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46)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46화(46/150)
세라엘은 말없이 속눈썹을 깜박였다.
카에드에 비하면 그녀는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수준이라, 도리어 시간을 내어준 쪽은 그일 텐데도 세라엘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좋아요.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카에드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서 세라엘의 손을 맞잡았다.
“다행입니다.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그녀는 턱을 짧게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은 바깥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본성 문을 열어젖히자 앞뜰에서 육중한 흑마 한 마리가 의연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비단결처럼 매끈하고 검은 털을 가진 말은 고삐와 안장 등 당장이라도 승마할 수 있는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세라엘은 설명을 묻듯 카에드를 올려다보았다.
“성 밖으로 나갈 겁니다.”
간단히 대답한 그가 세라엘을 말 가까이 잡아끌었다.
“성 밖으로요?”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카에드는 세라엘을 번쩍 안아 들어 안장 위에 앉혔다.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성인 여성의 몸을 우습게 들어 올리는 힘에 놀랄 새도 없었다.
어디를 잡거나 기댈 곳도 없이, 움직이는 생명체 위에 덩그러니 오른 세라엘이 당황하여 크게 헐떡였다.
“어어…!”
등 뒤로 카에드가 훌쩍 올라타는 기척이 느껴졌다. 직접 보지 않아도 사방팔방 휘청이는 그녀와 달리 산뜻한 동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세라엘은 말의 목덜미에 살짝 두 손을 올렸다. 푸르릉, 투레질을 한 흑마가 갈기를 한번 털었다. 순식간에 균형을 잃은 세라엘이 울상을 지었다.
“세라엘 양.”
뒤에서 불쑥 커다란 손이 나와 기우뚱거리던 세라엘의 한쪽 허리를 잡아 지탱해 주었다.
“말을 타 본 적은 있습니까?”
“아뇨.”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단언하는 어조에 조금 빈정이 상한 세라엘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어렸을 때 망아지를 한 번….”
별안간 말이 요란하게 울음소리를 냈다. 거친 군마의 등에 앉은 사실이 다시금 의식되자 그녀는 긴장하여 말꼬리를 흐렸다.
꼴사납게 보이고 싶지 않아 다시 분명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입술을 움직였다.
“어렸을 때 망아지를 탄 적은 있어요.”
내뱉고 나니 결국 망아지라는 앙증맞은 단어 때문에 꼴사납게 보였을 것 같았다. 세라엘은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카에드가 고삐를 쥐기 위해 손을 내밀자 간격이 바짝 가까워졌다. 그는 부드러운 숨결이 어린 음성으로 속삭였다.
“무척 사랑스러웠겠군요.”
“망아지가요?”
“아니. 망아지를 탄 세라엘 양이요.”
말이 가볍게 제자리걸음을 하자 세라엘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중심을 잡기 위해 오뚝이처럼 몸을 흔드는 세라엘을 보며 카에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듣는 이마저 기분 좋게 하는 시원한 웃음이라 세라엘도 얼결에 따라 웃었다.
그러다 냉큼 정색했다. 누군 말에서 떨어질까 봐 무서워 죽겠는데 등 뒤의 남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우와… 오늘따라 왜 이러시지. 다짜고짜 초보자를 말에 태워 놓고서 비웃으시는 거예요?”
“화내지 마십시오. 너무 귀여워서 그랬습니다.”
카에드는 더 가까이 밀착하여 세라엘의 상체를 지탱해 주었다.
이어 한 팔로 그녀의 등허리를 끌어안는 걸 보니 그냥 세라엘을 안고 싶어서 다가온 듯했다.
“안지 마세요.”
세라엘은 카에드를 팔꿈치로 밀어내며 뽀로통히 쏘아붙였다. 무방비 상태에서 그의 팔뚝이 가슴 바로 아래를 감싸고 있어 기분이 이상했다.
피실 웃으면서 순순히 상체를 뗀 그가 예고 없이 고삐를 흔들었다.
출발 신호에 말이 터벅터벅 움직이면서 세라엘의 몸도 위아래로 마구 휘청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뒤로 뻗어 카에드의 허벅지를 짚으려 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오른쪽은 안 돼!’
그곳에는…! 새하얗게 질린 세라엘이 필사적으로 손을 물렸다.
갈 곳 없어진 그녀의 오른손이 황망히 허공을 배회했다.
잔뜩 벌린 다섯 손가락에서는 그녀가 조금 전 어딘가를 짚으려 했다는 의도가 다분히 묻어나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카에드가 무거운 숨을 내리 쉬며 침묵을 유지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세라엘은 묘하게 경직된 공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버둥대는 몸을 따라 시야와 호흡이 모두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녀는 온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뺐다간 나풀거리는 몸이 금세 땅에 떨어질 것 같았다.
그제야 짐짓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세라엘의 귓바퀴에 번졌다.
“그렇게 어깨를 긴장시키면서 무게 중심을 잡으면 나중에 근육통이 올 겁니다. 몸에 힘을 빼고 나한테 기대 봐요.”
“…….”
“세라엘.”
“네, 네? 못 들었어요. 너무 긴장해서….”
“어깨에 힘을 빼고 뒤로 비스듬히 기울여 봐요.”
“…이렇게 하면 되나요?”
세라엘은 목만 살짝 젖히면서 불편한 자세를 유지했다. 곧바로 단호한 지시가 떨어졌다.
“더 가까이 와요.”
“…….”
“조금만 더.”
소극적으로 움직이던 세라엘은 될 대로 되라 싶어 상체를 완전히 기울여 그의 품에 안겼다.
가감 없이 체중을 실어도 꿈쩍하지 않는 남자의 묵직한 몸은 무척 안정적이었다.
“이렇게요?”
“잘했습니다.”
그저 얌전히 기댔을 뿐인데 카에드는 대견하다는 듯 칭찬을 해 주었다. 어린아이에게 상을 주는 것처럼 그녀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떨어트렸다.
카에드에게 안지 말라 해놓고 도리어 세라엘이 안기게 된 상황이 자못 겸연쩍었다.
그녀는 괜히 볼멘소리를 냈다.
“말이 아니라 마차를 타는 편이 좋았을 것 같아요.”
“많이 불편하십니까?”
“아뇨…. 불편하진 않아요.”
“그럼 겁먹으신 거군요.”
겁쟁이 취급을 받자 세라엘은 벌컥 역정을 냈다.
“굳이 강조하지 마세요. 지금 제 모습이 용감해 보이지는 않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승마 연습이라도 해 놓을 걸 그랬어요.”
호감이 있는 남자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휘청거리는 꼴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와 나란히 말을 타고 가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하기야 카에드도 세라엘이 말을 타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 한 마리만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귀부인은 몸소 말에 오르는 일이 드물 테니 그리 판단한 걸까?
“지금 가는 곳에는 포장된 도로가 없어 마차가 들어서기 어려울 겁니다. 무서워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대체 어디로 가시기에… 앗!”
흑마는 약간 속도를 내면서 들판처럼 너른 앞뜰을 가로질렀다. 세라엘은 카에드의 팔목을 잡은 채 그의 품에 얌전히 몸을 내맡겼다.
도개교를 건넜을 때쯤 그가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조만간 말을 타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경황없는 와중에도 세라엘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요? 언제요?”
“결혼식이 지나고 나면 언제든지요. 혹여 세라엘 양이 낙마하거나 부상을 입어 식이 미뤄지는 불상사가 생기면 안 되니까요.”
카에드와 어울리지 않는 노파심에 세라엘은 짧게 웃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망아지를 타던 기억을 더듬어서 열심히 배워 볼게요.”
“구보는 어렵겠지만 가벼운 평보를 목표로 한번 배워 보시면 좋겠네요.”
세라엘은 형편없는 균형 감각을 간파당한 것 같아 볼을 부풀렸다.
“하지만 저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은걸요. 남들은 잘만 타는 말 위에서 바보처럼 버둥거리고 싶지 않아요.”
“나는 세라엘 양이 버둥대는 모습을 더는 보지 못한다니 아쉬운데.”
농담조로 던진 말인 걸 알면서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세라엘은 대꾸 대신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하루라도 빨리 결혼식을 치르고 싶어요.”
승마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내뱉고 나서야 결혼식을 기다려 마지않는 어조로 들리겠다는 자각이 따라왔다.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카에드는 세라엘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서로 다른 의미일 텐데도 세라엘은 구태여 정정하지 않았다.
멀찍이 언덕 아래에 있는 대공성의 정문을 나선 뒤에 말은 더 빠른 구보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기를 실은 저녁 바람이 세라엘의 뺨을 스치며 제법 얼얼한 자취를 남겼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오지 않았더라면 다소 버거웠을 추위였다.
비탈진 땅을 내려오자 넓게 트인 벌판과 가운데 잿빛 자갈이 깔린 길이 나왔다. 그 길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크고 작은 벽돌집이 자리한 마을이 하나 있었다.
찌를 듯 높은 건물은 많지 않았으나 제법 큰 마을이었다. 덕분에 세라엘은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도 안을 엿볼 수 있었다.
우물에서 식수를 긷는 여인과 염소를 끌고 지나가는 농부, 무리 지어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저 마을 어귀에 겨울 축제가 열리는 대도시로 이어지는 다리도 있다고 했다.
자갈길 왼편에는 아득한 산맥을 뒤로 한 채 끝모르게 펼쳐진 침엽수림이 보였다.
하늘에 닿을 듯 치솟은 교목들이 어찌나 키가 큰지, 멀리서도 느껴지는 웅장함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포장된 도로로 가지 않을 거라 했으니 마을이 아닌 저 숲을 향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세라엘은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다.
깎아내린 듯 가파른 절벽 위에 우두커니 선 블카노프 성채가 으리으리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저 높은 성안에서 굽어만 보던 광활한 땅 위를 작은 점이 되어 내달리고 있다. 새삼스러운 의식과 함께 카에드가 다스리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와닿았다.
예상대로 흑마는 기다란 교목이 울창하게 우거진 숲을 향해 질주했다.
숲의 입구에 들어섰을 즈음엔 해가 완전히 저물고 사위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은 숲길을 여유롭게 걷다가 갈림길 앞에서 멈추었다.
카에드는 안장에서 먼저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세라엘의 팔 아래에 손을 넣고 안아서 내려주었다.
스스럼없는 접촉에 세라엘은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고마워요.”
그녀는 헝클어진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 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사방을 은은하게 내리비추고 있어 어두운 숲속을 무리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밤 벌레 울음소리만이 맴도는 고요한 숲 속엔 하늘 끝까지 뻗은 길쭉한 나무들이 가득했다.
사람의 자취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이 숲은 벌목되거나 크게 훼손된 부분 없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웅장한 규모였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처연한 공기가 감도는 숲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세라엘은 갈림길로 다가갔다.
길 바로 앞에는 암갈색 나무로 만들어진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는데, 웃자란 덩굴 식물이 이정표를 가리고 있어 뭐라 적혀 있는지 읽을 수 없었다.
“흐음…. 마을에서도 멀지 않고, 숲 한가운데에 이정표까지 있는 걸 보면 사람들이 자주 왕래했던 모양인데.”
덩굴을 걷어 보려다가 뾰족한 가시를 보고 손을 물린 세라엘이 카에드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희한하게 지금은 걸음이 뚝 끊긴 느낌이네요.”
“…….”
카에드는 세라엘을 말에서 내려 준 순간부터 그 자리에 못 박은 듯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의중을 읽어 낼 수 없는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공님?”
달빛을 내리받은 카에드는 미동이 없었다. 선이 뚜렷한 그의 목젖이 파도처럼 한번 너울거릴 뿐이었다.
“카에드 님.”
세라엘은 좀 더 또렷한 발음으로 소리 내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에드는 그제야 세라엘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발광하는 산짐승의 눈동자처럼 그의 황금색 홍채에는 이상하리만큼 형형한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머뭇거리던 세라엘이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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