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54)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54화(54/150)
“왜… 왜 제 침실 앞에 계시는 거예요?”
세라엘은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퍼떡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써야 했다.
인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침실 앞에 누가 서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글쎄….”
씁쓸하게 웃는 카에드의 눈에 자조적인 빛이 스쳤다.
“어째서 나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숨결이 닿을 만큼 바짝 다가선 그가 대답 대신 되물었다. 세라엘은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를 마주 보았다.
“어디에 계실지 몰랐으니까요.”
“찾아볼 노력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의아해하기도 전에 세라엘은 그의 음성이 힐난조를 띠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따지고 보면 이른 새벽부터 봉변을 당한 사람도, 성을 낼 사람도 세라엘인데 도리어 카에드가 그녀를 책망하고 있었다. 세라엘은 약간 미간을 좁혔다.
“해명할 사람은 제가 아닌걸요. 제가 아닌 대공님이 저를 찾아왔어야… 죠.”
그녀는 아차 싶어 다소 부자연스럽게 말을 끝맺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그는 응접실에서 있었던 상황을 설명해 주기 위해 그녀의 침실을 찾아온 게 틀림없었다.
“내가 그 여자와 뭘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습니까?”
정작 카에드는 그녀가 뱉은 어폐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눈꺼풀에 반쯤 가려진 그의 눈동자는 이상하리만큼 집착적인 구석이 있었다.
세라엘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궁금하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호기롭게 되받아쳐 놓고서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화는 나는데 카에드 잘못은 아닌 것 같아서 화도 못 내겠고. 따져야 한다면 무엇부터 따져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카에드와 세라엘 사이에 오랜 교제 기간을 바탕으로 생긴 신뢰와 사랑이 있다면 또 모를까. 그게 아닌 걸 알고 있으니 머릿속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거겠지.
불쑥 손을 뻗은 카에드가 턱을 그러쥐는 바람에 세라엘의 사고는 정지되었다. 허공에 꽂혔던 시선도 붙잡혀 그를 바라봐야만 했다.
카에드는 엄지로 그녀의 입가를 느릿느릿 쓸어 만졌다. 평소와 다르게 서늘한 온도를 지닌 손가락은 도톰한 입술까지 침범해 왔다.
“분명 일어날 시간이 아니었는데.”
주제에서 한참 벗어난 말을 독백하듯 내뱉은 카에드는 계속해서 세라엘을 어루만졌다.
몹시 부드러운 손길이었는데도 세라엘은 입술이 엉망으로 헤집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일순 안쪽 점막이 살짝 드러나자 세라엘은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잠깐….”
저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멈출 줄 모르는 손짓이 당황스러워 그녀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혀끝에 그의 지문이 닿으면서 타액이 조금 묻었으나 카에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안색이 창백합니다.”
그는 침잠한 어조로 아까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직 답을 못 들어서요.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닙니까?”
누가 보아도 세라엘을 걱정하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정함을 한 꺼풀 벗겨 내면 단단히 뒤틀린 심기가 웅크리고 있을 것 같았다.
묘하게 날이 세워진 공기에 세라엘은 불안정한 호흡을 반복했다.
“…아니에요. 늦게 잠들었는데 두 시간 만에 일어났거든요. 안색이 이런 건 잠이 부족해서 그런 걸 거예요.”
카에드는 눈가를 문지르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피곤하십니까?”
“네…. 자꾸 눈이 감겨요.”
물러설 생각은 없었는지 그는 팔을 뻗어 세라엘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잠깐이면 되니까 참으십시오.”
그러고는 무시할 수 없는 눈빛으로 방 안에 들어갈 것을 종용했다. 세라엘은 그의 손가락이 닿았던 입술을 만지다가 침실에 발을 디뎠다.
탁, 문이 닫히고 폐쇄된 공간으로 들어서자 세차게 퍼붓는 빗소리가 적막을 메웠다.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소나기였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세라엘이 그와 눈을 맞추기도 전에 곧바로 해명이 들려왔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한 발짝 다가온 카에드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녀의 방문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곧장 축객령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용건을 묻고 나면 외곽의 별장으로 내쳐 버릴 계획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어떠한 신체 접촉도 없었고 세라엘 양에게 말하지 못할 행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램프에서 번져 나오는 작은 불빛이 카에드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그림자가 물결치듯 일렁였지만 그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막 응접실에서 나오는 카에드와 황녀를 보았을 때, 세라엘은 두 사람 간에 모종의 접촉이 오간 건 아닐지 찰나 의혹을 품었다.
하지만 카에드가 신의를 저버릴 사람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면서 그러한 찝찝함은 어렵지 않게 털어 낼 수 있었다.
오간 대화로 추측하건대 황녀가 동의 없이 멋대로 방문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점은 따로 있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세라엘이 입술을 움직였다.
“크게 오해했던 건 아니에요. 그런 점에 있어 대공님을 의심하지는 않았어요.”
“그런 점에 있어?”
카에드는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점에 있어선 의문을 가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세라엘은 잠시 입을 다물고 어질러진 상념을 간추렸다.
정말 카에드와 로잘린이 과거에 교제했던 사이였을까. 말도 안 되는 착각인 걸 알면서도, 카에드의 면면을 알지 못한다는 자각이 든 이상 지울 수 없는 의심이었다.
이대로 지레짐작만 하며 오해를 키워선 안 되겠다 싶어 그녀는 결국 의아하게 생각했던 바를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러니까 혹시 카에드 님과 황녀님이 과거에 각별한 연이 있었다거나, 나아가 교제했다거나… 사적으로 아는 사이였나 싶어 마음에 걸렸거든요.”
“교제? 그 여자와?”
카에드의 얼굴에 황당함이 그득 어렸다. 허무맹랑한 망언을 들었다는 반응에도 세라엘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작스럽게 대공님을 찾아올 일은 없다고 생각해서요. 말하는 투로 보아 대공님께 대단한 신뢰가 있는 것 같았고요. 그래도 상식적으로 정혼자가 있는 남자한테 그러면 되나….”
세라엘은 허공을 흘기면서 사견을 덧붙였다. 카에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황녀와는 인사치레조차 나눠 본 적 없었을뿐더러 오늘이 오기 전까지 난 황녀의 얼굴도 알지 못했습니다.”
“황녀님께선 카에드 님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말하던걸요. 아무도 모르는 당신의 모습을 안다면서 어쩌구 하던데요.”
지난 상황을 돌이키니 조금 울컥한 세라엘은 말본새를 가다듬지 못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카에드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부정했다.
“모르는 일이고 관심도 없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선 의혹을 풀어 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에요.”
세라엘은 물기에 젖어 축 늘어진 로잘린의 뒷모습과 고백하듯 떨리던 목소리를 상기했다.
세라엘뿐 아니라 루시, 하다못해 콜이 보았더라도 눈매를 좁히고 의심했을 만큼 수상쩍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카에드의 잘못은 아니었다. 침실까지 찾아와서 사과하는 그에게 투정 부리고 싶지 않았다.
“…아뇨.”
세라엘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대공님이 잘못하신 건 없으니까요.”
“내게 화를 내도 괜찮아요. 이번 일은 전적으로 내 불찰이었습니다.”
“손님 앞에서 언성을 높인 제가 무례했는걸요.”
“세라엘 양이 사과할 일은 없었습니다.”
턱을 한번 내저은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세라엘은 이렇게 된 마당에 황녀의 방문을 두고 생긴 모든 의혹을 물어보는 편이 나으리라 판단했다.
“그럼 황녀님께서는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신 거예요?”
로잘린은 사적인 영역이라 운운하며 알려 주기를 거부했고, 카에드 또한 말해 주기 어려울 거라 했다.
하지만 카에드는 이 자리에 황녀가 있었다면 크게 상처받았겠다 싶을 정도로 숨김없이 토로해 주었다. 그러니 그것 또한 어렵지 않게 알려 주리라 생각했다.
카에드는 손가락으로 느릿느릿 제 입가를 쓸었다. 그가 깊은 생각에 빠졌을 때 나오는 버릇이란 걸 세라엘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불편한 적막이 이어졌다.
“어… 답하기 곤란하신가요?”
의문을 가득 담은 물음이 세라엘의 입술 사이로 흩어져 나왔다.
“제 눈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예전 애인으로 비쳤거든요. 하지만 과거에 연이 닿아 있지도 않았다면, 무슨 이유로 대공님을 방문한 건지 의아해서요.”
로잘린과 연분이 없다는 해명을 들었는데도 가슴 한구석에 자리한 꺼림칙함은 그대로였다.
황녀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겠지. 하지만 말 한 번 나눠 본 적 없는 남자에게 품기엔 다소 진한 감정으로 보였는데. 그러니까, 분명 다른 사정이나 의도가 있었을 텐데….
“세라엘 양이 걱정할 문제는 없을 겁니다.”
공백 끝에 카에드는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나를 믿어 주십시오.”
오해는 다 풀렸는데도 작지 않은 불쾌감이 세라엘의 가슴속을 메웠다.
부글부글 끓는 것 같기도 하고 날을 세워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어딘가 불만스러운데 출처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라엘은 그 감정의 정체를 밝혀냈다.
‘내가 질투하고 있나 봐.’
이 답도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니. 그녀는 카에드와 맞닿은 시선을 끊고 걸음을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검푸른 하늘에서 폭우가 시원하게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곤 했는데, 지금은 썩 그렇지 않은 걸 보니 제 심경도 꽤 어수선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빗방울이 맺힌 유리창에 손끝을 댔다. 등 뒤에서 카에드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금세 가까워진 그는 손을 뻗어 허락을 구하듯 세라엘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일순 미약한 전율이 일며 뱃속이 가려웠으나 세라엘은 거부하지 않았다.
카에드는 조심스럽지만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실은 팔로 세라엘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작은 몸을 제 품 안에 빈틈없이 밀어 넣었다.
“대공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카에드는 대답 대신 그녀의 목덜미에 더운 숨결을 흩뿌리며 입술을 눌렀다. 얇은 옷감 너머로 열이 오르기 시작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만약 오래전부터 저를 좋아했다는 남자가 새벽 중에 절 찾아온다면….”
어깨 근처에서 움직이던 말캉한 감각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제 은밀한 모습을 자기만 알고 있다는 식의 말을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실 건가요?”
“가정하시는 겁니까?”
“대공님은 어떤 마음이실지 궁금해서요.”
세라엘은 그의 가슴팍에 안겨 맥없이 감기는 눈으로 내리는 빗줄기를 응시했다.
“그 버러지의 팔다리를….”
“…네?”
짙은 적의를 품은 욕설에 세라엘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팔다리를?”
카에드는 무슨 말을 할지 고르는 것처럼 찬찬히 숨을 내리 쉬었다. 그리고 굉장히 순화된 답을 하나 내놓았다.
“…밟아 주고 싶을 것 같습니다.”
“잔인하시네요. 전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면을 바라본 세라엘이 작은 헛웃음을 쳤다. 다시 목선을 따라 열기 어린 숨과 입술이 미끄러졌다.
평소 같았으면 뺨을 물들이며 저지했을 접촉을 세라엘은 얌전히 받아들였다. 뇌리에 들어찬 잡념을 멀리 밀어 버리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었다.
“비가 많이 와서 오늘 축제엔 가지 못하겠어요.”
“그치고 나서 가면 될 일입니다.”
“우기가 축제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면요?”
“축제 기간을 늘리면 되겠군요.”
“대공님, 그거 권력 남용이에요.”
“세라엘 양을 위한 애정으로 받아들여요.”
애정…. 생경한 단어를 곱씹어보기도 전에 축축한 감촉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는 보들보들한 살결을 혀로 그리듯 핥다가 가볍게 빨아들였다.
세라엘은 미약한 신음을 품은 헛숨을 내뱉었다. 저도 모르게 한쪽 팔을 올려 그의 머리를 잡았다.
“만에 하나 비가 그치더라도 손님을 두고 외출할 수는 없는걸요.”
“황녀는 날이 밝자마자 내보낼 예정입니다.”
“그것도 무리가 있어 보여요. 날이 밝으면 황녀님이랑 차를 마시기로 약속해서….”
그가 목덜미를 깨무는 바람에 말허리가 잘렸다.
“계속 불평을 하는군요.”
가볍게 핀잔을 준 그는 잇달아 입술을 붙였다. 살갗을 빨아들이는 간지러움이 선을 넘는 순간 세라엘은 그의 머리통을 밀어냈다. 뒤돌아 그를 마주하고서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자국이 남으면 싫어요.”
예고 없이 세라엘의 다리 뒤로 손이 들어왔다. 카에드는 가뿐히 안아 올린 그녀의 몸을 창턱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꾸벅꾸벅 감기는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안 남게 할 테니까.”
그는 세라엘의 등허리에 팔을 두르면서 빗장뼈에 얼굴을 묻었다.
“내게 사과할 기회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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