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56)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56화(56/150)
테이블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악셀이 꽃꽂이를 배우겠다는 말을 들어도 그만큼 얼어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식사에 집중하는 사람은 호크뿐이었다.
악셀이 가장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두목이 늦잠을 자…?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것보다 두목이 잠을 자는 사람이었나? 기절이랑 헷갈린 거 아냐?”
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의문을 표하자 악셀이 인상을 썼다.
“머리통이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 봐라. 기절하는 게 더 비정상 아니냐?”
렉터는 두 멍청이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악셀은 괴이한 소식을 가지고 온 부하에게 화살을 돌렸다.
“어디서 들은 정보야? 네가 두목한테 직접 물어봤어?”
부하는 오들오들 떨었다.
“제가 왜… 모가지 잘릴 일 있습니까….”
그는 주먹만 한 닭고기를 한입에 해치우면서 말을 이었다.
“오전에 심부름이 있어 본성에 잠깐 들렀는데 사방에서 호들갑을 떨고 야단법석이더라고요. 지나가던 사용인을 붙잡고 물어봤더니 그러던데요. 두목이 새 신부의 침실에서 혼자 10시쯤 나왔다나 뭐라나.”
이를 두고 주변 남자들이 하나둘씩 저마다의 가설을 제시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술에 취한 사용인이 헛것을 봤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가설도 있었다.
그때 식사에 집중하던 호크가 한마디 얹었다.
“모두 허튼소리다. 거기서 밤을 새우고 느지막이 나오는 두목을 목격한 인간이 멋대로 늦잠이라 추측했겠지. 아둔하긴….”
가장 일리 있는 의견이었다. 다만 듣는 이에게 무궁무진한 상상의 여지를 주는 의견인지라, 몇몇 부하들이 장난기 어린 시선을 주고받았다.
말없이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던 렉터가 불쑥 끼어들었다.
“흥미롭긴 하지만 남의 사생활에 깊이 파고들지는 말자구요. 두목만 얽혀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당돌하게 굴다가도 이런 주제에 있어 쉽게 얼굴을 붉히는 세라엘을 떠올리며 렉터는 부하에게 당부했다.
“이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게 좋겠어요. 다른 곳에 가서 퍼뜨리지 마시고요.”
“주의하겠습니다.”
렉터보다 서너 살은 많을 법한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직 소년티를 채 벗지 못한 렉터가 거뭇거뭇한 수염이 난 남자에게 높임말로 대접받는 건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다소 의아한 모습이었다.
발켄족은 적정 나이가 되면 성인식을 치르는 문화가 있긴 했으나, 서열은 나이순이 아닌지라 지위가 높은 사람을 선배로 대우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다행히 일곱 명의 측근들은 연장자일수록 서열이 높아서 정리가 확실하게 된 편이었다.
문득 허공을 보던 콜이 우렁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루빨리 두목의 아이를 보고 싶어.”
제 귀를 의심한 렉터가 한 박자 늦게 기겁하여 콜을 만류했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세라엘 님이 들으면 기절하실지도 몰라.”
이미 망상에 빠진 콜은 계속해서 나불거렸다.
“누님을 닮은 아기면 요정처럼 사랑스럽겠지. 쌍둥이면 더 좋겠는데.”
“상상은 그쯤 하라니까.”
콜의 염불을 말리는 사람은 렉터뿐이었다. 악셀은 흥미롭다는 듯 거들었다.
“확실히 누님을 닮은 아기라니 궁금하긴 하네. 그럼 두목을 닮으면 어떨 것 같냐?”
이맛살을 구긴 콜이 제 턱을 매만졌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음… 두목을 닮으면 대단한 아기가 되겠지.”
“푸하하! 세상에 그딴 게 어디 있냐? 아기는 다 아기지.”
악셀의 비아냥에도 콜은 개의치 않았다.
“여기 와서 살 만하니까 욕심을 부리고 싶어져. 장벽 너머에 있을 땐 하루살이처럼 살기 급급해서 삶에 여유가 없었지. 우리 중의 한 명이라도 정상적인 가정을 이룬 사람이 있었나?”
콜이 삭막했던 과거를 언급하자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숙연해졌다. 콜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난 이제 조카의 배냇짓을 보고 싶다고.”
카에드의 최측근인 바이퍼가 없는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호크가 콜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어리광 부리지 마라. 그따위 허튼소리나 지껄이는 네 정신 상태라면 머지않아 검을 쥔 손이 무뎌질 것이다. 적의 숨통을 제대로 끊어 놓지 못한다면 등에 칼을 맞기 십상이겠지.”
가뜩이나 침중한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콜이 반항적인 눈빛으로 호크를 응시했다.
“내가 언제 어리광을 부렸습니까. 그리 말하실 거면 차라리 저주를 퍼부으십시오.”
“매일같이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우리는 발켄으로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손에 피를 묻혀야 할 운명이다. 비무장 상태에서 괴한 서른의 습격을 받아도 전멸시킬 수 없는 놈은 우리 종족의 더러운 수치다.”
“두목의 아이를 보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설교가 심하신 거 아닙니까? 형님은 귀여운 조카가 궁금하지도 않아요?”
“쓸데없는 것 묻지 마. 현재 상황에 안주할 생각도 하지 말고.”
일침을 던진 호크가 접시를 들고 일어섰다. 모두가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주시할 때 렉터는 비스듬히 턱을 괴고 창문 밖을 지켜봤다.
천둥소리를 동반한 폭우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
카에드가 침실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라엘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루시를 불러 침실에서 간단히 먹을 조반을 요청하고, 귀빈관에 있는 로잘린은 어떠한지 물었다.
아침에 황녀의 방문을 전해 들은 사용인 모두 적잖이 놀랐다지만, 다들 접객에 능숙한 데다 황녀도 까탈스러운 편이 아닌지라 문제는 없는 듯했다.
대동했던 기사들도 집사가 일찌감치 손님방으로 안내하여 황족의 수행원에 걸맞은 대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소식을 전달받으면서 세라엘은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다행히 걱정할 부분은 없겠구나. 아침 식사할 때에 황녀님을 조찬실로 모셨니?”
“식사는 침실에서 하고 싶으시다기에 그쪽으로 올려 드렸어요. 이른 새벽에 도착하셨다고 들었는데 아침 7시에 칼같이 기상하셨더라고요.”
“…왠지 그러실 것 같았어.”
세라엘이 졸린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로잘린은 활달해 보이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아침잠이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알면 알수록 세라엘과 공통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로잘린은 이번 여정에 전담 사용인을 대동하지 않았다고 했다. 황족 태생의 여성이 칼스비크까지 오는데 달랑 두 명의 호위만 거느린 것이 몹시 수상했으나, 세라엘은 하녀를 통해 로잘린의 동태를 지켜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황녀님께서 따로 요구한 것은 없었니?”
“조식 이후에 뜨거운 차를 달라고 하신 것 외엔 없었어요. 목욕과 아침 단장을 도와드릴 때도 별말씀 없으셨고 아직 침실 밖으로 나오시지도 않았어요. 베일리 부인이 직접 찾아가셔서 성 내부나 근방 도시를 둘러보시는 건 어떨지 여쭤보았는데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흐음….”
날이 밝으면 세라엘과 차를 마시기로 약속했기에 베일리 부인의 제안을 거절했을 수도 있었다. 의도가 무엇이든 황녀가 세라엘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의심스러운 점은 없었나 본데.’
세라엘은 줄곧 차분함을 유지했던 로잘린을 떠올렸다. 오해를 불러일으킨 상황만 아니었다면 황녀는 마냥 비호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로잘린은 카에드와 블카노프 공작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세라엘이 아는 작중에서 황실은 카에드와 10년이 넘도록 전쟁 중이었던 공작을 지원하며 군대와 군용물자를 조달했다. 그러나 오랜 교전으로 국고가 거덜 나면서 비아테 황가는 재정난을 겪고,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타국의 상단에서 사채를 끌어다 쓰기 시작했다.
국채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전쟁도 수세에 몰리면서 황제는 결국 거대한 빚을 탕감하는 대가로 로잘린을 쉰이 넘은 상단주와 혼인시켰다.
전개가 모조리 바뀐 이 세계에서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다. 황녀도 타국으로 출가할 일 없이 멀쩡히 제국 내에서 활동하며 카에드에게 질척대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머리 백작에게 팔려 갈 뻔했던 세라엘로서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 로잘린에게 은근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황녀의 수상쩍은 행보에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는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
세라엘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시간 자고 일어났음에도 새벽의 여파 때문인지 몸이 노곤했다.
세라엘의 상태를 알아챈 루시가 물었다.
“욕조에 목욕물부터 올릴까요?”
“됐….”
자연스레 거절하려던 세라엘이 제 몸을 내리훑었다.
어젯밤 취침 전에 기나긴 목욕을 했던지라 아침엔 간단히 세수만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동틀 때까지 받아들여야 했던 긴 접촉을 상기해 냈다.
“…아냐. 시간이 걸리더라도 목욕은 해야겠어.”
뜨거운 물로 발끝까지 씻어 내고 나면 머릿속도 조금이나마 정돈될 것이다.
목욕물이 준비되자마자 세라엘은 잠옷을 벗어 던졌다. 향기로운 물속에 오래도록 몸을 담고 싶었지만, 기다리는 이를 두고 여유 부릴 순 없었다.
세라엘은 미리 주방에 연락을 넣어 조찬실에 다과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황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곳으로 연회장은 지나치게 넓었고, 응접실은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나서 가고 싶지 않았다.
다과가 준비되는 동안 세라엘은 간단히 몸치장을 했다.
드레스는 평상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디자인이되 화사한 색감으로 골랐다. 머리칼 단장에는 약간의 정성을 기울이기로 했다.
치장을 도우러 온 릴리는 빗에 장미수를 뿌려 세라엘의 머리카락을 빗기고 능숙하게 매만져 주었다.
“다 되었어요.”
머리칼 끝에 향유를 발라 마무리하고 나서 릴리가 뿌듯하게 말했다.
양쪽 귀 윗부분의 머리칼 한 줌을 땋아 뒤통수에서 교차시킨 모양이 세라엘의 눈에도 무척이나 맵시 있고 우아했다. 어깨 위로 구불구불 늘어뜨린 긴 머리칼도 마음에 들었다.
거울을 보던 세라엘은 돌연 낭패감 어린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작정하고 꾸미면 황녀를 의식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싫었건만, 결국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
카에드와 정분이 없다는 해명을 들었는데도 로잘린을 자꾸만 신경 쓰는 자신이 어색하고 달갑지 않았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여기 위에다 보석 핀도 꽂아 드릴까요?”
릴리가 포도알만 한 보석이 박힌 머리핀을 내보이자 세라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핀은 착용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래도 애써 줘서 고마워. 아주 마음에 들어.”
“천만에요. 그렇지만 가운데에 화려한 핀을 꽂으면 완벽할 거예요. 다른 분도 아니고 황녀 전하를 뵈러 가는 거잖아요.”
릴리는 포기하지 않고 세라엘의 머리통을 향해 머리핀을 치켜들었다. 세라엘은 반쯤 필사적으로 하녀를 막아야만 했다.
“괜찮아…! 치장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
무서우리만큼 해맑은 얼굴로 고집을 굽히지 않는 하녀를 간신히 만류하던 중, 문밖에서 사용인이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총 달려간 릴리가 문을 열어 뭐라 말을 주고받더니 다시 돌아왔다.
“다과 준비가 끝났나 봐요. 말씀하신 대로 사람을 보내 황녀 전하를 조찬실로 초대하라고 전달했어요.”
“고마워. 슬슬 내려가 봐야겠네.”
아쉬운 얼굴로 큼지막한 보석 핀을 도로 집어넣는 릴리를 보며 세라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제 모습을 점검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릴리와 함께 침실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가던 그녀는 1층 홀에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막 본성의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카에드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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