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37)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37화(37/150)
어느덧 세라엘의 거처를 본성으로 옮기는 날이 다가왔다. 대공성은 오전부터 느지막한 저녁까지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용인으로 인해 간만에 활기가 넘쳤다.
첨탑에 있던 짐을 베일리 부인과 하녀들이 정리하여 상자에 넣으면 카에드의 부하들이 마차에 실었고, 본성에 도착한 짐은 콜과 악셀, 렉터가 3층 침실까지 옮겨 주었다.
본성에서 세라엘의 시중을 들기 위해 함께 이사 온 하녀들은 그녀의 짐을 풀어 새 침실의 옷장과 서랍에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안주인인 세라엘이 그들의 일을 몸소 도울 순 없었지만, 그녀는 주변을 서성이며 정리할 물건의 위치를 일러 주었다.
‘마냥 놀고만 있기도 싫고, 내가 쓸 물건 정도는 어디 있는지 알아야지.’
별것 아닌 일이었는데도 몇 시간 동안 이어지는 이사가 힘에 부쳤다.
세라엘은 침실 앞에 쌓인 빈 상자들을 내리훑었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여행 가방 하나에 모두 들어찼던 짐이 부쩍 늘어 있었다.
대공성으로 초대한 상인들에게서 두꺼운 외투와 겨울용 드레스, 편의를 위한 잡화 등 필요한 물건만 사들였는데도 짐 상자가 십수 개였다.
카에드가 준 신용 증표가 아무리 한도가 없다지만 생각 없이 써 버릴 순 없었으니 나름대로 조절한 소비였는데도 그랬다.
그렇게 짐이 늘어 버린 탓에, 도움이 없었다면 며칠이 걸려도 끝나지 않았을 이사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삿짐을 옮기던 렉터가 복도에 서 있던 루시를 발견했다.
“루시!”
그는 몹시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는데, 힘들어하는 기색은 한 터럭도 보이지 않았다.
“나 얼굴에 땀이 좀 났는데 눈에 계속 들어가거든. 괜찮으면 네가 닦아 줄래?”
“어? 알겠어….”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낸 루시가 그에게 다가갔다.
루시는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렉터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었다.
“땀이 어디에 난 거야? 아무 데도 안 보이는데….”
“대충 이마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앗, 눈에 또 들어간다.”
착한 루시는 손수건으로 허둥지둥 그의 이마를 눌러 주었다. 수가 훤히 보이는 수작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누님! 이 짐은 어디에 두면 될까요?”
막 층계를 올라온 콜이 양어깨 가득 얹은 상자들을 내보였다.
“그건 릴리에게 전해 주면 돼. 지금 침실 안에서 옷을 개고 있을 거야.”
“릴리? 그게 누구였더라.”
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누님.”
한참 여념이 없던 차에 등 뒤에서 이번엔 악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품 안에 상자 세 개를 아슬아슬하게 쌓은 상태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이게 탑에서 가져온 마지막 짐이에요. 마차에 남은 상자들을 모두 가져왔거든요.”
“덕분에 오늘 안으로 이사가 끝나겠어. 다들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고생은 누님이 더 했겠어요. 우린 남는 게 힘인데요, 뭘.”
악셀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며 상자들을 쿵 내려놓았다.
홀가분하게 손을 털던 그는 루시가 렉터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악셀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이야, 우리 막둥이가 태평스럽네. 이사를 돕는 건지, 연애질하러 온 건지. 둘 중에 어느 쪽이야?”
“……!”
그의 짓궂음에 놀란 루시가 펄쩍 뛰며 렉터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루시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을 붉히다가 어딘가로 후다닥 내달렸다.
홀랑 내팽개쳐진 손수건과 그녀의 뒷모습을 황망히 번갈아 보던 렉터가 대번에 쌍심지를 켰다.
“형은 진짜 왜 그러냐! 그런 식으로 말하면 루시가 곤란해지잖아! 미친놈아.”
“뭔 놈? 이게 형한테 이제 못 하는 말이 없어. 결혼은 누님이랑 두목이 할 건데 왜 너희가 알콩달콩하고 난리냐 이거야.”
렉터의 얼굴이 루시만큼이나 새빨개졌다.
“겨, 결혼이라니! 내가 루시랑 벌써 거기까지 계획하고 있을 것 같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 사랑 때문에 귀까지 먹었냐? 이렇게 군기가 빠져서 뭐라도 할 수 있겠어? 원정 가서도 내빼지 않고 싸울 수 있겠냐고, 어?”
“사… 사랑까지는 아니야! …아직은!”
“어휴, 진짜 귀가 먹었구나. 이 답도 없는 귀여운 놈.”
악셀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세게 조르자, 렉터는 소리를 내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몸싸움에 가까운 과격한 장난을 치던 두 사람은 회랑에 놓인 콘솔 테이블을 와장창 쓰러뜨렸다.
침실에 있던 릴리가 그들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저기! 아가씨 침실 앞에서 살림살이 때려 부수지 말고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특히 너 악셀!”
“싸우는 게 아니라 장난치는 건데?”
“참나. 그럼 장난치려면 나가서 장난치든가! 일을 도와주는 거니, 만드는 거니?”
“목소리 한번 우렁찬 거 봐라. 우리 검술 연습할 때 네가 구호 넣어 주면 되겠다.”
“…그, 그게 숙녀한테 할 소리야? 정말 신사답지 못하구나!”
소란스러워진 공기를 가르고 나온 세라엘은 3층 홀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짐이 다 옮겨졌으니 이사도 조금씩 끝이 보이고 있었다.
하인이 가져다준 찬물을 들이켜면서 그녀는 슬그머니 난간 아래를 의식했다.
‘대공님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바로 아래층이 카에드의 침실이자 집무실이었다.
얼핏 들은 바로 그는 국경 경비 강화에 대한 직무와 대정원에서 치러질 결혼식 준비를 갈무리하느라 몹시 바쁜 모양이었다.
와중에도 세라엘의 이사를 돕기 위해 직접 부하들을 보내 업무를 분담시켜 주었다는 걸 전해 들었지만, 문제의 그날 아침 이후 카에드를 마주친 적은 없었다.
‘얼굴을 어떻게 보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됐으니 이제 언제든 맞닥뜨릴 수도 있는걸.’
세라엘은 그가 지닌 커다란 존재 때문에 심경이 줄곧 복잡했다.
몇 번이고 떨쳐 내려 해도 위용을 자랑하는 윤곽이 뇌리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이 목에 닿던 순간 무척이나 곤혹스러워하던 카에드의 얼굴까지도.
‘손끝이 스치는 정도의 접촉에도 그렇게나 커지는 걸까?’
그날의 기억을 거듭 곱씹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자는 동안 어떤 실수를 했나…?’
진실에 근접한 추측이었으나 곤히 자고 있던 세라엘이 자세한 정황까지 알 턱은 없었다.
‘모르겠어. 이제껏 더한 행위도 몇 번이나 해 봤고,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도 봤는데 그땐 왜 못 느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자 조금이나마 가닥이 잡히는 답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항상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 허벅지에만 앉았었어.’
마차 안에서 그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잤을 때도 분명 왼쪽이었다.
그렇다 해도 집무실에서 입을 맞췄을 땐 온몸을 꼭 밀착한 상태였는데 세라엘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다른 생각으로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해도 그럴 수가 있나?
돌이켜보면 몸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으면서 이게 뭐지, 싶었던 순간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안개처럼 희미한 기억이었다.
세라엘은 자신이 이렇게 둔한 타입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냐. 내가 마냥 둔한 게 아니라 그냥 경험이 없어서 그래….’
시무룩이 눈을 내리깐 그녀가 물컵을 매만졌다.
결혼식과 첫날밤.
대사를 코앞에 둔 세라엘은 정의할 수 없는 여러 감정 때문에 몹시 어수선한 심경이었다.
‘걱정은 이 정도만 하고 나중 일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자.’
답이 보이지 않는 고민으로 머리를 싸맬 바에야 지금 닥친 일에 집중하는 편이 현명했다. 세라엘은 남은 짐 상자를 정리하기 위해 다시 침실로 향했다.
그렇게 본성에서의 첫날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
이튿날, 세라엘은 오전부터 루시와 본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루시에게 성을 구경시켜 주면서 자신도 아직 가 보지 못했던 장소들을 눈에 익힐 셈이었다.
다른 구역에 비해 특히나 넓고 복잡한 본성은 사용인마저 길을 잃는 일이 부지기수여서, 직접 거닐며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오전에는 손님들이 지낼 침실이 모인 귀빈관을 방문했고, 오후가 되자 외부에 있는 후원을 보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닥거리고 있던 청소년 3인방 렉터와 악셀, 콜을 마주쳤다.
콜은 성인식까지 치른 어엿한 성년이었지만, 험악한 겉모습과 달리 어리숙한 면이 있어 아직도 청소년 취급을 받곤 했다.
“다 같이 겨울 축제에 가자고요?”
후원 중앙에 놓인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다과를 늘어놓고 수다를 떨던 중, 함께 축제에 가자는 제안을 했더니 악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응, 근처 도시에 축제가 열린다는 얘길 들었는데 너희가 동행해 준다면 더 즐거울 것 같아. 혹시 가 본 적은 있니?”
세라엘의 물음에 악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형들은 시끌벅적한 곳을 싫어해서, 예전에 우리끼리만 다녀온 적이 있어요. 와, 거기 노점에서 파는 훈제 소시지가 일품이더라고요.”
악셀이 뭔가를 떠올리는 눈빛으로 허공을 보며 군침을 삼키자 콜이 동의했다.
“그것만 먹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맛있었지.”
“주인아저씨가 축제 기간에 팔려고 재료를 넉넉히 준비했다던데 우리 셋이서 사흘 만에 다 먹어 치웠어요. 여관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그것부터 먹으러 갔거든요.”
“옆 가판대에서 팔던 감자튀김이랑 생선튀김, 양고기 케밥까지 우리가 모조리 거덜 냈지.”
콜이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그들의 어마어마한 식성을 되새긴 세라엘이 한마디 얹었다.
“덕분에 노점 상인들이 아주 좋아했겠는걸. 지역 사회의 경제를 활발하게 해 주다니 정말 잘했어. 이번에도 노점을 원 없이 거덜 내 보는 게 어떻겠니?”
뜻밖의 칭찬과 제안에 신이 난 청소년들은 열띤 시선을 교환했다. 특히 콜은 마구 일렁이는 눈으로 세라엘을 보면서, 두 손을 다소곳이 가슴에 올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누님은 지상을 방문한 천사입니다. 시프 형은 우리가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먹어 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눈치 보였는데, 그리 말해 주시다니 정말 감동입니다.”
“부끄러우니까 너무 그러지 마. 잘 먹으면 보기 좋은 건 당연하잖아.”
그리 말하면서 세라엘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 준 적 없었던 카에드를 떠올렸다.
‘이상하게 생긴 단백질 바나 대충 챙겨 먹고, 그것도 모자라 항상 술만 마시고, 잠도 안 자고.’
생활 습관만 보면 건강 상태가 무척이나 염려되는 남자였다.
열띠게 대화하는 두 사람과 달리 렉터는 말이 없었다. 씁쓸한 낯으로 루시를 힐끔거리고 있는 걸 보니, 그녀와 단둘이 가려던 계획이 무산되어 슬픈 모양이었다.
그때 악셀이 루시를 턱짓했다.
“얘도 같이 가는 거예요?”
루시를 성의 없이 지칭하는 태도에 렉터가 발칵 역정을 냈다.
“얘라고 하지 마! 루시라는 예쁜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 주의해라.”
호감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말에 루시뿐 아니라 모두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다소 숙연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잠잠하던 악셀의 장난기에 스멀스멀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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