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42)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42화(42/150)
카에드가 멈칫하여 그를 돌아봤다.
“세라엘 양이?”
“예에. 지금 3층에 계십니다. 오전부터 방문하셔서 제가 안내를 해….”
알버트가 뭐라 더 말하려던 차에 카에드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도서관 문을 열어젖혔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호크와 흐뭇한 표정의 알버트는 빠르게 멀어져 가는 카에드의 뒷모습을 끼익 닫히는 육중한 문틈으로 지켜보았다.
***
세라엘이 꺼내든 책은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듯 책머리에 케케묵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녀는 먼지를 탈탈 털어 낸 후, 누가 볼까 두려워 책을 가슴에 안은 채 근처 책상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세라엘은 조심스럽게 표지를 넘기고 목차부터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를 하는 방식과 순서?’
목차 중간에 구미가 확 당기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신중한 손짓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런 책이 어째서 의료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이 책의 자극적인 제목을 보자 호기심이 도화지에 엎지른 물감처럼 왈칵 번져나갔다는 거다.
머릿속 깊이 파고든 요즘의 고민과도 연관성이 있는 주제이기도 했고. 세라엘은 목차에서 확인한 페이지 번호를 짚어 가며 책장을 펼쳤다.
원하는 페이지에 도달한 그녀는 곧 지면을 가득 채운 삽화를 발견하고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림이 너무 적나라해…!’
이론만 조금 알 뿐 실전 경험은 전무했던 그녀는 이런 난잡한… 아니, 선정적인 묘사에는 면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건 보고 싶지 않아. 글자로 상세하게 설명된 부분은 없는 걸까?’
당혹한 세라엘은 책장을 넘겼다. 다음 장, 또 다음 장. 계속해서 넘기는데도 다양한 그림이 끝도 없이 나오면서 세라엘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서였을까. 층계를 뚜벅뚜벅 오르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길쭉한 실루엣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건.
“세라엘 양.”
익숙한 저음이 기습하듯 머리 위로 떨어지던 순간 세라엘은 고개를 쳐들었다. 갑작스러웠으나 시야에 들어온 남자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어? …대공님?”
책장을 넘기던 세라엘이 얼떨떨한 낯을 하고 입술을 약간 벌렸다. 재회라 부르는 게 무색할 만큼 고작 며칠 만에 맞닥뜨린 남자였다.
그런데도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반가움에 세라엘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번듯하게 다물린 카에드의 입매에도 보기 좋은 호선이 새겨졌다.
카에드는 책상 가까이 걸어왔다. 불현듯 자신이 종전까지 읽고 있던 서적의 존재를 자각한 세라엘이 희미하게 미소를 거둬들였다.
눈길은 다가오는 남자에게 꽂혀 있었으나, 온몸의 촉각은 책상 위에 놓인 책으로 향했다.
‘들키면 끝장이야.’
수십 장을 메운 삽화 때문에 의료 서적이 아니라 음란한 화첩으로 오해한대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만약 들킨다면, 성적 교감에 대한 이론적인 내공을 쌓기 위해 글자만 읽어 보려 했을 뿐이라고 해명할 수도 있었다.
아니, 해명? 이보다 더 거짓말처럼 들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의심스러운 해명이었다.
애당초 세라엘이 남녀 간의 정사에 관한 이론을 공부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를 그에게 알려 줄 수 없었다.
이제껏 카에드 앞에서 저지른 실수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할 정도로 낯뜨거운 역사가 될 게 분명했다.
이불이나 몇 번 차고 넘길 수준이 아니었다. 고로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이 지닌 비밀을 사수해야 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세라엘은 카에드와 연결된 시선을 끊지 않은 채 펼쳐진 책을 느릿느릿 덮었다.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뒤쪽 커버가 위를 향하게 뒤집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에드는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빼 앉으며 상체를 불쑥 기울였다.
“……!”
불시의 움직임에 당황한 세라엘은 책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허무맹랑한 착각에 사로잡혀 손을 움찔 허공에 튕겼다.
주의를 기울여야만 눈치챌 수 있는 미세한 손짓이었으나 분명 방어적이었다. 카에드가 착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움직임이었기에 다소 과한 반응이기도 했다.
의자에 느긋하게 상체를 기대려던 그는 범상치 않은 기류를 귀신같이 감지하고 미미하게 동작을 멈췄다.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금색 눈동자가 세라엘이 보였던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려 조금 커지더니, 곧 탐색하듯 오묘한 이채를 드러냈다.
세라엘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꾸며 내어 서두를 뗐다.
“오전부터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용무가 있어 전망대에 들렀다가 당신이 도서관에 있다는 얘길 전해 들었습니다. 입성하자마자 부지런히 살펴보고 다니시는 모양인데, 어떤가요? 지낼 만합니까?”
“아….”
탄성을 흘린 세라엘이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았다.
다행히 위아래가 뒤집혀 놓인 책에서는 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카에드와 눈을 맞추면서 흐려진 말꼬리를 이어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챙겨 주신 덕분에 모자람 없이 지내고 있어요. 그래도 며칠은 더 지내 봐야 본성에 있다는 실감이 날 것 같아요.”
“처음 자 보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카에드는 그와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댓바람부터 쫓겨나듯 침실에서 나왔던 기억을 짚어 주었다.
쫓겨나기 전 목격했던 불룩한 윤곽이 떠오르자 세라엘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그는 세라엘을 이 자리에, 이 책과 함께 앉힌 장본인이었다.
“이삿날 급한 업무가 생겨 세라엘 양을 미처 만나러 가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말썽 피우지 말고 도와주라 일렀는데 말은 잘 듣던가요?”
급한 일이라 하면 얼마 전 악셀이 언급했던 국경선 문제와 관련이 있으려나.
다들 쉬쉬하고 있나 본데 괜히 물어봤다간 악셀이 곤란해질까 봐 세라엘은 말을 아꼈다.
대신 복도를 요란하게 누비면서 가구를 우당탕 엎지르고 장난치던 청소년 삼인방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말썽은요. 아이들 덕분에 이사도 일찍 끝났는걸요. 짐이 많았는데 사용인들이 팔 걷고 도와준 덕분에 힘들지도 않았고요.”
카에드는 짤막한 고갯짓으로 안부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고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나저나….”
언제나처럼 감미롭고 나지막한 음성이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세라엘은 태연함을 가장한 미소를 살짝 머금은 채, 이어지는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뭘 읽고 있던 겁니까?”
애써 감추었던 당혹감이 그녀의 만면에 스쳤다.
“그것도 아침부터.”
그가 덧붙이며 세라엘을 관찰하던 시선을 서적 위로 떨어뜨렸다.
줄곧 감추고 싶어 하던 비밀에 카에드가 흥미를 보이자, 세라엘의 머리 회전이 이보다 더 빠를 수 없을 만큼 팽팽 돌기 시작했다.
도서관의 분류 체계를 잘 인지하고 있는 남자다. 3층엔 의료 서적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 테고, 괜한 거짓말로 의심을 사선 안 되었다.
세라엘은 진실을 말하되 뭉뚱그려 대답하기로 했다.
“인간의 신체…와 관련된 의학 서적이에요.”
“신체?”
그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네에. 사서님께서 층별로 안내해 주셨는데 관심을 끄는 자료가 정말 많았어요. 특히 여기 3층에 있는 해부학 문헌의 존재를 강조하시기에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해부학 문헌이라면 나도 오래전에 읽어봤습니다. 한때 금서로 취급되었다는 점이 확실히 인상 깊었죠.”
카에드는 산뜻한 어투로 동조했다.
“그러셨군요.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읽을거리가 떨어져서 봤던 거라 그다지 흥미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엔.”
짧게 덧붙인 카에드가 턱짓으로 세라엘의 가슴 앞에 놓인 서적을 가리켰다.
“해부학 책을 읽고 계시는 겁니까?”
세라엘은 얼굴을 그대로 쳐든 채 동글동글한 눈동자만 굴려 그가 가리킨 방향을 의식했다.
…위화감이 들지 않기는 무슨.
세상에서 가장 수상해 보이는 책이 제목을 숨긴 채 거꾸로 놓여 있었다.
“아마도요…? 잘은 모르겠어요. 대중없이 책등을 훑다가 가져온 거라서요.”
대꾸한 세라엘이 카에드에게 어떠한 눈총을 보냈다.
‘그만 물어봐.’
동시에 마음속 목소리도 외쳤다. 세라엘은 이 순간만큼 그가 신사답게 굴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여성이 읽고 있던 책을 불쑥 가져가지도 않고, 어떤 내용의 책인지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아 주기를.
길지 않은 침묵 끝에 그는 전자도 후자도 아닌, 예상 범주에서 벗어나는 말을 꺼냈다.
“세라엘 양이 의료 분야에 학구적인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인체를 탐구하고 싶은 겁니까?”
“네?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인체 탐구라는 주제가 시시하지는 않은 듯해요.”
“책상에서 이론 학습만 하는 것보다 실질적인 연구에 초점을 맞춰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물론 활자만 읽다가 직접 경험해 보는 건 천지 차이겠죠.”
“맞는 말입니다. 혹시 남성 지원자가 필요하신지?”
“아뇨…! 그게 무슨 뜻인가요!”
세라엘은 양 뺨을 물들인 채 의자를 박차듯 벌떡 일어났다. 휘몰아치는 그녀의 속도 모르면서 말장난이나 하고 있다니.
이 책의 주제나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건 아닌가 뒤늦게야 낭패감이 어렸으나, 세라엘은 지금이 기회다 싶어 책을 집어 들었다.
“잠시만 여기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어딜 가는 겁니까?”
인제 보니 그의 목소리에 짓궂은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책을 제자리에 두고 오려고요. 이제 그만 읽을 거예요.”
새초롬하게 쏘아붙인 세라엘이 걸음을 옮겼다.
걷는 내내 뒤통수에 즐거워하는 눈길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책을 껴안고 서가로 걸어가서 원위치에 꽂아 넣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그녀의 심경을 어지럽히는 남자는 서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휴….”
세라엘은 책장에 이마를 살짝 기대고 숨을 골랐다. 어디서 기인했는지 모를 감정이 두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수상쩍은 책을 읽다 들킬 뻔한 것? 그가 낯뜨거운 말장난을 한 것?
아니면 그녀를 줄곧 고민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던 존재를 지닌 남자를 마주한 것?
세라엘은 답할 수 없는 의문을 던지며 두근대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요동치는 박동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힌 후에 몸을 빙글 돌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카에드는 그녀가 지시했던 대로 차분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해진 기류에 어찌 적응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그가 말문을 열었다.
“세라엘 양이 성 밖으로 나갈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동행인도 여럿 데려갈 생각이신 듯하던데.”
종전에 보였던 웃음기는 씻은 듯 거둬 낸 카에드가 어깨를 비스듬히 세운 채 세라엘을 응시했다.
책상에 두 손을 올리고 꼼지락거리던 세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겨울 축제에 가도 될는지 여쭤보려고 했었어요. 타지에서 상인들이 올라올 정도로 큰 축제라던데 루시도, 저도 한번 참여해 보고 싶어서요. 괜찮을까요?”
외출 허락을 묻는 물음에 카에드는 대답이 없었다.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이라 기분 나빴으려나?
잠깐 망설이던 세라엘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낮게 가라앉은 저음이 날아들었다.
“아이들과 꽤나 가깝게 지내시는군요.”
세 명의 남자를 언급한 목소리는 미묘하게 못마땅한 어투를 지니고 있었다.
대화의 흐름이 다소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감지한 세라엘이 턱을 갸우뚱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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