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47)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47화(47/150)
말없이 이질적인 시선을 던지는 카에드를 보자 세라엘은 턱을 갸웃했다. 그녀는 카에드의 눈길이 박혀 있던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둥그스름한 보름달이 느리게 부유하는 구름에 절반쯤 가려져 있었다.
‘보름달 때문인가?’
20년을 훌쩍 넘어 어렴풋해진 기억 속에서 세라엘은 어떠한 사실을 번개처럼 떠올렸다.
바로 늑대의 피를 이어받은 발켄족은 보름달이 뜨는 밤에 유달리 난폭해진다는 것이었다.
죽고 죽이는 장면이 전부였던 작중에서는 카에드가 만월에 거칠어지는 발켄의 기질을 이용해, 수백 번 넘게 이어진 전쟁에서 곧잘 승전보를 남겼다는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늑대화에 관해 아는 정보는 그게 전부였다. 애초에 로맨스 한 줄 없던 글에서 다른 특징은 묘사되어 있지 않았고 행간에서조차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세라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카에드의 안색을 살폈다.
‘폭발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눈앞의 남자는 허연 달빛을 내리받고도 포악한 기운을 내비치지 않은 채 가만히 세라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느리지만 크게 들썩이는 가슴은 그가 무언가를 강하게 내리누르고 있다는 걸 나타냈다.
“몇 년 전부터 괴악한 소문이 돌면서 사람의 발길이 끊겼습니다.”
뒤늦게 대답을 내놓는 카에드의 저음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세라엘의 목덜미에 소름이 약간 일었다.
몇 발짝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세라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소문이었는데요?”
“숲에서 나타난 늑대 무리가 길 잃은 이를 해치고, 어린아이와 처녀를 잡아먹는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아….”
세라엘은 방목하여 기르는 늑대만 수백이라던 그의 말을 떠올렸다.
“당연히 헛된 소문이었겠죠?”
얼핏 그녀의 눈에 비치는 불안감을 읽어낸 카에드가 천천히 숨을 내리 쉬었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내 늑대들의 울음소리에서 기인한 소문입니다만… 물론 아닙니다. 방목 중인 늑대들은 명령 없이 사람을 해칠 수 없도록 훈련되어 있고, 민가 근처로는 절대 내려오지 않습니다.”
명령이 떨어지면 얼마든지 사람을 해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카에드가 세라엘은 물론이고 선량한 영지민을 죽일 일은 없으리라 확신했다.
세라엘은 적적한 숲 속을 새삼스럽게 두루 살펴보았다.
“인적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유가 있었네요. 참 끔찍한 소문이에요.”
“그런 괴담이 도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늑대는 간악하고 길들일 수 없는 야수라는 인식이 보편적이니까요.”
독백하듯 중얼거린 카에드가 갈림길 한편을 눈짓했다.
“좀 걸을까요?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은 건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차분하게 먼저 걸음을 옮기는 카에드를 세라엘은 총총 따라나섰다. 푸른 잔디가 깔린 숲길에 발자국을 새기자 사박사박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시선을 올리자, 높은 침엽수의 나뭇잎 틈으로 듬성듬성 새겨진 별과 부연 빛을 내는 보름달이 보였다.
‘너무 예쁘다.’
세라엘은 반걸음 정도 앞서 걷는 카에드의 측면 얼굴을 흘깃 엿보았다. 그러다 머뭇머뭇 팔을 뻗어 그의 손끝을 잡았다.
카에드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제 손을 보았다가 시선을 올려 세라엘과 눈을 맞췄다. 곧 다물린 입가를 끌어 올리면서, 마디만 살짝 쥔 세라엘의 손에 깍지를 껴서 마주 잡았다.
두 사람은 달의 어슴푸레한 빛줄기가 늘어진 숲의 지표면을 한가로이 거닐었다.
한밤중에 세라엘 혼자 걸었더라면 두려웠을 숲길은 카에드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낭만적인 정취를 자아냈다.
불현듯 세라엘의 눈앞에 몹시도 작은 불빛 하나가 휙 스쳐 지나갔다.
“어?”
눈길은 반사적으로 불빛을 좇았다. 샛노란 빛을 내는 그것은 자그마한 반딧불이였다. 느린 속도로 공중을 날던 반딧불이는 세라엘을 유인하는 것처럼 허공에서 총총한 곡선을 그렸다.
그렇게 세라엘의 관심을 즐기면서 작달막한 별빛처럼 반짝이다가 무성히 자란 수풀 너머로 모습을 휙 감추었다.
나무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으나 반딧불이가 사라진 방향에서 은은한 불빛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세라엘은 홀린 듯 반딧불이를 쫓아 걸음을 내디뎠다. 이어 마주하게 된 풍경에 감탄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어머나…!”
둥근 달이 완연히 자태를 드러낸 보랏빛 밤하늘 아래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잔잔한 바람을 따라 넘실대는 푸른 물결은 저 멀리 수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으슥한 침엽수림의 어딘가 초목에 둘러싸인 호수가 자리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라엘의 이목을 사로잡은 건 달빛을 머금은 호수가 아니었다.
너울거리는 수면 위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며 영롱한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불티처럼 하늘을 향해 날렸다가, 나비처럼 사뿐히 제자리를 맴돌기도 했다. 느릿느릿 점멸하는 수천 개의 불빛은 세라엘의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을 물들였다.
금가루가 쉴 새 없이 흩날리는 듯한 이 찬란한 모습을 투명한 호수의 수면이 거울처럼 가감 없이 반영하고 있었다.
세라엘은 살아오면서 이렇게나 찬란하고 황홀한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넋을 빼놓고 있는 그녀의 손을 카에드가 잡아끌었다. 그는 제 망토를 벗어 호숫가 잔디밭에 깔아 자리를 만들었다.
세라엘은 그 위에 엉덩이를 붙이면서도, 수면과 허공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빛의 향연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여름밤에나 볼 수 있는 반딧불이를 이런 숲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북부인은 이곳이 요정이 사는 호수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늑대가 있다는 괴소문에도 불구하고, 요정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서 방문하는 이도 드물게 있다더군요.”
“그렇구나….”
세라엘은 무수히도 많은 불빛의 경이로운 움직임을 마법에 홀린 사람처럼 관망했다.
반딧불이란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카에드의 말마따나 요정이 사는 호수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눈부신 장소는 처음 봐요. 드넓은 영지니까 당연히 어딘가에 아름다운 곳이 존재할 텐데, 칼스비크는 마냥 춥고 삭막할 거라는 편견이 있었어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아요. 대공님은 이곳에 자주 오시나요? 달빛이 내리는 숲길도 걷고, 예쁜 반딧불이 호수도 구경하러?”
카에드는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양 눈을 내리깔고 피실 웃었다.
“그럴 리가요.”
문득 세라엘은 아주 어렸을 때 친모가 침대맡에서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하나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어 본 적이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카에드를 응시했다.
“제국 어딘가에 요정이 나오는 호수가 비밀처럼 꼭꼭 숨겨져 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요. 설마 그게 이 호수인가?”
“…그런가 보군요. 내가 알기로 소원을 들어주는 전설을 가진 호수는 로페른에서 이 멜리 호수가 유일합니다.”
“세상에. 이따 가기 전에 잊지 말고 소원을 꼭 빌어야지. 이런 장소는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
숲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긴 해도, 대공성에서 멀지 않으니까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걸까?
카에드는 대답 대신 흥분을 숨기지 못하는 세라엘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치솟는 호기심을 이겨 내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예전에 대공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뭐였습니까?”
“대공님이 산책을 좋아하신다는 얘기였어요. 그게 사실이에요?”
칼스비크로 오기 전에 루시가 전해 주었던 그의 의심쩍은 소문 하나를 입에 담았다.
당시엔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남자가 무슨 산책을 좋아한다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치부했었다.
연달아 이어지는 엉뚱한 질문에 카에드는 짧게 헛웃음을 쳤다.
“대체 어디서 들은 소문인가요?”
“예전에 루시에게서 전해 들었어요. 특히 정원을 느긋하게 걸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걸 아주 좋아하신다고…. 수도에서부터 공공연히 퍼진 이야기라고 하던걸요.”
“헛소문이 나돌고 있었군요. 한가롭게 거닐면서 시간 낭비를 할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시간을 종종 낭비하는 세라엘은 뜨끔하여 속눈썹을 빠르게 깜박였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감도는 숲의 깊은 적막 속에 남자의 음성이 더해졌다.
“하지만 틀린 이야기는 아니군요.”
정면으로 눈길을 돌린 그가 말을 이었다.
“드물긴 해도, 정처 없이 걷고 싶을 때가 있기는 합니다.”
“정말요? 예를 들면요?”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고민이 있을 때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듭니다.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걷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어리석은 기대를 하면서요.”
예상하지 않았던 솔직한 토로에 세라엘은 내심 당황했다.
그가 착잡한 얼굴로 머리를 싸매고 근심하는 모습이 쉽사리 그려지지 않았다.
냉엄해 보이는 겉모습처럼, 뭐든 단칼에 결정을 내리고 고뇌 따위는 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는데.
세라엘의 마음속 동요를 알아챈 남자가 장난스레 반듯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전혀 믿지 않는 눈치네요.”
“그렇다기보다, 대공님은 고민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어 보여서요.”
카에드는 대꾸하지 않았다. 묵묵히 세라엘을 바라봤지만, 답을 내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세라엘을 대공성에 데려온 뒤로 수도승이나 겪을 고행에 곧잘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구태여 하지 않았다.
보름달이 뜨는 오늘 밤, 그녀를 만나기 위해 흥분을 가라앉히는 약을 평소 복용량의 몇 배로 취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오래도록 안정적인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쉴 틈 없이 비어져 나오는 욕구를 강하게 억눌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세라엘은 침묵을 고집하는 카에드에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루시가 말해 준 소문이 또 있었지.’
오래지 않은 기억을 헤집어 보니 조금씩 선명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카에드의 출중한 용모에 반한 여성들이 줄을 지어 구애한다는 소문이었다.
명예와 겉치레를 중시하는 귀족들이 표면적으론 양자 출신에 추문까지 도는 남자에게 혼담을 넣을 정도면 그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한다는 뜻이었다.
‘알려진 사람만 해도 여럿이라고 했어.’
루시가 읊어 주었던 이름들 사이에서 불현듯 단 하나의 이름이 또렷해졌다.
아니, 이름이 아니었다. 카에드에게 구애했던 여성 중에 분명 제국의 황녀도 있다고 했다.
황족 태생의 여성이 북부의 대공작에게 관심을 두었다는 소문이 제도와 거리가 있는 지역에까지 흘러들어올 정도라면.
‘그만큼 널리 알려졌다는 뜻이겠지.’
미묘한 불쾌감이 치솟았으나 세라엘은 서둘러 찝찝한 감정을 떨쳐 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질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그때 카에드가 손을 뻗어 풀밭 위에 놓인 세라엘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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