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48)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48화(48/150)
“세라엘 양은요?”
상념에 빠져 있던 세라엘은 손등을 덮는 체온과 불쑥 찾아든 질문에 현실로 돌아왔다.
“네?”
“세라엘 양도 고민을 합니까?”
세라엘은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입술에 허탈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요. 저도… 저는 굉장히 자주 고민하는 편이에요.”
온점을 찍자마자 카에드의 눈에 불안한 빛이 스쳤다. 세라엘의 손등을 잡은 큼지막한 손이 찰나에 미세하게 떨렸다.
카에드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어떤 고민입니까? 성에 머물면서 불편한 점이라도 있었나요?”
“불편한 점이요?”
세라엘은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늘렸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남자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런 게 아니에요. 불편한 점이 있을 리가 없죠. 매일같이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는걸요.”
“그럼 고민하는 이유가 뭡니까? 설마 어디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닌가요? 빌어먹을, 역시 열네 시간이나 잤던 건 우연이 아니었군요.”
난데없는 원색적인 욕설에 세라엘은 입을 다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이마를 짚었다.
그의 두 뺨을 부여잡고 그건 그냥 늦잠을 잔 것뿐이라고 큰소리로 일러주고 싶었다.
“진정하세요. 거창한 고민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공연히 수줍어진 그녀는 제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얼마 전 이삿짐 정리를 할 때, 옷을 색깔별로 정리할지 계절별로 할지 고민했어요. 여름옷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니까 몇 초 만에 해결되었고요.”
세라엘은 계속해서 시시한 고민을 늘어놓았다.
“사서님께서 선물로 주신 책 중에서 무엇부터 읽어 볼지 고민하기도 했구요. 어제 잠들기 전엔 어떤 차를 마실까 하다가 그냥 사과주를 한 잔 마셔 버렸어요. …앗, 자기 전에 술 마시는 건 비밀이었는데. 아무튼, 제가 하는 고민은 정말 사소해요.”
세라엘은 제 무릎에 턱을 기댄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에 칼을 들이밀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처럼 빈틈없어 보였던 남자가 허망한 낯을 하고 있었다. 왜인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그녀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이내 카에드는 느릿느릿 제 눈썹을 문질렀다. 허탈한 숨을 뱉으면서 입꼬리를 올리는 걸 보니, 세라엘의 근심이 너무나 하찮아서 안심되는 모양이었다.
세라엘은 꿈꾸듯 중얼거렸다.
“대공님도 고민이란 걸 하신다니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져요.”
카에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난 그런 고민은 하지 않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산통이 깨진 세라엘이 멍한 눈을 했다. 그러나 기죽지 않고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사실 저도 어엄청나게 심각한 걱정거리를 하나 가지고 있거든요.”
“흐음….”
앞서 보잘것없는 고민을 듣고 난 직후라 카에드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세라엘의 손을 꼭 잡으며 정중하게 물었다.
“세라엘 양의 걱정이라면 내 걱정이기도 합니다. 무엇인지 알려 줄 수는 없겠습니까?”
“절대 안 알려 줄 거예요.”
세라엘은 새초롬하게 중얼거렸다. 바로 결혼식과 더불어 당신과 보낼 첫날밤이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세라엘을 고뇌하게 만든 존재를 가진 남자에게 털어놓기에는 너무나 낯부끄러운 주제였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이런 문제는 고민이라 치부할 수도 없겠지.’
칼스비크에 오기 전에는 지금과 결이 다른 사념들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비애와 무신경한 부친을 향한 씁쓸함, 세라엘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 의붓어미에 대한 울분에서 기인한 사념이었다.
부친의 사업에서 불거진 빚 때문에 예순이 넘은 노인에게 팔려 갈 예정이라는 걸 알았을 땐, 종잡을 수 없는 인생의 방향을 두고 크게 근심했었다.
세라엘은 두 팔로 무릎을 꼭 끌어안으며 턱을 기댔다. 과거를 돌이키니 새삼 감회가 남달랐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리도 무서워했던 남자와 북부로 떠나고, 반딧불이 너울거리는 호수 앞에서 다정히 붙어 앉아 낭만을 즐기리라 짐작이나 했을까.
그녀는 샛노랗게 반짝이는 은하수가 눈앞에 펼쳐진 듯한 황홀경을 바라보며 회고에 젖었다.
‘언젠가 오늘 밤을 돌이켜 볼 날도 오겠지. 그때쯤이면….’
세라엘은 생각의 꼬리를 흐리면서 미소 지었다.
“어쨌든 걱정하지 마세요. 덕분에 저는 모자람 없이 지내고 있어요. 매일 맛있는 식사도 하고….”
“늦잠도 자고.”
감미로운 저음이 말허리를 빼앗아 대신 이었다. 그녀는 원망 어린 눈으로 카에드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참,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해 주시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공님이 언급하실 때마다 제가 엄청난 게으름뱅이가 된 기분이거든요.”
세라엘은 제법 엄한 표정을 꾸며냈다. 안타깝게도 그의 눈엔 심술부리는 아기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열네 시간이나 곯아떨어진 건 정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굉장히 정상이에요.”
세라엘은 다시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 행복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잘 자는 법이거든요.”
카에드는 눈을 내리깔고 세라엘의 하얀 손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녀로서는 늦잠 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던진 말이었을지 몰라도, 카에드에겐 무엇보다 큰 의미로 다가왔다.
세라엘이 칼스비크에서 무탈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만큼 안심되는 일이 있을까. 안온한 행복이야말로 그녀에게 가장 안겨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반면 카에드는 어떻던가. 일평생 평온한 잠을 청해 본 적 없는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행복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텅 빈 마음속은 언제나 공허했다. 그럼에도 여유가 비집고 들어올 틈은 물론 타인을 위해 내어줄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비극의 끝을 달리는 인생에 허덕이다 제 손으로 목숨을 끊는 말로까지 경험했다.
그런 이가 기적처럼 두 번째 삶을 선사 받았다 한들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카에드는 반짝이는 호수보다도 아름다운 눈을 가진 그녀를 응시했다.
자신처럼 비참한 인간도 세라엘을 보고 있노라면 기쁨이 무엇인지 사무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카에드는 무수히 많은 불빛이 아른거리는 이 호수를 처음 눈에 담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사사로운 감정을 누릴 여유가 없던 그에게는 무미건조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같은 공간은 지금 옆에 자리한 작은 존재와 함께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황홀경처럼 와닿았다.
그는 자신이 행복해지고자 세라엘을 신부로 맞아들인 게 아니었다. 이전 삶에서 카에드만큼이나 독한 비운에 빠져 허우적댔던 그녀가 그의 곁에서 더없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정작 메마른 그에게 숨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은 세라엘이었다.
“…그래서 가끔 카에드 님이 걱정돼요. 사람이 어떻게 한숨도 눈을 붙이지 않고 일만 할 수 있나 싶어서요.”
그의 생각을 읽지 못한 채 줄곧 푸념하던 세라엘이 입술을 움직였다.
“평소에 피곤하지도 않으신가요? 저는 수면 부족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거든요.”
“…….”
“우습지 않아요? 한 사람은 잠을 너무 많이 자고, 다른 한 사람은 전혀 자지 않아서 서로를 걱정하고 있어요.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을까.”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린 세라엘은 카에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문득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얼굴을 든 세라엘은 반딧불만큼이나 밝은 빛이 어린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보다 유독 높은 열기를 지닌 손이 세라엘의 뺨을 그러쥐었다. 화답하듯 그의 손등 위에 손을 포개자 카에드는 그대로 미약한 힘을 주어 끌어당기면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세라엘은 선선히 입술을 벌려 그가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호흡이 어지러이 얽혀들고 맞닿은 가슴에서 두 개의 맥박이 쉴 새 없이 달음박질쳤다.
입 안 깊은 점막을 적시며 뒤엉키는 입맞춤은 오래도록 이어져 그녀의 가슴 한구석을 깃털처럼 간지럽혔다.
분주한 와중에도 세라엘을 위해 시간을 쪼갠 남자가 보여 주고 싶었다는 것은 그녀가 태어나 눈에 담은 것 중에 가장 찬연하고 황홀한 풍경이었다.
이날을 추억하며 회상할 때쯤엔 우리에게 어떤 고민도 없으면 좋을 텐데.
그리 염원하며 세라엘은 그에게서 전해져 오는 눅진한 숨결을 빠짐없이 삼켜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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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 호수에 다녀온 후, 세라엘이 손꼽아 기다리던 겨울 축제에 참여하는 날이 다가왔다.
전날 밤부터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설레어 잠들지 못하던 세라엘은 자정을 훌쩍 넘기고서야 간신히 눈을 붙였다.
그녀가 잠자리에 들고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창밖에서 아득한 울림이 들려왔다. 무거운 마차와 말발굽이 구르는 울림이었다.
집무실에 있던 카에드는 장벽 너머에 주둔 중인 정찰병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하다 말고 펜을 쥔 손을 우뚝 멈췄다.
동물적인 본능은 마차가 다가오는 울림은 물론 늑대를 기르는 축사에서 들려오는 범상치 않은 울음에도 반응했다.
일반 늑대와 달리 발켄의 늑대는 좋지 못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영물이다. 서로와 소통할 때처럼 길게 하울링 하지 않고, 지금처럼 헛숨이 찬 짧은 울음을 연속해서 내는 이유는 다가오는 불청객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카에드는 서류철 위에 놓인 회중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새벽 4시를 갓 넘은 이른 시간. 결혼식 전의 모든 방문은 거절해 왔으니 이 시간에 찾아든 손님은 굉장히 무례하고 상식도 없는 인간일 것이다.
펜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누군가 집무실의 문짝을 다급히 두드렸다. 마호가니 책상 한편에 자리한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들어와라.”
입실을 허가하자 노집사가 예를 갖추며 집무실 내로 들어섰다.
카에드가 공작위를 차지한 후 베일리 부인의 추천으로 고용한 그는 고위 귀족 가문의 내정을 관리하는 데 능숙한 노인이었다.
그런 노련한 집사가 허둥지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허리를 숙인 집사가 용건을 알리기도 전에 카에드는 입을 열었다.
“정문에서 출입을 요구하는 자는 누구지?”
“아… 그것이….”
집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외알 안경을 매만졌다.
“신분패와 기장에 그려진 문장은 비아테 가문의 것이었습니다.”
“비아테?”
카에드의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황가의 기생충이 내 땅에 기별도 없이 기어들어 왔군.”
겁도 없이 여명이 트기도 전에…. 짓씹으며 중얼거린 카에드가 눈동자를 바싹 들어 올려 집사를 보았다.
살기등등한 삼백안과 눈이 마주치자 노집사는 흠칫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는 빠짐없이 전언해야만 했다.
“대동한 기사는 총 두 명이오나, 마차 안에서 신분패를 보여 준 이는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로잘린 비아테 황녀입니다.”
“차내에 동행인이 없었다는 말인가?”
“확실히 없었습니다. 그러나 황녀 혼자 대공령에 들어온 것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마침 정문 근처에 계시던 호크 님과 로이 님께서 확인을 위해 성을 빠져나가셨으니, 흙길에 새겨진 자취를 추적하신 후 확보한 정보가 있으면 전령조를 통해 연락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카에드는 의자에 몸을 느슨히 기댔다. 창밖엔 가는 빗줄기가 부슬부슬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긴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느리게 까딱거리던 카에드가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 대신 도개교 앞에서 하차시켜서 성까지 걸어오게 해라.”
곤히 자고 있을 세라엘이 행여 말 울음소리에라도 깨면 안 되니까.
그가 덧붙인 말에 슬쩍 진땀을 흘린 집사는 다시 예의를 표한 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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