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53)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53화(53/150)
세라엘은 칼스비크에 와서 단 한 번도 타인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밝고 긍정적인 성격도 한몫했거니와, 대공성에서 지내며 큰소리를 낼 만한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언성을 높이게 된 대상이 카에드가 된 것이다.
카에드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그는 세라엘의 몸을 가로막은 팔을 물리고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세라엘 양이 원한다면 그리하십시오.”
속눈썹 아래 깔린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 처연한 빛이 깃들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으나 그는 비에 쫄딱 젖은 들개 같은 기류를 풍기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황녀 전하.”
세라엘은 얼음처럼 굳은 카에드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반대로 로잘린은 그를 흘끔 곁눈질하더니 축축한 옷차림에도 사뿐사뿐 따라나섰다.
멀어지는 세라엘의 뒷모습을 카에드는 한참 동안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하아….”
백지장처럼 희게 질린 안색에 정신을 빼놓고 있던 탓이었을까. 뒤늦게 그는 황녀와의 대면을 두고 세라엘이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쾌한 예감을 하게 되었다.
***
해바라기.공금
적적한 복도에는 두 여자의 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벽에 줄지어 자리한 조명들은 세라엘과 로잘린이 지나갈 때마다 희미하게 일렁였다.
귀빈관은 1층 홀을 빠져나가 회랑에 있는 계단을 오른 뒤 긴 복도를 걸어야 나왔다.
가깝지 않은 목적지를 향하면서도 그들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불편한 공기를 참다못한 세라엘이 먼저 서두를 뗐다.
“제가 본성 내의 지리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이 익숙하지 않았거든요.”
본성으로 이사 온 후 루시와 매일같이 살펴보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능숙하게 안내하지 못했을 것이다. 뒤따라오던 로잘린이 차분히 대답했다.
“워낙 넓고 복잡한 곳이니까요. 블카노프성엔 저도 몇 번 와 봤답니다. 어렸을 때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요.”
“황녀 전하께선 칼스비크에 자주 방문하셨나 봐요.”
“공작령이었을 때엔 종종 왔었지요. 행사니 뭐니 여러 일로 왕래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럼 카에드 님도 만나 보신 적 있겠네요.”
세라엘이 툭 내뱉었다. 등 뒤에서 진의를 가늠하듯 침묵을 유지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색할 정도로 답이 늦어졌으나 두 사람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걸었다.
“…물론이죠.”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로잘린은 짧게 응수했다.
당연하다는 어조를 띤 대답은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세라엘은 응접실 앞에서 황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카에드에게 건넸던 말을 되새겼다.
‘황녀가 아무도 모르는 대공님의 모습을 안다고?’
로잘린이 10년 전 무도회에서 보았다던 카에드의 모습.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황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카에드를 알고 지냈던 듯했다.
의심의 가지를 어디로든 뻗칠 수 있었던 상황에서 둘만 공유하는 순간이 있다는 말에 심기가 영 불편했다.
세라엘은 자신이 카에드의 면면을 잘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릴리가 그의 취향을 물었을 때 선뜻 대답도 못 했으니까.
무엇보다 카에드는 그녀가 읽었던 이야기 속의 모습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작중의 비극을 피해 제자리를 되찾은 것은 물론 부하들과도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동료가 죽어 나가도 슬퍼하지 못했을 만큼 무감정한 남자 아니었나?
위압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웃음도 많은 편이었고, 세라엘에게 아름다운 반딧불이 호수를 보여 주고 싶어 하는 소년 같은 감성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세라엘이 알지 못하는 이면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 꺼림칙한 의문의 끝에 외면하고 싶은 답이 하나 있었다.
로잘린이 그와 각별해 보이는 기류를 풍겼던 게 설명되는 답이었다.
‘혹시… 전 여자 친구인가?’
세상에. 그게 말이 되나? 어처구니없는 짐작이었다. 그러나 무리도 아니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인물도 좋고 다정한 데다, 여자에게 반딧불이 호수를 보여 주는 감수성을 지닌 남자가 교제해 본 적 없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성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는데 그중 마음에 드는 여자 하나 없었을까.
앞다투어 떠오른 온갖 상념이 뇌리에서 뒤엉키는 사이 두 여자는 귀빈관 내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먼저 문을 열어젖힌 세라엘이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은 방이었지만, 관리가 잘되어 있던 덕분에 당장 머물러도 문제없었다.
두리번대지 않고 침실 안으로 들어온 로잘린은 서랍장 위에 놓인 흰 수건부터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젖은 머리를 문지르면서 세라엘을 응시했다.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릴게요. 밀로즈 영애께도 큰 결례를 끼쳤어요.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기별 없이 새벽 4시에 방문하신 것 말씀이시죠.”
세라엘은 황녀를 뒤로한 채 촛대 위에 불을 올렸다. 로잘린은 천천히 입매를 끌어 올렸다.
“저도 원하지는 않았답니다….”
세라엘은 코웃음 치고 싶었다. 상식적으로 결혼식을 고작 11일 앞둔 남자를 찾아와서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말을 내놓는 게 정상인가.
두 사람이 전에 어떤 사이였는지는 몰라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혹시 황녀 전하께 실례가 안 된다면 성을 방문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길쭉이 솟은 세 개의 촛대에 모두 불을 붙이고 나서 세라엘은 로잘린을 마주 보았다.
암적색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황녀는 도회적인 인상을 풍기는 미인이었다.
세라엘과는 반대로 차분하고, 말수가 적으면서 작은 동작에서도 우아함이 묻어나는 여자였다.
“예식 전에 방문을 원했던 사람은 저뿐만이 아닌 거로 알고 있어요.”
로잘린은 주제를 돌리며 답을 피했다.
“영애는 듣지 못하셨나요? 많은 귀족이 블카노프 대공을 만나기 위해 접견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답니다. 그중 밀로즈 후작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요….”
로잘린은 세라엘의 부친을 넌지시 언급하며 눈치를 살폈다.
하등 쓸모없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한 귀로 흘린 세라엘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에드 님께서는 변수가 생겨 결혼식이 미뤄지는 일을 원치 않으셨나 봐요. 요즘 그 부분에 있어 조금 예민하시거든요.”
세라엘은 그녀의 부상을 걱정하면서 식이 끝난 후에 승마를 가르쳐 주겠다던 카에드의 노파심을 되새겼다.
“그래요? 대공께서 이 결혼에 그리 깊은 뜻을 두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로잘린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지만 세라엘은 다시 본론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황녀 전하께서도 내방을 원하셨지만 거절당하신 거군요. 그런데도 대공님을 찾아오신 걸 보면 급한 용무가 있으셨나 봐요.”
로잘린은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던 손을 멈췄다.
말없이 세라엘을 올려다보던 황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해요. 사적인 영역이라 영애께 자세히 말해 드리기는 곤란하겠어요.”
“사적인 영역이요….”
말끝을 흐리며 되뇐 세라엘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다시 황녀와 눈을 맞추었다.
“혹시 카에드 님도 같은 생각이실까요?”
비아냥거리기 위해 물은 건 아니었다. 로잘린 역시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이란 걸 알아차린 듯, 어깨를 으쓱이며 솔직하게 답해 주었다.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겠어요. 다만 대공께서도 저와 나누었던 대화를 영애께 빠짐없이 전하기엔 곤란하실 거예요.”
“…그 정도면 충분한 답이 되었어요.”
매우 껄끄러운 주제란 말이지. 세라엘은 황녀가 카에드의 전 애인일 것이라는 짐작에 무게를 실었다.
“밀로즈 영애도 피곤할 텐데 제가 시간을 빼앗고 있네요. 저도 염치가 있으니 지금 목욕물을 부탁하지는 않을게요. 긴 여정으로 고단하여 어서 잠들어 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천만에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설렁줄을 당겨 사용인을 불러 주세요. 불편하신 점 없이 모시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날이 밝으면 여자들끼리 다과라도 하면서 담소를 나눠 보는 건 어때요? 영애께서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좋아요. 그럼 편히 쉬시길 바랄게요.”
세라엘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황녀를 대했으나 가슴속에선 뭐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작중에서 로잘린은 이름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은 비중 없는 단역이었다. 심지어 성년이 되자마자 타국으로 출가했던 인물이라, 원작대로라면 제국 내에서 마주칠 일도 없을 터였다.
해진 기억을 자세히 복기해 보기도 전에 1층 홀에 도착한 세라엘은 잠시 멈춰 섰다. 그녀는 갈림길 앞에 선 듯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카에드는 응접실로 돌아갔을까. 황녀를 손님방으로 데려다주고 나서 따로 보자는 약속을 하지 않았으니 집무실이나 침실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아….”
세라엘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꼭두새벽에 혼자 뭘 하는 건가 허탈한 자각이 들었다.
게다가 해명을 들어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왜 그를 찾고 있는 걸까? 티격태격 말싸움하던 카에드와 로잘린을 떠올리니 치기 어린 마음이 일었다.
지금 상태도 최선이 아니었다. 짧은 선잠에서 깨어난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고, 멋대로 엉킨 생각으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두운 성안에서 흰옷 차림으로 나풀나풀 돌아다니는 세라엘을 누가 본다면 유령이라 해도 믿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나서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그녀는 반쯤 비틀대는 걸음으로 계단에 올라섰다. 카에드가 있을 어느 곳도 아닌 제 침실을 향해서였다.
침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세라엘은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아득한 빗소리만이 울리는 고요한 복도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막 방문 앞에 선 그녀가 손잡이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어디 가요?”
어느 때보다도 낮게 가라앉은 저음이 세라엘의 등 뒤를 엄습했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주저앉을 것처럼 휘청였던 몸을 추스르지 못한 채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조명이 없는 어둠 속에서 완벽하게 기척을 숨긴 남자가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내게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을 텐데….”
어딘가 울적함이 녹아 있는 음성으로 중얼거린 카에드가 느린 속도로 다가왔다.
세라엘은 점점 가까워지는 거대한 인영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쿵쿵 뛰어대고 있었다.
“전혀 없었나 보네요.”
자조하듯 뇌까린 그가 어두운 눈으로 세라엘을 내려다보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