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57)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57화(57/150)
“귀가하셨습니까, 영주님.”
세라엘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릴리가 황급히 몸을 숙이고 예를 갖추었다.
카에드는 자신만큼이나 다부진 체격의 수하와 본성에 들어서고 있었다. 두 남자 모두 판금으로 된 견갑이 달린 가벼운 장비와 검은 망토 차림이었다. 성 밖으로 외출했다가 귀가한 모양이었다.
걸음으로 보아 층계로 올라갈 기세였던 카에드는 세라엘을 보자 곧장 방향을 틀었다.
세라엘은 침대에서 눈을 감기 직전까지 그가 곁에 있었던 걸 기억해 냈다. 게다가 그 전엔….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오는 카에드를 향해 그녀는 어색하게 턱을 숙이고 눈인사를 해 보였다. 그리고 즉시 후회했다.
‘내외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세라엘은 천연덕스럽지 못한 스스로를 질책했다.
남들은 애인과 이렇고 저런 교감을 나눈 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대하던데 어떻게 그러는지.
좁혀졌던 그와의 거리가 진한 접촉 한 번에 다시 멀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럴 리는 없는데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거북이처럼 인사했을까.
눈치 빠른 사람이 보았다면 카에드와 세라엘 사이에 틀림없이 뭔가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버벅거리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릴리와 카에드 옆의 수하는 눈치가 없어 보이지 않았다. 세라엘은 남몰래 울상을 지었다.
“카에드 님.”
세라엘은 한 걸음을 사이에 두고 가까워진 그에게 먼저 소리 내어 인사했다. 얼결에 한쪽 손바닥까지 내보이며 팔랑팔랑 흔들었다.
마음속 요동을 훤히 드러내는 그녀를 본 카에드는 입매를 추켜올렸다.
“잘 잤어요? 안색이 훨씬 보기 좋군요.”
그는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라엘의 얼굴을 이리저리 관찰하는 기색이었다.
세라엘은 손마디로 제 뺨을 쓸며 살짝 미소 지었다.
“오전부터 외출하고 오시는 길인가 봐요.”
“잠깐 일이 있어서요. 곤히 자길래 말없이 나왔는데, 서운하진 않았습니까?”
“…네?”
“일어났을 때 내가 옆에 없었잖아요.”
세라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잘못 들었나 싶어 반사적으로 되물은 건데 카에드는 착실히 답해 주었다.
그녀와 동침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말을 저리도 능청스럽게 할 수가 있다니. 카에드에게 릴리나 옆에 선 수하의 귀는 듣는 귀도 아닌가.
세라엘은 카에드의 옷자락을 쥐고 짤짤 흔들고 싶은 심정을 내리눌렀다.
“서운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리 물으시면 서운할지도 몰라요. 그럼 전 이만….”
“황녀를 만나러 가시는 길입니까?”
카에드는 질문을 던져 도망가려는 세라엘을 붙잡았다. 멈춰 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 조찬실에서 같이 차를 마시기로 했어요. 지금쯤 귀빈관에서 내려오고 계실 거예요.”
“황녀 일행은 오늘 중으로 성을 나갈 예정이니 최대한 빨리 끝마치십시오.”
성에서 로잘린을 쫓아 버리겠다는 그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세라엘은 짧은 대답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카에드는 더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세라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릴리가 뭔가를 감지한 듯 용기 내서 말문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오늘따라 더 아름다우시지요? 머리칼을 이렇게 묶으니까 목선이랑 귀가 드러나서 참 우아해 보여요.”
세라엘은 릴리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카에드뿐만 아니라 지척에 있는 부하까지 세라엘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인상적인 회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는데, 홍채 안에 자리한 검은 동공이 빛 받은 고양이의 것처럼 약간 뾰족한 모양이었다. 세라엘은 그가 카에드의 최측근인 바이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슬쩍 몸을 돌렸다.
“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걸요. 그럼 전 이만….”
“평소처럼 예쁘기만 한데.”
담백한 목소리가 다시 발목을 붙들었다.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어 그녀는 황망한 눈으로 카에드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묘한 짓궂음이 묻어 있었다.
카에드는 복숭앗빛으로 물든 지 오래인 그녀의 보송한 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가만 보면 세라엘은 그리 소극적인 편은 아니었다. 입을 맞출 때도 목석처럼 뻣뻣하게 굴지 않았고, 지난 새벽처럼 일방적인 그를 받아들일 때도 가감 없이 반응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다음날이나 어느 순간이 되면 꼬랑지에 불난 망아지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얼굴을 붉히기 일쑤였다.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건지, 아니면 보기보다 생각이 많은 타입인지. 후자라면 저 조그마한 머리통 안에서 어떤 복잡한 생각이 오가고 있는 건지.
뭐가 되었든 살이 살짝 오른 볼에 발그스름한 홍조를 머금고 당황스러워하는 세라엘을 지켜보는 일이 카에드는 퍽 즐거웠다. 얌전히 갈 길을 가려는 그녀를 괜히 한번 건드려 보고 싶은 것도 그 탓이리라.
카에드는 곧게 뻗은 세라엘의 가녀린 목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다소 집요해 보이는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이제 가 봐야 해요.”
세라엘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전에 뜨뜻한 체온을 가진 손이 그녀의 한쪽 볼을 부여잡았다.
“얼른 끝내고 오십시오.”
상체를 낮춘 카에드가 세라엘의 뺨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녀는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정작 눈앞에 구경꾼을 둘이나 두고 애정 행각을 벌인 남자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카에드는 1층 회랑으로 이어지는 방향을 힐긋 일별하더니 먼저 자리를 떴다.
표정으로 온갖 야단법석을 피우는 릴리와는 달리 바이퍼는 미동도 없이 세라엘을 보다가 카에드를 따라나섰다.
세라엘은 폴짝폴짝 뜀박질하는 가슴을 달래며 짐짓 태연자약하게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같은 방향의 팔과 다리가 동시에 나가고 있었다.
***
세라엘이 조찬실에 자리를 잡고 몇 분 후 로잘린이 들어왔다.
그녀는 3단 트레이에 놓인 각양각색의 디저트와 샌드위치 등을 구경하느라 로잘린의 어두운 낯빛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을 때 황녀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띤 상태였다.
“밀로즈 영애.”
“황녀 전하. 평안히 주무셨어요?”
의자에서 일어난 세라엘도 예의를 표하자, 로잘린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황녀는 빗물에 젖었던 드레스가 아닌 짙은 초록색의 찰랑거리는 새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녹안과 잘 어우러지는 차분한 빛깔의 드레스였다. 암적색의 머리칼은 등 뒤로 자연스럽게 내린 상태였다.
몸단장을 돕는 하녀를 보내 주었는데도 매우 소탈한 차림이었다. 세라엘은 자신도 과하게 치장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하인이 의자를 빼 주자 로잘린은 나비처럼 소리 없이 앉았다. 섬세한 찻잔 안에 홍차가 쪼르르 채워지고 세라엘이 먼저 서두를 뗐다.
“일찍 일어나셨다고 들었어요. 잠자리는 괜찮으셨나요?”
세라엘이 제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들이붓는 동안 로잘린은 어떠한 첨가물 없이 씁쓰름한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불편하지 않았어요. 어렸을 적의 기억보다 더 편안하던걸요. 본성 귀빈관에 처음 머물렀을 땐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답니다.”
“그러셨군요. 불편한 점이 없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인사치레를 끝낸 두 여자는 한참 말이 없었다.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잘린 연어 샌드위치를 집어 든 세라엘이 통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굵은 빗줄기가 면적이 넓은 창문에 세차게 들이치고 있었다.
“황녀님께선 비 오는 날을 좋아하시나요?”
세라엘은 날씨 얘기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두 손으로 뜨거운 잔을 감싸 쥔 로잘린도 창밖을 응시했다.
“아주 싫어한답니다.”
극단적인 불호 표현에 세라엘은 의외라는 듯 옅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로잘린은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처럼 눈빛을 흐렸다.
“질척질척한 흙바닥을 밟는 느낌도, 엉망이 된 구두도… 흠뻑 젖어 찝찝하게 달라붙는 드레스와 종국엔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것도 모두 싫어해요.”
“그런 문제라면 달갑지는 않겠어요.”
세라엘이 가벼이 공감했다. 로잘린은 잠잠하게 가라앉은 녹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밀로즈 영애는 어떤가요? 비 오는 날을 선호하는 편인가요?”
“사실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아요.”
딸기잼이 발린 스콘을 하나 집어 들며 세라엘은 뒷말을 이었다.
“빗소리를 좋아하거든요. 실내에 머물면서 차를 마시는 시간도 좋고, 종종 잠이 오지 않을 때 빗소리를 들으면 곧잘 눈이 감기곤 해서요.”
“그럼 비 내리는 날 실외 활동에도 거리낌 없는 편인가요?”
“행동에 큰 제약만 없다면 그리 꺼리는 편은 아니에요.”
로잘린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저는 소낙비에 호되게 당한 기억 때문에 도무지 비를 좋아할 수 없답니다. 밀로즈 영애는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없나요?”
“비에 젖어 생기는 고충은 살면서 누구나 경험해 봤을 텐데요.”
세라엘이 고개를 갸웃하는데도 로잘린은 말없이 눈을 빛냈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기색이었다.
“음….”
불현듯 세라엘은 오랜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그녀는 어렸을 적 모친과 나들이를 하러 갔다가 예기치 못한 폭우를 맞이한 적이 있었다.
“작고하신 어머니와 단둘이 저택 근처의 과수원에 놀러 간 적이 있어요. 햇사과가 막 열렸던 시기라 소풍 가기 딱 좋았거든요.”
“하지만 장마철과 겹쳤을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풀밭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떨어졌어요. 마차까지 정신없이 달렸지만 온몸이 흠뻑 젖고 말았어요.”
로잘린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세라엘의 과거를 경청했다.
“새로 산 드레스가 흙탕물로 망가지고, 신발 한 짝이 벗겨지는 바람에 맨발로 진흙을 밟았고, 그날 저녁부터 열이 오르면서 독한 감기에 걸렸어요.”
“저런. 정말 끔찍했겠네요.”
세라엘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딱히 비가 싫어진 적은 없구요.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도 생기는 거죠.”
로잘린이 나열한 모든 일을 겪었던 날이었는데도 세라엘은 무방비로 소낙비를 조우했던 그날이 싫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를 오래도록 지탱해 준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몸체는 어렸으나 전생의 기억을 가졌던 세라엘은 친모가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존재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와 공유했던 모든 시간이 즐거웠고 귀중했다.
로잘린은 꽤 긴 시간 동안 침묵을 고집하며 홍차로 목을 축였다.
“밀로즈 영애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오랜 추억을 회상하며 빗줄기를 지켜보던 세라엘이 눈길을 돌렸다. 황녀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불쾌할 수도 있는 주제라서요. 앞서 부탁드리지만 제 말이 끝나기 전까지는 자리를 비우는 일 없이 경청해 주었으면 해요. 제가 드리는 질문에도 조금 전처럼 솔직하게 답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가능할까요?”
세라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초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정공으로 다가오는 로잘린을 피하지 않았다.
“그럼요.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말을 끝마치자마자 로잘린은 질문을 던졌다.
“밀로즈 영애께서는 블카노프 대공을 사랑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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