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52)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52화(52/150)
여름날의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로잘린은 세라엘의 외양을 찬찬히 훑었다.
눈부시게 밝은 금발과 자그마한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찬 이목구비, 전체적으로 가녀린 체구가 확실히 타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나약해 보이는 해쓱한 안색만 아니었다면 좀 더 사랑스러운 느낌도 들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분명, 조금 전까지 로잘린이 가엾다고 여겼던 카에드의 예비 신부였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기에 저런 낯빛일까. 세라엘의 창백한 얼굴을 본 로잘린이 무심코 생각했다.
“세라엘 양. 이런 새벽에 무슨 일입니까?”
붕 뜬 공기를 가로지르고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카에드였다. 무척이나 곤혹스러워하는 음성이었다.
로잘린이 이맛살을 구기고 카에드를 올려다봤다. 차라리 인형이랑 대화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냉담했던 남자가 목소리는 물론 반듯한 얼굴에도 짙은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잘못 보고 들은 게 아니란 걸 알려 주듯 카에드가 잇달아 질문을 던졌다.
“자고 있어야 할 시간 아닙니까?”
각기 다른 이유로 적잖이 놀란 세 사람은 흔들리는 눈으로 서로를 관찰했다.
예기치 않은 맞닥뜨림에 세라엘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세라엘은 햇살 한 자락 들지 않은 새벽녘에 카에드가 낯선 여자와 뭘 하고 있던 건지 혼란스러웠다.
깨어 있으면 안 될 시간에 왜 일어났냐는 말투를 듣고 나서야 번쩍 정신이 들었다.
치뜬 세라엘의 눈꺼풀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뭐지…?’
이거 절대 귀가하지 않을 줄 알았던 애인을 두고 다른 여자랑 떳떳지 않은 짓을 벌이다가, 급작스레 돌아온 애인을 만났을 때 나오는 대사 아닌가?
일하고 있을 시간 아니었냐, 친구 만난다고 하지 않았냐, 이런 수상한 물음과 다를 게 뭐가 있지?
세라엘의 얼굴에 묘한 전의가 감돌았다.
“그 질문이 우선순위가 아닌 것 같은데요. 대공님, 옆에 계신 손님은 누구신가요?”
카에드의 측면 얼굴을 정신없이 올려다보던 로잘린은 자신을 지칭하는 말에 세라엘과 눈을 맞추었다.
황녀는 한 걸음 다가서서 예를 갖추었다.
“연락도 없이 이른 시각에 방문한 결례에 대해 미리 용서를 구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밀로즈 영애. 로잘린 비아테입니다.”
값비싼 전신 갑옷을 두른 화려한 호위 기사와 예법을 갖춘 여자, 그리고 비아테 가문. 오래지 않아 그 조합이 가리키는 답을 찾은 세라엘이 얼떨떨하게 예의를 표했다.
“황녀… 전하를 알현하게 되었네요. 밀로즈 가문의 세라엘입니다.”
“11일 후면 블카노프에 적을 둘 예정입니다.”
불쑥 단언한 카에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세라엘의 턱을 가볍게 쥐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피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겁니까?”
그러면서 조금 전과 다를 바가 없는 질문을 해 왔다.
“네? 아… 그러니까 빗소리가….”
얼굴이 붙잡혀서 여러 각도로 돌려지고 있는 통에 세라엘의 시선이 사정없이 방황했다.
“대공님, 잠깐….”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일찍 일어날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세라엘 양, 안색이 창백합니다.”
그는 세라엘의 이마와 뺨, 목덜미에 손등을 대면서 열을 확인했다. 몹시 다급한 손짓이었다.
“잠시… 잠시만요. 황녀님께서 보고 계시잖아요.”
세라엘 또한 방에서 나오기 전에 거울로 흘깃 봤던 제 얼굴색이 다소 파리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카에드 눈에는 사선을 넘나드는 병자의 수척한 안색으로 비치고 있었다.
세라엘의 늦잠을 두고 크게 걱정했던 남자는 이번엔 그녀가 조금밖에 자지 않았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거기까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남자의 극성이 설마 황녀라는 인물을 코앞에 두고도 이어질 줄은 몰랐다.
인사를 건넨 이후 방치되고 있던 로잘린은 말하는 원숭이를 본대도 이보다 더 경악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과 눈을 벌렸다.
“카에드 님.”
세라엘은 카에드의 손목을 붙들었다. 와중에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제 것을 밀어 넣고 빈틈없이 맞잡았다.
“황녀 전하께서 대공성에 무슨 연유로 오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손 좀 놓아주세요.”
세라엘은 카에드를 신랑감으로 점찍은 숱한 여자 중에 제국의 황녀가 있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그 불편한 소문의 당사자가 오늘 새벽 느닷없이 카에드와 밀회를 가지고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심지어 둘 사이엔 어떠한 신체 접촉까지 가능할 것 같았던 이상야릇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뭔가 있는 것 같았어. 애틋해 보였단 말이야.’
물론 카에드가 아닌 황녀 쪽에서만 그런 낌새를 내비치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언짢은 기분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이 상황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명은 나중에 해 주시고요.”
뾰로통해진 그녀는 카에드의 어깨를 슬쩍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지나치게 딱딱하고 우람한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되려 약간 튕겨 나간 세라엘이 후들대면서 볼품없이 황녀 앞에 섰다.
위엄 있게 보여도 모자랄 판에…. 세라엘의 하얀 볼에 뒤늦게 살굿빛 홍조가 올라왔다.
헐렁한 잠옷 차림이기도 하여 조금 쑥스러웠으나 세라엘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침 제가 깨어 있어서 다행이었네요. 말씀하신 대로 지금은 이른 시각이니, 일단 제가 귀빈관에 있는 침실로 안내를….”
“황녀께선 별장으로 가실 예정입니다.”
등 뒤에서 카에드가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세라엘은 눈썹을 찌푸리고 그를 돌아봤다.
늘 경청하는 자세로 세라엘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남자가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그 순간 로잘린이 냉큼 입을 열었다.
“가장 작은 침실이라도 좋으니 대공성에 묵으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카에드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하지만 세라엘을 앞에 둔 로잘린은 동맹군이라도 얻은 것처럼 원기를 띠고 그와 맞섰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먼 길을 달려오느라 조금 피곤해서요. 비도 내리는데 멀쩡한 귀빈관을 목전에 두고 대공의 별장으로 가기는 힘겨울 것 같네요.”
“힘겹기는. 육두마차를 타고 가시지 않습니까.”
“대공의 예식 전까지라도 숙소를 부탁할 순 없을까요? 일주일 정도면 되잖아요.”
“11일입니다.”
“대공께서는 정말 무정하시네요…. 저는 생떼를 쓰는 게 아니라 정중히 부탁하는 거예요.”
“새벽 4시에 찾아온 불청객께서 정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시다니 낯짝도 어지간히 두꺼우시군요.”
세라엘을 사이에 두고 카에드와 황녀가 팽팽히 대치했다.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이리저리 목을 비틀던 세라엘은 종국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별장이라면 대공성에서 멀찍이 떨어진, 칼스비크 변두리에 있는 저택이었다.
동쪽 바닷가와 맞닿아 있는 그곳은 북부의 평균 날씨에 비하면 따뜻한 편이었고, 휴식을 위해 지어진 장소라 가문원이나 귀한 손님들이 종종 머물기도 했다.
그런데 이미 대공성 안에 들어온 황녀를 별장으로 보내려는 이유는 뭘까.
대공성을 샅샅이 살펴보았던 세라엘은 본성 귀빈관 내의 침실이 차고 넘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녀에게 방 하나 마련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황녀가 이 시간에 찾아온 이유는 또 무엇인지. 응접실에선 카에드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어째서 두 사람 사이에 수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던 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둥둥 부유했다. 가장 신경 쓰이는 점은 따로 있었다.
세라엘은 지금 황녀와 카에드가 티격태격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몹시. 굉장히. 무척이나 거슬렸다.
“밀로즈 영애, 들으셨죠?”
빙긋 웃은 로잘린이 세라엘을 콕 집어 말을 걸었다.
“블카노프 대공께서 제 결례에 화가 많이 나셨나 봐요.”
“…….”
“제가 아무 침실이라도 좋으니 내어 달라 부탁드렸는데도 외곽에 있는 별장으로 보내려 하시네요. 지금 제 상태가 어떤지 보이시나요?”
로잘린은 두 손바닥을 내보이면서 허리를 살짝 비틀었다. 그제야 황녀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로잘린은 황녀 신분에 걸맞은 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드레스 차림에 화려한 머리 장식을 올리고 있었지만, 사방이 얼룩덜룩 빗방울이 배어 처량한 모양새였다.
특히 소맷자락이 흠뻑 젖은 상태였고, 축 늘어진 암적색의 머리칼은 본래보다 짙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로잘린은 몸을 달달 떨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세라엘을 마주 보았다. 세라엘의 푸른 눈동자에 어린 망설임을 알아챈 황녀가 한마디 더 보탰다.
“심지어 응접실에선 따뜻한 차 한 잔도 대접하지 않으시더군요.”
몇 초 고민하던 세라엘은 곤란한 표정으로 카에드를 올려다봤다.
“대공님.”
로잘린을 힐끔 눈짓하며 세라엘이 말을 이었다.
“소나기가 이렇게나 많이 오는데, 지금 황녀 전하를 별장으로 보내는 건 다소 무리가 있어 보여요.”
“세라엘 양이 몰라서….”
“네. 어떤 사정이 있는지 저는 몰라요. 그런데 대공님께서 비 맞은 여성을 축객하는 모습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세라엘 역시 황녀를 환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든 손님 주제에 카에드와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던 걸 떠올리면 별장은커녕 영지 밖으로 보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추위로 떨고 있는 황족 태생의 여성을 소나기가 퍼붓는 야외로 내보낼 순 없었다. 무엇보다 이대로 황녀를 보내 버리자니 왠지 찜찜한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카에드는 잘게 흔들리는 눈으로 세라엘을 내려다보았다.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긴 숨을 내쉬며 참아냈다.
야멸찬 언사로 황녀를 대하던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그는 순종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줄곧 제 눈과 귀를 의심하던 로잘린은 잠자코 입을 다문 채 카에드의 결정을 기다렸다.
다시 말을 꺼낸 사람은 세라엘이었다.
“일단 황녀 전하께선 젖은 옷부터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제가 게스트 룸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세라엘은 로잘린을 손님방으로 인도하기 위해 이동용 램프를 고쳐잡았다. 그녀를 얌전히 응시하고만 있던 카에드가 저지하듯 앞으로 나섰다.
“안내는 내가 할 테니까 세라엘 양은 침실로 올라가 있어요.”
세라엘은 고개를 내저으며 슬리퍼 신은 발을 끌었다.
“아뇨. 제가 해 드릴 거예요.”
단둘이 가게 놔둘 것 같니. 혀끝까지 나온 말을 간신히 삼켜 냈다.
카에드는 물러서지 않고 팔을 뻗어 세라엘을 막아섰다.
“그렇다면 집사가 아직 깨어 있으니 그에게 안내하라 명하겠습니다.”
고작 팔 하나가 막았을 뿐인데도 세라엘은 올가미에 얽매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겹겹이 쌓인 불쾌감에 불이 확 붙는 순간이었다.
“제가 모신다니까요…!”
그가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이자 세라엘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장내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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