여정에 집중하고 싶었다.
잠깐 눈을 내리뜬 카에드는 어떠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끝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 듯했다.
“안아도 됩니까?”
대신 아까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살짝 굳었던 표정을 풀고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지금도 안고 계시잖아요.”
“그 뜻이 아닙니다.”
맞잡은 손에 은근한 힘이 들어갔다. 카에드는 세라엘을 잡아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지난번과 다를 바 없는 자세였으나 장소가 침대라는 차이가 있었다.
“세라엘 양을 안고 싶어요.”
그는 허락을 구하듯 귓가에 속삭이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내를 알기 어렵다고 느꼈던 남자의 눈동자가 절절 끓고 있었다.
오로지 세라엘을 향한 시선이 느릿하게 입술로 내려왔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눈빛이었다.
그제야 반복된 질문에 담긴 속뜻을 알아챈 세라엘은 딸꾹질하듯 숨을 들이켰다.
노골적으로 와닿는 정욕에 두 뺨이 발그스레 상기되었다.
“어어….”
“당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는 세라엘의 하얀 목에 입술을 파묻었다.
성인식에서 늑대가 콜을 잡아먹을 듯 물어뜯는 모습을 보고 애정 표현이라고 했던가. 지금 카에드는 그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놀라지 않게 입술을 먼저 붙이며 마찰음을 냈다가, 치아를 세워 여린 살을 깨물면서 부드럽게 핥았다.
빈틈없이 입술을 대고 살갗을 빨아들이기도 했다.
애틋하기만 한 접촉은 점차 참을성을 잃고 있었다. 민감한 부위에 닿는 감각도 한층 아찔해지면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너른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간지러워요.”
세라엘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동시에 마주친 그의 눈에는 조금 전에 머금었던 순정이 씻은 듯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움직이는 사냥감을 포착한 것처럼 선득한 안광이 번득이고 있었다.
카에드는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꽉 붙들면서 작정하고 입술을 박았다.
달아나는 생명체를 쫓아 그 목을 손아귀에 움켜잡고 싶어 하는 욕망은 국경 원정 때나 생기는 사냥 본능이었다.
이 집요한 본성이 다른 모양으로도 탈바꿈될 수 있다는 걸 카에드는 세라엘을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적당히 불타오르다 사그라들며 재만 남을 욕정이 아니었다.
카에드는 나날이 끝모르게 솟구치는 감정을 그녀 안으로 모조리 털어 넣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서툴게나마 받아들이는 그녀를 보면 느려빠진 속도에 맞춰 주고 싶다가도, 정신 못 차리게 괴롭혀 보고도 싶은 못된 야욕이 치솟았다.
“잠깐만요.”
문득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기척을 감지한 세라엘이 카에드의 머리통을 밀어냈다.
그는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 동작을 멈추지 않고 세라엘의 손을 저지했다.
“방금 밖에서….”
“가만히 있어 봐요.”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요?”
흥분의 잔재를 완전히 벗겨 내지 못한 그의 눈도 창밖을 향했다.
바퀴 구르는 소리와 서너 마리 정도 될 법한 말의 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손님이 오기로 했나요?”
“…아닙니다. 당신에게 줄 선물이 도착했나 보군요.”
아쉬운 듯 카에드가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당사자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하얀 피부엔 새빨간 울혈 자국이 여러 개 피어나 있었다.
카에드는 남몰래 만족스럽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에게 털 달린 망토를 손수 둘러 주고 나서 풀어 헤쳐진 제 셔츠를 갈무리했다.
“나가서 확인해 봐요.”
카에드의 말을 끝으로 세라엘은 선물이 무엇일지 다시금 상상해 보았다.
마차까지 타야 할 정도라면 크기나 남다른 선물이거나, 생명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세라엘뿐만 아니라 렉터도 좋아할 만한 선물.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기에 그녀는 조금 들뜬 걸음으로 카에드와 침실을 나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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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라 실외는 쌀쌀했다.
세라엘은 털 망토를 여미면서 종종걸음으로 안뜰로 향했다. 뒤따라온 카에드는 말없이 그녀의 보폭에 발맞춰 걸었다.
본성 바로 앞에는 육중한 검은 마차가 서 있었다. 자리에서 펄쩍 뛰어내린 마부가 카에드를 보자 예의를 갖췄다.
“명령하신 대로 무사히 데려왔습니다.”
“수고했다.”
카에드는 금화가 수십 개는 들었을 법한 돈주머니를 마부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기는 했으나 마부는 황송하다는 안색으로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대가는 바라지 않습니다, 영주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 신부에게 줄 선물을 탈 없이 가져온 노고를 치사하는 거니 받아라.”
“…감사합니다, 영주님.”
대화가 오가는 동안 세라엘의 눈은 마차 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어 차 문이 끼익, 열리고 쭈뼛거리는 움직임과 함께 누군가가 발을 폴짝 내디뎠다.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루시!”
만면에 미소가 퍼지며 세라엘이 루시를 껴안았다. 친모가 작고한 후부터 세라엘 곁을 지켜 주고 유일한 편이 되어 준 하녀였다.
“네가 올 거라고 예상했었어.”
조금 얼떨떨해 있던 루시가 곧 감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라엘 아가씨…!”
둘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약간 무례하다 느꼈을 정도로 루시가 와락 품에 안겼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아가씨가 너무 그리웠어요.”
세라엘은 가볍게 웃으면서 루시를 토닥였다.
허리를 꼭 부둥켜안은 하녀가 갑자기 손을 멈칫했다.
“으음. 북부에 가서 살이 빠지셨을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잘됐네. 건강하게 잘 지냈거든. 살이 좀 찐 것 같니?”
“아뇨, 워낙 마르셨으니 티도 잘 안 나는걸요. 좋아 보이셔서 한 말이에요.”
매일매일 손수 관리해 줬던 아가씨의 머리칼과 피부 등을 이리저리 살피던 루시가 흐뭇하게 웃었다.
“변함없이 완벽하세요.”
“정말 보고 싶었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니?”
루시의 눈은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두 여자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던 카에드에게 향했다.
“블카노프 대공님을 뵙습니다.”
마주한 것만으로도 조금 겁이 났는지 루시는 눈을 피하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떠나시고 얼마 안 돼서 저택에 기별이 하나 들어왔어요.”
“대공님이 보내신 거구나.”
“네에. 아가씨를 잘 아는 하녀가 시중을 들었으면 좋겠으니 저를 보내 달라는 통지였거든요.”
수전노로 유명한 밀로즈 후작이 일 잘하고 봉급도 낮은 루시를 쉽게 보내 줬을 것 같지는 않았다.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니 분명 금전을 요구했을 것이다.
세라엘은 고개를 돌려 카에드를 바라보았다. 하나뿐인 친구를 데려와 준 건 고마웠지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대공님. 혹시 제 아버지께 돈을 주고 루시를 데려오신 건가요?”
제 여식을 돈벌이 수단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후작에게 만약 카에드가 돈을 줬다면 정말 싫을 것 같았다.
“안 줬습니다.”
담담한 눈으로 세라엘을 응시하던 그가 명쾌히 대답했다.
“그 집에 뭐라도 준다면 당신이 싫어할 것 같아서요. 호의로 달라고 요구했을 뿐입니다.”
“아…. 다행이에요. 아버지께서 흔쾌히 허락하셨나 봐요.”
“고민도 하지 않더군요. 내 서신을 받자마자 하녀를 보냈던 걸 보면.”
이보다 더 비굴할 수 없을 만큼 저자세로 카에드에게 빌빌 기던 부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도 쉽게 사용인을 붙여 줄 수 있었으면서 하나뿐인 여식을 홀로 북부에 보내다니.
상식적으로 결혼을 앞둔 귀족 여성이 사용인 하나 없이 출가하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그 집안은 상식이 없었고, 어차피 세라엘도 국경과 가까운 영지가 위험하단 걸 알기에 루시를 마음 편히 데려올 수는 없었지만….
“루시, 네가 와서 정말 기뻐. 칼스비크도 지내 보니 좋은 곳이더라. 너도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야.”
“아가씨를 다시 보게 되어서 기뻐요.”
루시를 한 번 더 껴안은 세라엘이 이번엔 카에드에게 다가갔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대공님.”
“세라엘 양이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세라엘은 까치발을 들고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가뜩이나 딱딱한 몸이 일순 경직하나 싶더니, 곧 커다란 손이 세라엘의 등을 감쌌다.
이에 그치지 않고 카에드는 턱을 내려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짤막하게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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