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49)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49화(49/150)
블카노프 가문과 비아테 황가에 얽히고설킨 악연은 수백 년에 걸쳐 이어져 왔다.
초대 블카노프는 로페른 왕국이 거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전쟁 영웅으로, 그 또한 몸 안에 늑대의 피가 흐르는 발켄족이었다.
그를 시기해 온 비아테 황가는 개국 300년도 안 되어 그의 후손들을 은밀히 살해하고, 발켄족을 짐승의 혈통이라 멸시하며 장벽 너머로 쫓아낸다.
당대 황제는 제 사생아였던 자를 블카노프의 가주 자리에 앉혀 암중에 영웅의 가문을 집어삼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멸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블카노프의 피는 500년이 흘러 카에드에게 이어진다.
운명의 장난처럼 그는 황실 사생아의 핏줄을 타고 내려온 선대 공작에게 입양되어 블카노프성에 입적한다.
비극으로 얼룩진 카에드의 이전 인생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세라엘이 아니었다면 결코 파낼 수 없는 비밀이었다.
제국력 859년이 되던 해, 블카노프 가문에 기생충처럼 틀어박혔던 선대 공작과 가문원을 모조리 멸족시킨 카에드는 날조된 역사를 바로잡아 자신이 소유했어야 할 모든 것을 탈환했다.
하지만 지독하게 얽혔던 악연이 쉽게 끝나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카에드는 오늘 그의 영지에 발을 들이민 황가의 인물이 황녀뿐만이 아닐 것이라 직감했다.
그는 유리창의 매끄러운 표면에 부딪히는 작은 빗방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안개처럼 내리기 시작한 부슬비는 세찬 소나기가 되어 몰아칠 수 있었다.
행여 쏟아지는 빗물에 흔적이 흐려진다면 추적에 나선 측근들이 단서를 찾기 어려울 터였다.
이른 새벽에 갑작스레 찾아든 손님에 축객령을 내릴 수도 있었으나, 성으로 들여서 입수할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얻어내는 편이 현명했다.
그러나 이따위 껄끄러운 일에 세라엘의 관심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
그는 빈 글라스에 연갈색의 양주를 따랐다. 느긋하게 목을 축이면서 잔을 흔들었다.
보고에 의하면 세라엘의 기상 시간은 늘 달랐다. 첨탑에서는 정오, 본성에 막 와서는 이른 오전이었으나 요즘은 규칙적으로 변해서 오전 느지막이 기상하고 있다. 그러고도 침실에서 곧장 나오지 않고 뒹굴뒹굴하거나 다시 잠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늦장까지 부리고 나서 침실 밖으로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언제나 30분 내외였다. 나름대로 그녀만의 규칙이 있는 것인지 아직 그 범위에서 벗어난 적은 없다.
하지만 오늘은 축제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다. 세라엘이 들뜬 나머지 평소보다 좀 더 일찍 눈을 뜨거나 변수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취침 시간과 관계없이 그녀는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에는 이른 기상을 하곤 했으니까.
그런 가능성을 고려해서 카에드는 황녀로부터 조속히 용건을 듣고, 세라엘과 마주치는 일이 없게끔 대공성에서 멀찍이 떨어진 별장으로 보내 버릴 계획이었다.
***
본성에서 조금 떨어진 도개교 앞.
양각된 테두리에 번쩍거리는 금박이 씌워진 붉은 마차가 누군가에 의해 멈춰 섰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대공성을 두고 이동을 제지당한 로잘린은 마차의 창문 손잡이를 돌렸다.
창이 열리자 가늘게 흩뿌려지는 빗방울이 로잘린의 얼굴을 때렸다.
“무슨 일인가요?”
대공성의 노집사가 열린 차창 가까이 다가왔다.
“황녀 전하께 실례합니다만,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블카노프 대공님의 지시입니다.”
난데없는 보행 요구에 로잘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마차에서 내려 걸어오라니 이유가 뭐죠?”
도개교를 건너 앞뜰만 가로지르면 되는 거리였다. 정문에서 순순히 출입을 허락해 놓고 뒤늦게서야 심술을 부리는 건가 싶을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지시였다.
“말이 요란한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잘 훈련된 군마라도 대공성에 발을 디딘 초식동물은 무척 불안해하고 예상 밖의 행동을 곧잘 합니다.”
집사가 도개교 바로 앞에 위치한 늑대 축사를 남몰래 눈짓하며 말을 끝맺었다.
“이른 새벽이니까 소리를 죽이고 들어오란 말씀이신가요?”
로잘린은 제 얼굴에 튀기는 빗방울을 소매로 닦아냈다. 노집사는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마님께서 잠자리에 드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객께서 일으킨 소음에 깨어나실 것을 대공 전하께서 염려하고 계십니다.”
“마님?”
로잘린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설마 밀로즈 영애를 지칭하시는 건가요?”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잘린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예식을 코앞에 두었다지만 아직 카에드와 정식으로 부부의 연도 맺지 않은 여자에게 마님이라. 로잘린으로서는 다소 거슬리는 호칭이었다.
‘게다가 밀로즈 영애가 소음에 깨어날 것을 염려한다고? 그 대공이?’
무척이나 애지중지하는 아내의 평안한 밤잠을 지키려는 듯한 어조였다.
로잘린이 알기로 대공과 세라엘은 면식이 없던 사이였다. 두 사람이 앞둔 결혼식 또한 서로를 사랑해서 이루어진 게 아닌, 더러운 뒷거래로 성사된 의식이나 다름없었다.
세라엘의 부친인 밀로즈 후작이 건물 매각을 구실로 제 여식을 카에드에게 팔아넘겼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져서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카에드는 워낙 속을 읽기 어려운 사람이니, 무슨 의도로 후작의 제의를 받아들였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혼담이 진행된 경위를 따져 보면 두 남녀 사이에 사랑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쯤은 누구든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카에드가 그 여자를 향한 애정을 뻔뻔하게 꾸며 내고 있는 걸 듣고 있자니 로잘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하신다면 가마를 대령하라는 명도 있었습니다.”
“됐어요. 내 발로 걸어가겠습니다.”
로잘린은 손잡이를 돌돌 돌려 창문을 닫았다. 마차 문을 열고 나가자 기분 나쁜 가랑비가 황녀의 머리칼을 적셨다.
‘환영받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블카노프 대공이야. 격을 갖추고 대해도 모자랄 판에 멍청한 오라버니는 무슨 생각으로 대공에게 먼동이 트기도 전에 찾아가라고 한 건지.’
로잘린은 덩달아 군마에서 내리는 기사 둘을 제치고 성큼성큼 걸었다.
‘아니, 오라버니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주 잘 알지.’
어스름한 새벽은 남성에게 가장 취약한 시간이라고 강조한 것만 봐도 알만했다.
제 경험담이라며, 기분 나쁘게 이죽거리는 오라비의 미소에 얽힌 의미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으득 이를 간 로잘린이 빗물에 축축해진 잔디밭을 밟으며 축사 앞을 지나칠 때였다.
황녀는 한쪽 다리만 기다랗게 내민 채 건방진 자세로 벤치에 앉아 있던 어떤 남자를 발견했다.
목 끝까지 시커먼 옷을 입은 그는 묘하게 소년티를 벗지 못한 남자였는데, 날카로운 단도를 장난감처럼 허공에 던졌다가 한 손으로 능숙하게 받아 내고 있었다. 보는 이를 아찔하게 하는 위험한 장난이었다.
돌연 로잘린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단도를 가지고 노는 손짓엔 어떠한 변화도 없었으나, 남자는 기분 나쁘게 번득이는 눈동자로 로잘린을 꿰뚫듯 관찰했다.
흡사 공격 전의 맹수를 떠올리게 하는 눈동자였다.
‘카에드 블카노프가 공작위를 계승 받은 후로부터 호위로 도적단을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다더니 사실이었나.’
그렇다면 필시 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내뿜는 남자는 도적단에서도 매우 높은 지위를 갖고 있을 것이다.
“렉터!”
그 남자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손장난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축사의 문이 열리면서 다른 남자가 털레털레 들통을 들고나왔다. 제도에서 보기 드문 큰 키와 거구를 가진 남자였다.
“이리 와서 애들 좀 말려 봐. 간식까지 먹였는데도 오늘따라 말 더럽게 안 들어.”
축사에서 막 나온 남자가 손날로 이마를 문지르자 주인 모를 피가 번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을 따라 핏줄기가 얼굴 한가운데에 흐르는데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젠장. 고기를 받아먹는 척하면서 내 손가락을 깨물더군. 벌써 두 번이나 물어뜯겼어.”
“거위 말고 사슴고기로 줘 봤어? 그럼 조금 얌전해지던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 딩, 동, 댕이가 안에서 무리를 휩쓸면서 마귀처럼 날뛰고 있어. 누님 앞에선 얌전 떨더니만 보통이 아닌 놈들이야.”
“우리가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
단도를 쥔 남자는 로잘린 뒤에 선 기사들에게 힐긋 시선을 던지고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로잘린은 걸음을 옮기는 장신의 남자들을 바라보다, 눈을 떼고 다시 본성을 향해 걸어갔다.
***
본성 1층 응접실의 육중한 목재 문 앞에는 황실 직속 기사 두 명이 서 있었다.
흉갑이 두드러지게 불거진 은빛 갑옷을 입은 그들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걸어오는 카에드를 보자 슬며시 시선을 교환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블카노프 대공은 칼로 베어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서늘한 안색과 무척 준수한 용모를 갖고 있었다.
전혀 무장하지 않은 검은 셔츠 차림이었는데도 다부진 체격은 섬뜩한 위압감을 불러일으켰다.
무관으로서의 본능을 지닌 기사들은 그가 가까워질수록 예리한 검 끝으로 겨냥당한 것처럼 위협적인 긴장감을 느꼈다.
소문처럼 저 인간은 정말 잠도 안 자나. 기사 중 한 명이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새벽 4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도 카에드는 잠에서 막 깬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은 채, 일상 업무를 보다 온 듯한 말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응접실 문 앞에 다다른 카에드는 기사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황녀가 대동한 기사는 고작 두 명이었다. 그러나 제도에서 국경과 맞닿은 영지까지 오는데 호위를 둘만 거느렸을 리는 없었다.
만약 도중에 이탈한 황녀의 동행인이 있다면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황족 태생의 여성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수의 기사를 붙였다는 뜻이다.
‘제 명줄을 우선으로 하는 걸 보면 죄를 많이 지은 쓰레기일 수도 있겠군.’
무감히 짐작하며 카에드는 가벼운 노크 후 문을 열어젖혔다.
곧장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길게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비에 약간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리고 있던 로잘린 비아테는 카에드를 보고 반갑다는 듯 미소 지었다.
소파에서 일어선 황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사뿐히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블카노프 대공. 우리 구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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