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44)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44화(44/150)
“이리 와, 루시. 다 끝났어. 대공님은 이미 내려가셨고.”
투명 인간이랑 뽀뽀를 마저 하라는 거니. 루시만큼이나 붉게 상기된 세라엘이 말했다.
무안한 표정으로 다가온 루시는 책상 위에 책을 와르르 내려놓으면서 멋쩍게 웃었다.
“아가씨와 대공 전하를 볼 때마다 다들 넋두리를 늘어놓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아요.”
“공공장소에서 지나친 애정 표현을 하면 남들한테 실례긴 하지…. 대공님께선 남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서 나도 곤란할 때가 있어.”
세라엘이 쑥스럽다는 듯 중얼거리자 루시는 눈을 끔벅였다. 별로 곤란하지 않아 보이시던데. 그렇게 말하려다가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대신 세라엘 앞에 앉아 요리책 한 권을 펼치며 다정하게 웃었다.
“여기는 이제 아가씨의 집이기도 하잖아요. 어디서든 아가씨가 원하시는 대로 하실 권리가 있어요.”
발켄족 청소년들이 루시에게 충고하기를, 세라엘과 카에드의 애정 행각을 목격하거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거나 눈을 깔고 못 본 척하라고 했다.
순발력이 부족했던 루시는 둘 다 실패하고 말았지만, 다음번엔 커플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눈치 있게 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두 분께서 어디서 뭘 하시든 불평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냥 사이가 좋아 보이셔서 다들 한마디씩 보태는 것 같아요.”
“무슨 말들을 하는데?”
“흐뭇해하거나 부러워하는 반응이 대다수예요. 대공 전하 같은 분도 사랑에 빠질 수가 있구나, 싶어서 새삼 놀라기도 하고요.”
카에드가 타인에게 사랑은커녕 값싼 동정도 베풀지 못할 것처럼 냉혹해 보인다는 말을 루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자비심 없어 보이는 눈이 세라엘을 향할 때면 온 세상 달콤함을 머금은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제 눈에도 아가씨는 당차고 멋있는 사람이지만, 블카노프 대공 전하께서는 아가씨의 어떤 면을 보고 반했는지 궁금해요. …아! 이거 보세요. 아가씨가 좋아하는 과일이 들어간 디저트예요.”
말을 잇던 루시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케이크가 그려진 페이지를 펼쳐 세라엘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요리책에 적힌 다양한 레시피에 관해 뭐라 종알거리기도 했다.
세라엘은 문득 피어난 다른 생각으로 넋이 빠져 있었다.
‘그러게. 대공님은 내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을까?’
칼스비크에 오기 전부터 세라엘의 가슴속 깊이 내려앉아 있던 의문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남자가 어째서 그녀를 결혼 상대로 선택했을까.
카에드는 세라엘을 대가로 금전을 요구한 밀로즈 후작의 청을 들어주면서까지 그녀를 데려가려고 했다.
다행히 세라엘의 기지로 도리어 축의금을 얻어 오긴 했지만, 그는 무슨 이유로 막대한 돈을 지급하면서까지 그녀와 혼인을 하고 싶었을까?
세라엘은 입술을 겹쳐 물고 카에드의 체온이 닿았던 뺨을 매만졌다.
멋대로 엉킨 실타래처럼 쉽사리 풀어낼 수 없는 의문이었다.
‘아냐. 이미 지나간 일에 의문을 품어서는 안 돼.’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두고 부정적인 시야로 재고 따지는 일은 질색이었다.
되려 때마침 나타난 카에드가 아니었다면 세라엘은 노백작과 정혼하는 끔찍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카에드와 결혼을 약속하고 북부로 떠나는 결정에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세라엘은 지금 누구보다도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 카에드에게 작지 않은 호감까지 품게 되었노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 된 거지. 뭐가 문제야.’
요즘 들어 답도 없는 걱정이 조금씩 피어나곤 했다.
카에드의 오른쪽 허벅지에 자리한 존재를 보고 나서도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남녀의 교감을 몰래 공부하려다가 당사자에게 들킬 뻔했다.
아찔했던 상황을 복기한 세라엘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결혼이라는 대사를 앞두었으니 마음이 이래저래 불안정해진 탓이었다. 지금 같은 때에 도움 하나 안 되는 의혹을 되새겨 봤자 좋을 것도 없었다.
세라엘은 예고 없이 싹을 피운 의구심을 다시 꼭꼭 파묻으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갈무리했다.
***
그 무렵, 수도 힌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중부 지방.
투구부터 발끝까지 빛나는 은색 갑옷을 차려입은 중기병과 육중한 마차가 흙길을 전속력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려 여섯 필의 말이 이끄는 붉은 마차는 높이 솟은 천장 장식과 문짝, 바퀴까지 금박으로 덧입혀져 있었다.
어린애가 보더라도 탑승인이 매우 존귀한 인물임을 알 수 있는 화려한 마차였다.
차내에는 푸른빛이 도는 은발의 남자와 암적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차창의 커튼을 걷어 밖을 살피던 여자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 괜찮을까요? 블카노프 대공에게 기별도 넣지 않은 방문인데.”
팔짱을 낀 남자는 입술을 치켜세우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기별이라면 몇 번이고 넣었다.”
피처럼 붉은 남자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모조리 거절당했을 뿐이지. 결혼식이 머지않았으니 방문할 예정이라면 하객의 신분으로 오라더군. 제기랄! 건방진 인간 같으니라고….”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성내에서 대공사 중이라던데 손님맞이가 신경 쓰였나 보죠.”
여자가 심상한 말투로 중얼거리자 남자는 버럭 윽박질렀다.
“감히 어디서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이냐. 누누이 말하지만 너도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으득 이를 간 남자가 매서운 음성으로 재차 쏘아붙였다.
“예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네가 완수해야 할 임무나 되새기고 있어. 실패하면 너도 네 어미 꼴이 날 수도 있으니까.”
이복동생이라지만 피를 나눈 남매에게 건네는 언사가 몹시 무례했다.
화를 낼 만도 하건만, 여자는 으름장에 한숨만 쉴 뿐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북방을 향해 내달리는 마차 위에는 묘한 문장이 그려진 깃발이 바람을 따라 펄럭이고 있었다.
교차된 검 두 개를 칭칭 감은 흰 비늘을 지닌 붉은 눈의 독사. 그것은 로페른 제국을 다스리는 비아테 황가의 문장이었다.
***
“비가 한바탕 오려나 봐요.”
아침부터 줄곧 창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던 루시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릴리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고 있던 세라엘도 덩달아 창밖을 살폈다.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하늘은 사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소나기라도 쏟을 기세였다.
정오인데도 느지막한 저녁처럼 컴컴했으며, 간간이 천둥 같은 울림까지 느껴지면서 비가 내리기 전의 전조를 보였다.
“아마 아닐 거야. 나도 칼스비크에 처음 와서는 흐린 하늘을 볼 때마다 비가 올 줄 알았는데 아닌 적이 더 많았어. 북부에는 이런 날이 종종 있나 보더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루시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엘도 장담할 순 없었으나 그녀를 낙담시키고 싶지 않아서 건넨 위안이었다.
“그래도 아가씨 결혼식 날에는 날씨가 화창해야 할 텐데요. 식장이 야외에 있어서인지 변수가 있을까 봐 걱정이에요.”
불안감을 드러낸 루시가 잇달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식이 이 주일밖에 남지 않은 까닭에 루시뿐 아니라 다들 입만 열면 결혼 얘기였다.
어린 하녀들은 둘 이상 모였다 하면 예비 대공 부부의 결혼식에 관해 속닥거렸고, 세라엘은 사용인을 만날 때마다 결혼 축하 인사를 받았다. 얼마 전 안면을 튼 사서 알버트는 결혼 선물이라면서 흥미로운 소설책 몇 권을 들고 찾아왔다.
오늘 아침, 주문 제작한 웨딩드레스가 도착하고 나서야 결혼식을 향한 실감이 정점을 찍었다.
가슴 윗부분과 두 팔을 과감히 드러낸 민소매 드레스는 세라엘이 보기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가슴선을 따라 세심하게 커팅된 작고 투명한 보석이 수백 개는 박혀 있었는데, 빛을 조금만 받아도 오색찬란하게 반짝이면서 눈을 뗄 수 없게끔 했다.
화려함을 상체에 치중한 만큼 치맛자락은 동그랗게 부풀리지 않고 자연스레 늘어뜨린 디자인이 세라엘에게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아직 입어 보지도 않았건만 루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 신부가 그려진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다행인 점은 실외여도 비를 맞을 일이 없다는 거지.”
릴리가 냉큼 거들었다.
“아가씨도 들으셨죠? 대정원에서 공사 중이었던 유리온실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걸요.”
“너희가 매일같이 알려 주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세라엘은 지난날의 릴리와 루시를 떠올리면서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릴리는 뻐꾸기시계처럼 유리온실 공사의 진행 상황을 꾸준히 보고해 왔다.
“오늘은 온실 바깥에 놓을 석조 기둥 장식이 완성되었대요.”
“오늘은 천장에 싱그러운 풀을 엮은 샹들리에를 달았대요.”
“유리온실이 어찌나 거대한지 그 안에 서면 하찮은 잡초가 된 기분이에요.”
가끔가다 감상도 덧붙이면서 세라엘에게 매일매일 조잘거렸다.
대공성에 살게 된 루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뻐꾸기 활동에 합류했다.
“온실 내부가 요정님이 살 것처럼 화사하게 꾸며졌어요. 아가씨를 잘 아는 사람이 디자인해서 만든 느낌이더라고요.”
“대공님께서 그런 찬란한 예식장을 만들 생각을 하시다니 아가씨를 정말 사랑하시나 봐요.”
전해 듣기만 했던 결혼식을 위한 공간이 얼추 완공되었다는 말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이제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이 정해진 날짜에 도착하면 카에드와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될 것이다.
“유리온실도 내일모레면 완공이 된다잖아요. 예식이 코앞이에요, 아가씨.”
릴리가 세라엘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며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살며시 속삭였다.
“목에 남은 자국도 사라졌으니, 이제 하객도 무리 없이 맞이하실 수 있어요.”
세라엘은 검지를 얼른 입술에 갖다 댔다.
“쉿…! 루시가 들으면 안 돼.”
루시가 대공성에 도착하던 밤이었나.
그날 밤 세라엘은 카에드와 나눴던 진한 접촉의 여파로 몸에 자국이 남았으리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다. 유일한 가족과도 같았던 하녀와 막 재회한 터라 들떠 있던 탓이었다.
알아차렸던 시점은 다음 날 아침, 옷을 갈아입혀 주던 릴리가 몹시 당황하기에 거울을 봤을 때였다.
세라엘의 빗장뼈와 목 언저리에 카에드가 영역 표시처럼 새겨 넣은 울긋불긋한 흔적이 선명하게도 피어 있었다.
루시는 이미 도착 첫날부터 그녀의 울혈 자국을 목격했고, 두 남녀가 이런저런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부끄러워할 세라엘을 위해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릴리에게만 들켜서 다행이었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세라엘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낯뜨거워서 혼났어. 대공님이 또 이런 자국을 남기려고 하면 바로 머리를 밀어내고 주의시켜야겠어.’
부부로서 침실을 같이 쓰기 시작하면 그것보다 더한 상황도 올 텐데 어쩌려나….
‘그때쯤이면 나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일찌감치 준비가 끝난 카에드를 떠올리며 세라엘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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