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43)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43화(43/150)
“아이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일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걸요.”
세라엘이 얼떨떨하게 답하자 카에드는 한층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누구와 제일 친하게 지내고 싶으셨습니까? 이번에 성년식을 치른 콜인가요?”
황당한 물음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벌리던 세라엘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게 아니라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면 즐거울 것 같아서 제안한 거예요.”
“다 같이? 그러면 가장 동행하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아이들 중에서요?”
세라엘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에드가 지금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실은 렉터가 루시랑 축제에 가고 싶어 하는데 루시가 둘만 가기엔 조금 어색해해서요. 그래서 여럿이서 가기로 한 건데… 다들 비슷한 나이대라 어울리다 보면 친해질 수 있잖아요. 루시도 여기서 살게 되었으니까 아이들이랑 가까워지면 좋을 거고요.”
구구절절 부연하는 말이 세라엘의 귀에도 변명처럼 들렸다.
카에드는 계속해 보라는 듯 등받이에 기대어 느긋한 자세를 유지했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에요. 저도 줄곧 겨울 축제에 가고 싶었거든요….”
말꼬리를 흐린 세라엘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가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못마땅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축제에 참여하려던 계획을 다른 이의 입을 통해서 통보하듯 듣게 해서 기분이 나빴던 건지 대략적인 추측만 할 뿐이었다. 아니면 설마, 그에게는 동행을 묻지 않아서 언짢았던 걸까?
“혹시 대공님도 축제에 가고 싶으셨던 건가요?”
세라엘은 짐작하는 바를 입 밖으로 우물쭈물 꺼냈다. 카에드는 가뜩이나 냉담한 얼굴을 더 딱딱하게 굳혔다.
“나는 어수선한 장소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축제를 싫어하노라 주장하는 목소리가 그녀의 예상을 갈라놓았다.
“아… 그러시구나.”
망연히 중얼거린 세라엘이 허공 어딘가로 멍한 시선을 던졌다.
‘아쉽다. 난 좋아하는데.’
세라엘은 발 디딜 틈 없이 시끄러운 곳에서 길거리 연주를 듣고, 달콤한 음료를 마시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행사가 즐거웠다.
이따금 귀족 사회에서 주최되는 사교 파티나 무도회도 마냥 귀찮지는 않았다. 현악기의 선율에 맞추어 마음에 드는 남자와 사뿐사뿐 춤을 추는 일도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정반대로 카에드는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장소를 선호했다. 타인과 어울려 떠드는 것보다 홀로 정적인 시간을 보내는 일이 더 생산적이라고 믿는 듯했다. 세라엘이 아는 한은 그랬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질색하는 사람한테 동행을 제안할 수는 없지.’
혹여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축제에 함께 가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려던 다짐이 연기처럼 흐려졌다. 애초에 공사다망한 대공작에게 한가로이 축제나 가서 놀자고 물으려던 것도 철딱서니 없는 판단이었다.
“굳이 그런 장소에 가야 한다면 이유는 하나뿐이겠죠.”
이어진 저음이 아니었다면 계속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네?”
“한나절까지는 어렵겠지만 일정은 충분히 비워 둘 수 있습니다. 내주 첫 번째 평일에 갈 예정이라고 했습니까?”
세라엘은 곧장 답하지 못하고 얼이 빠져 있었다.
뒤늦게 질문을 이해하고 나서야 그녀의 입가에 둥근 곡선이 그려졌다.
유달리 혈색 짙은 입술이 옆으로 벌어지면서 하얀 치아가 드러나는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색정적이었다.
저것 하나를 보려고 그간 개처럼 일만 했나, 무심코 생각한 카에드가 홀린 듯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쓸었다.
세라엘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않고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저랑 겨울 축제에 함께 가실 거예요? 사람도 많고, 엄청 시끄러운 축제에?”
“안 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호객하는 상인이 귀찮을 정도로 치근댈 수도 있고, 꼬마가 발로 찬 공이 머리를 때릴지도 모르고, 노점에서 굽는 고기 냄새가 온몸에 배서 대체 여길 왜 왔을까 후회할지도 몰라요.”
세라엘은 자신이 축제에 갔다가 겪었던 일을 하나하나 나열해 보았다.
카에드 또한 그녀가 경험담을 늘어놓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작은 공에 머리를 맞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 세라엘을 상상하니 잇새로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러다가도 세라엘에게 치근덕거리는 얼치기들을 떠올리자 팔뚝을 분지르고 싶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와 함께 가야겠다는 다짐이 한층 확고해졌다.
카에드는 그녀가 말한 자질구레한 일은 신경 안 쓴다는 듯 턱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후회할 일은 없으리라 장담합니다.”
세라엘의 만면에 웃음이 번졌다. 그러잖아도 설레던 축제가 그의 동행으로 인해 무척이나 기다려졌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여쭤볼 걸 그랬어요. 굉장히 바빠 보이시길래 엄두도 못 냈거든요.”
“다음부터는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지레짐작하지 말고 물어봐요. 사소한 일이라도 괜찮으니까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아래층에 있을 텐데.”
언뜻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빽빽하게 들어찬 일정을 가진 남자를 별것 아닌 일로 방문할 순 없었다.
뭐, 그래도 괜찮다고 하니까….
“그럼 그렇게 할게요. 대신 저를 귀찮아하시면 안 돼요.”
“귀찮을 리가 없죠.”
카에드는 나직하게 뇌까리며 웃었다. 그러곤 은근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반대로 내가 세라엘 양에게 용건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가도 괜찮겠습니까?”
“아, 음….”
세라엘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분주한 와중에도 자주 찾아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어 흔쾌히 응하기가 어려웠다.
답이 늦어지자 카에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낮은 실소를 흘렸다. 세라엘의 미적지근한 반응이 썩 달갑지 않았다. 잠자리를 요구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망설일 일인가.
카에드 모르게 그의 부하들과 쏘다닐 계획을 짠 건 귀여울 정도였건만, 단순한 허락을 구하는 물음에 머뭇거리는 태도는 꽤나 거슬렸다.
카에드는 한참 뒤에나 제시할 예정이었던 계획을 불쑥 내보였다.
“망설이시는군요. 침실을 아예 합쳐 버리면 이런 번거로운 일은 없을 텐데.”
“침실을요…?”
“자기 전에 일과를 공유할 수 있잖아요. 세라엘 양은 내게 궁금했던 점을 묻고, 나는 세라엘 양의 하루가 어땠는지 묻고. 어떻습니까?”
세라엘의 눈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사방팔방 배회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해요.”
“좋습니다. 결혼식이 끝나면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침실을 합하는 방향으로 추진해 보죠. 마침 내 집무실과 같은 층에 마스터 룸이 비어 있으니 그곳을 부부 침실로 사용하면 되겠네요. 제도에서 설계사를 불러 드릴 테니 세라엘 양의 취향대로 꾸며 보셔도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한 사람처럼 카에드는 막힘 없이 제안했다. 눈을 빠르게 깜박이던 세라엘은 문득 본성에 와서 새로이 생긴 그녀만의 침실을 떠올렸다.
칼스비크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포근하고 따뜻한 침실에서 그녀는 아직 2주도 채 지내지 않았다.
“그러면 지금 제 침실은 어떡하죠?”
“세라엘 양이 사용 중이신 방은 그대로 유지하되 짐이나 보관하는 장소로 쓰십시오. 원하신다면 아침 단장 정도는 그곳에서 하셔도 괜찮겠네요.”
창고로 전락할지도 모를 어여쁜 침실을 떠올리며 세라엘은 다시 머리를 굴렸다.
그와 침방을 공유하는 일에 마냥 거부감이 든 건 아니었지만, 준비되지 않은 마음은 자연스럽게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다.
세라엘은 카에드의 침실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던 아침을 상기했다.
“저번처럼 대공님께서 저를 쫓아내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요? 아침마다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각방을 쓰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세라엘은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솜털이 인 그녀의 하얀 뺨에 보기 좋은 홍조가 물들었다.
그녀가 합방을 피할 변명을 이리저리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카에드는 제 뜻을 관철했다.
“그때와 같은 무례를 범할 일은 없을 겁니다.”
몇 주 내로 흥분도를 제어하는 약이 넉넉히 확보될 테니 복용량을 배로 늘릴 작정이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침실을 합치자는 제안은 작은 심술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정도 대비는 충분히 해 두었다.
“이제 세라엘 양이 날 만지고 싶으면 얼마든지 만져도 됩니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세라엘 양이 그랬잖습니까. 허락을 받아야만 나를 만질 수 있냐면서 화도 냈었고. 이제 당신이 원할 때마다 내게 손을 대도 된다는 뜻입니다.”
“아니… 저는 그때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두 볼에 오른 부끄러움이 한결 뜨거워지면서 세라엘은 말을 더듬었다.
카에드 자신은 내킬 때마다 세라엘을 안고 만지면서, 그녀는 손끝이 좀 닿았다고 잔소리하기에 서운해서 쏘아붙였을 뿐이었다.
그를 어떻게 해 보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었는데…!
“두목!”
돌연 아래층에서 누군가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라엘은 반사적으로 난간 아래를 내다보았다. 외친 이의 얼굴을 확인할 순 없었으나 카에드의 부하가 틀림없었다.
“이것 좀 읽어 보셔야겠는데요!”
걸걸한 음성이 어찌나 큰지 1층 홀에서부터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즉각적인 확인이 필요한 중요 서신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일이 생겼나 보군요. 슬슬 가 봐야겠습니다.”
카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세라엘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요.”
덩달아 의자를 밀고 일어난 세라엘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자연스레 팔을 뻗은 카에드가 세라엘의 허리를 감싸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왼팔 안에 꼼짝없이 가둬진 가녀린 몸이 살짝 휘청였다.
거리가 좁혀졌다는 자각이 들기도 전에 카에드는 상체를 굽혀 세라엘의 볼에 입술을 눌렀다.
피부에 닿았다 떨어지는 깜찍한 마찰음이 났다. 그는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높이 쳐드는 세라엘의 턱을 엄지로 어루만졌다.
“뜻하지 않게 세라엘 양의 시간을 방해했네요. 이제 훼방꾼은 갈 테니까 인체 탐구나 마저 하십시오.”
“훼방꾼이라니요.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인체 탐구 같은 건 이제 안 할 거예요….”
“하긴. 당신이 굳이 공부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대수롭지 않게 덧붙인 카에드가 다시 뺨에 입을 맞췄다. 이어 두 번, 세 번. 부드럽고 따뜻한 체온이 같은 부위에 덧입혀졌다.
카에드는 곧바로 떨어지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은 채 새가 부리로 쪼듯 계속해서 잔키스를 남겼다.
세라엘은 볼과 턱 언저리에 내리는 입맞춤을 얌전히 받으면서 그의 어깨에 슬그머니 팔을 올렸다.
‘내가 공부할 필요는 없다는 건 무슨 뜻일까.’
아까부터 문제의 책과 관련하여 카에드가 던지는 말이 절묘하게 뼈가 있는 듯했다.
그가 본 거라곤 거꾸로 뒤집힌 책의 뒤표지뿐이었다. 적나라한 제목이 아니었다면 세라엘도 특이점을 찾지 못했을 만큼 평범한 외양의 책이었다.
카에드가 이 장대한 도서관에서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책의 생김새를 일일이 파악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므로 괜한 노파심이어야만 했다.
세라엘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틀어잡았다. 그러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바퀴를 타고 번졌다.
“나도 조금 더 있고 싶은데 이만 가 봐야 해서.”
장난스레 말한 카에드가 몸을 뗐다.
“아….”
“따라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에드는 그를 배웅하러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세라엘을 저지했다.
멋쩍게 미소 지은 세라엘이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봐요.”
헤어짐이 몹시 아쉬운 사람처럼 입을 맞췄던 그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층계를 내려갔다.
바람처럼 사라진 그의 잔상을 좇던 세라엘은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반대쪽 계단에서 책 너덧 권을 왕창 끌어안은 루시가 멀거니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낯이었다.
생각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가 졸지에 애정 표현을 나누는 두 사람을 목격한 듯했다.
붕어처럼 입을 끔벅거리던 루시가 더듬더듬 발을 계단 위에 올려놓았다.
“어어… 하, 하시던 일마저 하셔요….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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